17-20절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쁘게 영접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만나 그간의 사역들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은혜에 의한 구원을, 야고보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쳤다’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같은 믿음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믿음의 다양한 형태를 포용하는 사람입니까? 혹 같은 믿음을 품은 지체들임에도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습니까?
21-26절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겪을 위험을 예견합니다. 율법에 열성을 품은 유대인들이 할례와 율법보다 복음을 강조한 바울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나실인으로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성결 예식을 치르기를 제안하면서, 이를 통해 유대인들의 반감을 없애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율법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복음을 훼손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복음의 진전을 위해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신념을 지키는 일과 고집을 부리는 일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신념을 지키되 유연함이 있습니다.
27-30절 유대인들은 7일간의 성결 예식을 마치기 위하여 성전에 들른 바울을 발견합니다. 바울이 일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방인을 이방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전의 안뜰까지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오해하고 몰아세웁니다. 기울어진 시각은 사실마저 왜곡합니다. 사정과 사연을 헤아리기보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판단하고 단정 짓기에 급급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31-36절 예상치 못하게 천부장이 나타나 바울을 돕습니다. 동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온 바울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하는 삶에는 항상 위기가 도사리고 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은혜도 항상 따릅니다.
첫댓글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바울의 선교여정은 힘들기 그지없습니다 고난의 연속이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꺼이 영접하는 형제들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악한 폭행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폭도들의 만행으로 바울은 군사들에게 들려갈 정도로 장면은 처참합니다
아버지 영적분별력을 저에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새로운 영으로 새힘으로 거뜬히 이겨 나가게 해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늘 나의 주변에 천사들을 동원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힘들때 믿음의 선조 바울의 고난과 역경도 떠오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