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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煙 날리던 전설의 고향, 동해의 洛山寺
* 낙산사 창건과 관음보살
지난겨울 유난히도 많이 내려서인지 한계령 중턱부터 겨우내 쌓인 눈이 사람 키를 넘고 있어서 오르내리는 차들이 모두 설설 기어가고 있었다. 힘들게 올라간 정상의 풍경은 봄을 맞으러 동해바다로 가는 나그네들에겐 뜻밖의 세계, 즉 눈부신 눈꽃 밭이어서 이미 관동팔백 리에 와 있을 봄소식은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상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아든 우리 일행은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봄 속의 마지막 겨울정취를 만끽해 보았다. 게다가 날씨마저 화창하여 매번 올 때마다 찌푸렸던 관동의 하늘이 못마땅해 하던 나그네의 가슴을 모처럼 피게 하였다.
설악산의 동남쪽 산자락이 바다로 떨어지는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만 오봉산(五峰山) 마루턱에 푸른 동해바다를 굽어보며 천년고찰 낙산사(洛山寺)는 역시 해풍에 묻혀있었다.
먼저 『삼국유사』에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 유래를 들어보자.
옛날 의상(義湘)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 바닷가 어느 굴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살을 친견하고자 이곳에 와서 기도한 후 7일 만에 방석을 바닷물에 띠웠더니 용왕의 사신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이상이 더욱 간절히 기도하니 보살이 물속에서 팔을 뻗어 수염염주를 내어주었고 용왕 또한 여의주를 바치었다.
이에 대사가 7일을 더 기도하니 마침내 보살이 친히 현신하여 말하기를,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테니 그곳에 절을 지으라.” 고 하기에 의상이 그곳으로 가보니 정말 대나무가 솟아 나왔다. 이에 절을 짓고 옥으로 관음상을 만들어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이 천연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낙산사라 이름 짓고 떠나갔다고 하였다.
이렇듯 낙산사의 창건은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전설에서 시작하여 그 후로도 수많은 전설이 어리게 되었는데, 후일 『관동별곡』의 저자 안축(安軸)이 이곳에 들려 전설의 허구성에 대해서, 전설의 세계는 사량 분별로 따질 것이 아니라고 긍정하기도 하였다.
보살의 원통한 지경은 일찍이 바닷가의 산봉우리라 들었네.
불은(佛恩)은 감로수와 같고 향기는 자니(紫泥)로 봉한 것과 같네.
상대에 따라 몸을 나투셨으나, 미혹에 잠겨 만나지 못한 것 뿐이네.
참인가 거짓인가 따질 것 없으니 자애스런 모습에 참배하면 그뿐인 것을.
사적기(史蹟記)에 의하면,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창건된 후에 몇 번의 병화를 만나 소실되고 중건되는 수난을 되풀이하였으나 그래도 1천3백여 간 의연히 바닷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원효대사의 냉천(冷泉)은 어디인가?
의상과 쌍벽을 이루었던 고승 원효(元曉)도 뒤를 이어 이곳에 와서 관음보살을 친견하려 하였다. 처음에 오봉산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장난삼아 그것을 좀 달라고 하자 아직 익지 않았고 거절을 하였다.
원효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생리대를 빨고 있었다. 원효가 먹을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다 바친다. 이에 원효가 그 물을 버리고 직접 물가로 내려가 깨끗한 물을 떠 마셨다.
이 때 문득 논 가운데 있는 소나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만하시오(止”)라고 말하고는 날아가 버렸는데, 그 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 만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러 관음상 아래 이르니 그 아래 그 전에 보았던 신발 한 짝이 또 놓여있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원효는 흰옷 입은 여인이 보살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원효가 바위굴에 들어가 보살을 친견하려 하였으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굴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떠나갔다. 후로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위 설화에서 우리는 어떤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해골바가지의 물도 마시고 크게 깨달았던 무애자재했던 원효였다면 그까짓 생리대 빨은 물이라고 마시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만약 그 물을 마셨다면 아마도 원효도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는 스토리로 이 설화는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랑새의 말-“그만하시오(止)”의 뜻은 “아직 멀었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원효야, 너는 아직 멀었다.”가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면 낙산사가 원효보다는 의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도 시사하고 있다.
각설하고, 그럼 이런 전설이 서려있는 냉천이란 샘터는 실제로 존재했었을까?
무려 1천3백여 년 전의 허무맹랑한 전설이라고 치면 냉천의 소재파악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속의 대개의 전설에는 그런 이야기가 생길만한 그 무엇이 대개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냉천의 전설도 몇가지 현실적인 가능성을 q제하지 못하고 있다.
◆ 원효대사의 전설 깃든 냉천으로 보여지는 샘터
◆ 샘터 위의 서낭당과 소나무
먼저 문헌적인 조사를, 그 다음은 탐문, 실제조사를 병행해보기로 하자. 먼저 특기할 점은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 ‘냉천’이란 단어가 조선조 초기 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인다는 사실이다.
원문 그대로 인용해보면, <冷泉:在五峰山下, 世傳…(略)>이라 시작되는데, 아래 생략된 부분은 위에서 이야기한 삼국유사조가 열거되고 있지만, 그러나 냉천에 대해서는 “오봉산 아래 있다”라고 뚜렷하게 사실로써 못 박고 있다. 이외에도 정추(鄭樞)라는 문인의 시에도 냉천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자료상으로는 조선조 초기까지는 실제로 존재했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냉천조는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 존재가능성에 무개가 실리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인 실제 답사를 해보기로 했다. 먼저 낙산사로, 양양문화원으로, 향토사에 밝은 재야사가에 이르기까지 탐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 결과, 냉천과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는 샘터는 실제로 양양군 강현면 답리(畓里)에 있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문둥병 환자들에 등쌀 때문에 매몰시켜버렸다는 다소 애매한 이야기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삼국유사』의 원문기록을 새겨보기로 했다.
남쪽 교외(南郊)에 이르러/ 논 가운데(水田)/또 가다가(又行)/다리 밑에 이르러(至橋下)/들 가운데 소나무(野中松)
등과 『동국여지승람』의 “오봉산 아래 있는 냉천”을 대비시켜보니 낙산사가 자리 잡은 오봉산 남쪽 산기슭에서, 즉 양양읍 쪽에서 논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는 샘터에서 흐르는 시냇물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관음송이라는 소나무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필자는 놀랍게도, 별로 헤매지 않았지만, 기록속의 지점에 해당된 곳을 실제로 찾아낼 수 있었다. 민박촌으로 변한 낙산사 아래 마을에서 언덕위의 무슨 관광호텔로 올라가는 길가에 오래된 샘터가 있었고 그 위에 베니어판으로 덮은 초라한 서낭당까지 있었다. 게다가 그 샘물 속에는 멋진 소나무까지 투영되어 있었다. 아! 저 낡은 서낭당 아래 샘터가 정말로 원효가 마셨던 전설 속의 그 곳이란 말인가?
소나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속에서 필자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방향을 틀어 먼 갈매기 나른 먼 수평선을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조신(調信)의 ‘꿈속의 사랑’
관음보살은 수많은 보살 중애서도 중생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자비로운 이미지를 가진 탓인지는 몰라도 때론 남녀 간의 스캔들까지도 해결사노릇을 한 것 같다. 낙산사와 관음보살에 얽힌 이채로운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기에 이를 간추려 소개한다.
옛날 서라벌에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의 장원(莊園)이 명주(溟洲) 즉 강릉에 있었는데, 본사에서는 조신이라는 승려를 보내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이에 조신은 맡은 일을 하던 중에 그 고장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조신은 낙산사의 관음보살에게 그 여인과 같이 살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다른 배필을 정하게 되자 조신은 또 보살 앞에 나아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원망을 하다 잠이 들었다. 그러자 그 날밤 꿈속에서 그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기쁜 낯빛으로 말한다.
“저는 스님을 일찍이 한 번 뵙고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으나 부모의 명에 의하여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만, 이제 스님과 부부되기를 원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무척 기뻐하며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꿈결같이 세월은 흘러서 자녀를 5명이나 두게 되었으나, 원래 찢어지게 가난한 처지라 끼니를 마련하지 못하여 매번 사방으로 다니며 얻어먹으며 지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세 되는 큰 딸이 굶어 죽으매 두 부부는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게다가 10살 난 딸은 밥을 얻으러 갔다가 개한테 물려 아프다고 울부짖으니 두 내외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마침내 말하였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젊고 아름답고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으로 그대와 나누워 먹었고 옷 한가지로 그대와 나누워 입으면서 50년을 지내면서 사랑을 두터이 했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병이 들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심해지니 어느 겨를이 있어 부부간의 사랑을 즐길 수 있으리까? 붉은 입술과 예쁜 웃음도 풀위에 이슬이요, 난초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 아닌가요? 가만히 생각하니 옛날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모든 것은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니 원컨대 이 말을 따라 우리도 이제 혜어집시다.” 하니 부인도 이에 수긍하고 각기 아이를 둘씩 데리고 울면서 작별하려고 할 때 조신이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타다가 남은 등잔불은 껌벅거리고 날이 이제 밝으려고 한다. 그러나 조신의 머리와 수염이 희어졌고 세상 일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졌다. 관음보살을 대하기가 부끄러웠고 뉘우치는 마을을 금할 수 없었다.
조신은 돌아가 해현령에 묻은 큰 아이를 캐보니 바로 돌미륵이었다. 깨끗이 씻어 근처 절에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세우고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조신이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꿈속의 사랑에 대하여 이런 시를 지어 그 허망함을 경계했다.
잠시 좋은 일 마음에 들어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누런 보리가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을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 꾸고 도둑은 창고 꿈 꾸네.
어찌 가을 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로는 눈을 감아 청량에 이르리.
필자도 여기에 한 가지 더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무릇 아름다운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면 동해바다 낙산사로 가시게나…
* 매월당과 추강의 발길도
지형적으로 관동의 중심지인 명승지인 이곳에 족적을 남긴 사선들의 후예는 혜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시구절 한 수라도 남긴 시인묵객들은 50여인 정도나 된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부자, 양사언(楊士彦), 서산과 사명대사, 그리고 유명한 차인들인 남추강, 성현, 매월당 등이 눈에 띠는 이들이다.
그럼 먼저 매월당이 낙산사에 남긴 발자취부터 추적해보자. 그는 당시 이곳 테수 유자한(柳自漢)과 각별한 사이였든지 이곳에서 3년을 살았다고 유자한에게 보낸 편지 속에 털어놓고 있는데, 여섯 통에 달하는 편지의 내용을 보면 둘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짐작케 하고 있다. 한 통을 요약소개해보면,
제가 바다에서 즐겁게 논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만, 자주 찾아뵙지를 못했으니 천성이 게으른 탓입니다. 언젠가 태수께서 자신을 낮추어 예의를 다하는 것을 보니 장자로서의 풍도가 있어 저 같은 몸을 비루하게 하지 않으시고 매우 정성스레하시니 참으로 세상의 그릇이요, 빛을 높이어 스스로 기르는 분이 분명합니다.
술과 안주를 다시 쌀을 보내주시니 멀리서 사례하고 송시 몇 편을 지어 올리니 별폭에 있습니다. (하략)
이렇게 자기를 대접해주는 보살핌 속에서 매월당은 낙산에 머물며 선정속에서 차를 달이며 시를 짓는다. <낙산사에서 선 상인에게 주다>에서는,
언뜻 보아 깨끗한 의표 옛 친구같은데,
면목을 사모한지는 벌써 오래되었소.
절조 크고 높은 모양 소나무와 대나무요,
몸 가짐 밝고 높아 학의 의표로다.
고요히 선탑에서 바다의 달을 보는데,
다천(茶泉)에는 한가로이 푸른 기운 감도네.
천녀가(天女)가 차를 받드니 부엌은 깨끗하고,
산 잔나비 바리때를 받드니 도는 살찌네.
그 무슨 인연 얻어 삶 없다는 말씀 늘 들으며 돌집 소나무 다락에서 그대와 함께 의지하리.
또 <낙산노장 방 좌하에서>는, “난수정(難水亭) 그 앞에선 갈메기 벗을 하고 의상대 그 가에선 조각배 보고 있네” 라고 실제 남아있는 정자 이름을 거론하며 읊기도 하였다.
차인으로서의 매월당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소개한바 있음으로 이만 줄이기로 하고, 다음으로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소개하고자 한다. 역시 그도 금강산 유람 끝에 이곳에 들려 수의 시를 남겼는데, <낙산사에서 성유스님에게>에서는,
나는 강호의 객이고, 자네는 선가의 스승일세.
푸른 등 밝은 초저녁 저녁 법어는 과일처일 그윽하네.
창밖에는 기이한 바위 늙었고, 앞뜰에는 잣나무 늘어섰네.
다탕(茶湯)을 쉬자 병이 도지고, 미소로써 시 한수 지어내네.
또 추강은 <은그릇으로 차를 끓이다>라는 유명한 차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동자 불러 차를 끓여 마시며 저무는 강의 한기를 달래니
나의 매마른 폐와 마음의 불길 잡아 온갖 걱정 가지런해져
빈방이 문득 밝아지는구나.
그리고 추강과 매월당의 동지애적인 우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시와 편지가 양쪽 문집에 나타나고 있고 필자도 여러 번 이야기한 바 있기에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 강원관찰사였던 성현의 발길도,
물의 감별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성석인(成石因)의 손자로 『악학궤범』과 『용제총화』의 저자로써도, 또 많은 다시를 남긴 다인으로써 유명한 성종 때의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도 그의 관찰사로써의 순시중에 낙산사에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의 목민관으로서의 품격이 느껴지는 <낙산사에서>란 시구절 하나 소개한다.
오봉산 기슭은 나무로 울창하고, 짙은 구름 덮여 하늘은 어둡네.
도량의 당우는 홀연히 청정한 세계 열었고 백호광(白毫光) 은 대자비로 감쌌네.
고기잡이 금한 백성들은 살 도리가 없어 유랑의 무리되어 멀리서 왔네.
오직 이곳에 산마늘과 다과(茶果)만 있어 굶주린 배를 위로하네.
또 <낙산사 누상에서 읊다> 에서는 “바람부니 풍경소리 적적한 승당에 올리고 달빛이 올리고 달빛이 밀려들어 아름다운 그림자만 겹겹이 드리우네.”라고 읊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 『허백당집』에는 10여수의 다시가 보이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다시를 하나 더 소개하기로 한다.
조그만 집은 산기슭 숲에 의지해 있어 소슬하여 마치 절간 같구나.
숲속에 새는 집을 짓고 작약꽃은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네.
거위알술(鵝兒酒) 마시지 않고 무료히 작설차만 기울이네.
*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낙산사를 읊은 50여수의 주된 테마는 물론 관음보살과 동해바다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배꽃과 달밤을 읊은 서정적인 시가 많이 눈에 띈다. ‘만수이화(萬樹梨花)’란 구절처럼 낙산은 온통 배나무 밭이어서 이화가 만발한 봄날 밤 이화정(梨花亭)에 앉아 달을 구경하는 정취는 가히 선경으로 이름 높았던지 딴 철에 낙산을 찾아온 풍류객들은 봄날에 오지 못함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필자도 오래전 낙산사에 들렸을 때 때 마침 봄날이어서 막 절의 정문인 홍예문(紅蜺門)의 아치에 들어섰을 때 펼쳐진 배꽃에 덮인 낙산사 경내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터라 마침 이번에도 좀 이르긴 했지만, 봄날이라 꽃봉오리라도 볼까 기대했지만, 이게 웬일인가? 배나무는 만수이화 커녕 모두 베어저서 한 그루도 없는 것이 아닌가?
다만,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었던 곳에는 너풀거리는 비닐 끈에 얽힌 고추대만이 어지럽게 꽂혀져 있었다.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놓으며 이렇게 위안하는 수밖에….
다정(茶汀)! 그대는 그래도 그런 추억이나마 가슴속에 새겨놓지 않았는가!
<1989년 월간 태백 연재분>
첫댓글 여율목님의 낙산사 사진을 보니 문득 낙산사가 그리워져 엣 글이나마 올렵니다.
이글을 먼저보고 갔으면
더 좋았을것을ᆞ
아쉽네요ᆞ또 갈 기회가
있겠죠ᆞ
감사합니다ᆞ
낙산사 의상대 홍련암 해조관음상
감사합니다ᆞ누구나 한번쯤은
가봤을 낙산사이겠죠ᆞ
저도 오랫만에 가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ᆞ
이제 교통도 편리해졌으니
가끔 가보고 싶네요ᆞ
같은 경치라도 이렇게 다르게 해석되는군요. 역시 알아야 제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전설 찾아 가보세.
그런 전설이 있었군여. 여러번 가본 곳인데도....
너무 오래전 글이라 ... 글이 촌티가 좀 납니다. ㅎㅎ
촉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