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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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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30 04:46
-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으셨겠지만 어렸을 때
지혜로운 어른들이 자주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어렸을 때 이 말은 어른이 해주시는 말씀이니 무슨 뜻이 있겠지,
하고 받아들이긴 했지만 실은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요.
지금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그때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질 줄도 아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이기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힘이시고
하느님의 지혜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 줄 모르는 약한 사람이 아닙니까?
반대로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지요.
역도 경기에서 더 무거운 것을 들수록 더 힘센 사람이듯이
무거운 십자가일수록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강하지요.
같은 맥락에서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강합니다.
작은 고통도 두려워하고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통이나 십자가뿐 아니라 싸움에서 질 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져주는 것이고 진 다음에 이기는 것이요 짐으로써 이기는 것을 지향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 사람 곧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저세상에서 승리하고 상급을 받는 그리스도의 지혜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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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교장 연수를 받는 교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강사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감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이 교장이 되려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나요?”
교감 선생님들은 각자 “인성을 쌓아야 해요, 전문성을 키워야 해요. 교장 자격을 취득해야 해요.” 등의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강사는 결정적인 조건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정적인 조건은 무엇일까요?
“어느 학교의 어느 교장 선생님이든 누군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여러분에게 기회가 생깁니다. 교장 자격을 아무리 갖춰도 빈자리가 없으면 새로운 교장이 등장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교장이 되려면 교장 자리가 먼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장 자리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을까요? 준비를 미리 철저하게 해야 자리가 났을 때 얼른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자리가 먼저 나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자기에게 절대 오지 않을까요?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세상 안에서의 만족을 위해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한다면 절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하는 노력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실천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만 가지고 있을 뿐, 기름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당연히 스기로운 처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혼인 잔치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비유의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철저히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기다린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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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좋은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며 내 안의 사랑을 창백하게 죽이지 말고 세상 한가운데서 사랑하라(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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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에 도유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4-2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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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든 안 보든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과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 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 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관계 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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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궁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ChatGPT(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한국 전통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주로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사주팔자를 비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궁합은 상대방과의 조화를 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며, 서로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요소들을 분석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서로의 성격, 운명, 건강, 재물운, 자녀운 등을 포함하여, 결혼 생활에서의 조화와 성공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궁합은 특히 전통적인 결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은 이를 참고하여 결혼을 결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는 궁합뿐만 아니라 서로의 사랑과 이해, 상호 존중 등의 요소가 결혼 생활의 성공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궁합에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궁합을 삶의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궁합이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동양적인 방법이라면 서양에는 Enneagram(애니어그램)과 MBTI(앰비티아이)가 있습니다. 2002년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신부님들의 성격이 다르고, 때로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장 신부님은 서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 프로그램을 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애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9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앰비티아이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저는 궁합을 본 적은 없지만 애니어그램과 앰비티아이 검사는 받아 보았습니다. 애니어그램 검사에서 저는 ‘협조자형이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앰비티아이 검사에서 저는 ‘동정심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으며, 나눔과 베풂을 중시하며, 타고난 협력자로서 동료애가 많고 친절하며 능동적인 구성원’이라고 파악되었습니다.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를 믿는 건 아니지만, 저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직관적인 사람과 논리적인 사람과 대화할 때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의 조건은 궁합도 아니고, 애니어그램이나 앰비티아이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유무’가 결혼의 조건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직업, 재물, 능력을 결혼의 조건으로 볼 수 있겠지만, 어르신들은 그것보다 먼저 ‘신앙’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형수님도 형님과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면 ‘관면혼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성공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일지라도, 그 복음이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로 보일지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복음과 십자가’를 삶의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잔에 담아야 할 ‘기름’을 말씀하십니다. 그 기름은 타인과 나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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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열 처녀의 기다림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중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밤이 되고 모두 잠이 듭니다. 어리석은 처녀들만 잠이 든 것이 아니라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를, 신랑을 기다리다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밤이 되면 슬기롭거나 어리석거나 할 것 없이 모두 잠이 듭니다. 이 비유는 뜻은 이렇습니다. 밤이 되면, 즉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과 나를 괴롭히는 어떤 유혹이 다가올 때 사람은 모두 쓰러지고 잠들게 됩니다. 빛을 잃게 되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의 나약함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언제나 유혹을 이길 수 있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악마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다가옵니다. 그러니 모두 깨어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만 깨어난 것이 아니라 모두 깨어납니다. 이 뜻은 이렇습니다. 희망이 다가오고 기회가 다가오고 새로운 힘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의미로는 하느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님은 마지막에 “그날과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라고 하십니다. 모두 잠들었는데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쓰러지고 아프지만 기름을 가지고 있으라는 말이지요.
기름을 가지고 있어라.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힘들어 쓰러지고 어둠에 고통스러워할지라도 그래서 잠들어도 기름은 가지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기름, 그것은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강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기름을 바릅니다. 견진성사 때도 바르고 병자 성사를 하면서도 바르고 사제품을 받을 때도 바릅니다. 이 기름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름입니다. 언제나 없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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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짜피 상대는 정해져 있다.
저는 티비를 즐겨보지 않습니다.
뉴스 정도 보는 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즐겨보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구 예능과 축구 예능입니다. 스포츠를 좋아할뿐더러 대리만족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집에서 밥을 먹으며 축구 예능프로를 봤습니다.
막 경기를 시작하려는데 주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상대는 정해져 있어. 그러니까 쫄지 말고 우리 것 하자.’라고 말입니다.
그때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어차피 상대는 정해져 있습니다. 이 순간 바꿀 수 있는 것은 상대가 아닌 내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마음먹고 그것에 임하느냐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어차피 정해져 있습니다. 상대가 이미 정해졌다면 오히려 상대를 탓하지 말고 내 마음을 다시 바로 잡아보세요.
결과는 분명 달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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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깨어 있는 삶”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시편33,5ㄴ)
시편 화답송 후렴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신비가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주님의 자애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 밤 하늘입니다. 선선한 날씨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이요 곳곳에서 풀벌레 영롱한 찬미소리들입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 광야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어느 사제의 묵상글을 보다가 서두의 내용에 잠시 멈췄습니다.
‘궁합이라는 말이 궁금해서 챗지피티(ChatGPT)에게 물어보니 그 대답이 기가막히도록 놀라웠습니다. “한국 전통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주로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사주팔자를 비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 이어지는 긴 설명이었습니다. 어느 지식 스승이 이보다 더 잘 대답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제 지식 스승은 챗지피티가 대신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스승의 역할은,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가 하는 심각한 물음에 직면합니다. 답은 지혜입니다. 날로 지혜로워지는 스승이,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지식은 전제로하고 말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지혜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깨어 있는 삶”으로 정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지혜로워지길 소망합니다. 지식을 쌓아 놓는다 하여 지혜가 되지 않습니다. 지혜가 결핍된 지식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혜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날로 자신을 비워가는 하느님 공부가 심화되어가면서 지혜의 선물이요 지혜로워지는 삶입니다. 지혜와 사랑, 지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지혜의 사람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어른의 도리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다산>
이 또한 자기를 아는 분별의 지혜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른이 진정 현자입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관여하지 마라.”<논어>
이 또한 삶의 지혜에 속합니다. 이런 모든 지혜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교황님의 성 요셉 봉헌회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젊은이들은 우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안에 살면 살수록, 우리는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더 잘 도울수 있다.”
참으로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 현존 안에 살수록 지혜로운 삶이요 이웃을 잘 도울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 구도자들이 사막의 수도승들을 찾았던 것도 삶의 지혜를 찾아서 였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선적으로 할 일은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지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참 명쾌하고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저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힘이자 지혜이신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비유에 나오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깨어 준비된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두 부류의 사람들의 대조가 실감이 납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등에 가지고 있었다.”
유비무환입니다. 기름 준비는 각자 고유의 몫입니다. 평상시 제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섬김과 선행의 삶에 항구함이 바로 슬기로운 삶이요 기름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절대 빌려오거나 탈취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기름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도착했고, 등불을 켜들고 환히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입장했고 문은 닫힙니다. 후에 돌아온 이들이 문을 열어 달라 애걸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한결같이 냉정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평상시 주님과 사랑의 친교가 얼마나 소홀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최선을 다해 살면서 주님과 사랑의 친교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제 주님이, 죽음이 오셔도 반가이 맞이할 수 있을 것이며 뜻밖의 일이 발생해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면서 늘 깨어 준비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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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가는 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4)
당신께 가는 길
언젠가는 끝날
아직은 걸어야하는
당신께 가는 길
당신께 닿기까지
어둡고 흐릿한
당신께 가는 길
몸소 등이 되어주시는
당신과 함께하려
기름이 되어
나를 기꺼이 사르며
당신께 가는 길
나를 태우니
당신께서 비추시어
어두움마저 결코
어둡지 않은
당신께 가는 길
아직은 걷고 있는
언젠가는 끝날
당신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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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3-4)
처녀들과 등
그러나 삿된 감각에 빠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은 일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그것을 삼가기 때문에 처녀라는 이름을 받았다면, 왜 다섯은 들어가고 다섯은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다 처녀입니다. 그런데도 그중 반은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이는 처녀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등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옳지 못한 감각을 즐기는 것을 삼가기 때문에 처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선행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선행에 대하여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당신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고도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는 동정을 뜻하며, ‘등불을 켜 놓는 것’은 선행을 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8,12). “나를 따라오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영성의 대가들은 영혼이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능력은 언제나 가장 달콤한 것을 찾습니다. 둘째 능력은 언제나 가장 높은 것을 찾습니다. 그리고 셋째 능력은 언제나 가장 선한 것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너무나 고귀한 나머지 선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안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는 모든 피조물이 찾고 구할 만큼 달콤합니다. 게다가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은 그들이 하느님을 찾고 구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피조물이 추구하는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와 생명을 주는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기꺼이 신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복이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230)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기도를 위한 전제 조건들
모세 아빠스께서 말씀하셨다.
“기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헛수고를 하는 것일 뿐이네.”
그러자 한 형제가 여쭈었다.
“기도와 행동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빠스께서 대답하셨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네.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와 화해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네.”
나일로 아빠스께서 말씀히셨다.
“자네와 관계되는 일들을 자네 마음에 드는 대로 하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하게. 그러면 자네는 헷갈리지 않고 감사로 충만한 마음으로 기도 속에 침잠할 수 있을 것이네.”
어느 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돼지의 눈은 하늘을 바라볼 필요 없이 지속적으로 땅만 바라보도록 만들어져 있네. 육체적 쾌락에 빠져 들어 있는 사람의 영혼도 이와 같이 되어 있네. 쾌락의 늪에 한 번 빠져 든 영혼은 하느님을 바라보기가 매우 어렵고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기쁨에 동참하기도 무척 힘들다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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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25,6)
휴가 중에도 기도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자칫 휴가 중에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수도 있었겠지만,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과 내일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탈렌트의 비유’(25,14~30)의 주제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의 처음과 마침의 순간까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이신 주님을 우리는 늘, 항상 깨어 기다리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가까이, 그러나 하늘나라는 아직 우리네 삶에서 성취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깨어 살아가면서 각자의 빈 등잔의 기름을 우리 삶의 많은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을 통한 얻음과 잃음을 거듭하며 채워나가야 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을 하느님으로부터 정산精算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서 알고 있지만, 쉽게 망각하는 것 하나는 우리네 삶에서 지금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잃어버리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리기 위해, 혹 되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삶의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야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과 여기 지금 살아 있다, 는 놀라운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뒤늦게 서야 깨닫게 됩니다. 때늦은 후회와 자책을 하지 않는 충만한 삶과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전 존재로 삶을 직면하고 자기 존재 이유와 의미를 자각하며 깨어 살아야 합니다. 저는 10번의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이나 시술했었기에, 깨어나다, 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체험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깨어난 상태는 의식, 정신을 회복했다는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니 깨어 있어라.”(25,13)라는 권고는 영적이며 실존적 차원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 깨어 있음이며 깨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불교적인 ‘깨어 있음은 지켜봄觀이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모든 것을 놓거나 버리며 마음은 가만히 지켜보고 머무르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자기다움을 남과 다름으로만 이해하고, 남과 다르기 위한 삶을 살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가장 쉽게 드러난 현상이 남들과 비교해서 끊임없이 더 높은 스펙을 쌓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학교 교육은 진리나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펙을 쌓아 남들과 다르게 만드는 공장과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열심히 부단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과 다르게, 남보다 더 많은 스펙을 쌓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존재의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다움은 남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남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참된 자기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시97,12)처럼 슬기로운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다움을 찾음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늘 자유롭고 매사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팎이 늘 열려 있고 깨어 있기에 일상의 평범한 가운데서 거룩함과 비범함을 느끼고 만지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 깨어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늘 그리고 이미 어제부터 깨어 살아가고 있었기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의 오심을 긴장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즐기면서, 자신들이 예상하지 않은 때 오신다고 해도 오신 신랑 앞에서 갈팡질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어제처럼 오늘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깨어 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기에 신랑이 오실 미래 또한 평범하게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기롭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의하면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모르지만 늘 깨어 준비하고 대비하며 지금 여기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과 다르게, 남처럼 되려고 허둥대며 인생에 부질없는 스펙의 탑을 쌓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과 삶을 기쁘게 행복하게 향유 하면서 지금 여기서 이미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묵묵히 충실히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흔들어 깨우는 영적 자명종의 울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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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결국은 깨어서 기다리는 수밖에 /
박윤식 [big-llight] 240829. 21:41 ㅣNo.175504
예나 지금이나 초미의 관심사인 ‘그 때’는 초지일관 ‘아무도 모른다.’이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예수님의 이 단답형 답은 말 그대로 애매하고 답답하기 그지없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주님께서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실 것이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며 오신단다. 이게 어쩌면 거짓말 같은 정답일 게다. 그러니까 그때의 그 날짜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녕 모두가 예수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이비나, 거짓말쟁이들이리라.
그 시간을 알고 있다면 날짜가 임박해 올 때에 준비도 할 수 있겠지만, 모르기에 지금부터 늘 준비를 해야만 한다. 주인이 언제 찾아와도 오로지 성실하게 일하는 종처럼, 신랑이 언제 도착해도 초조하게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는 신부처럼 지금 그렇게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만 할 게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판의 그 날은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이라고 단정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심판 날이 언제이든지, 그 심판의 결과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에.
사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을 대개 밤에 신부의 집에서 올렸다. 신랑은 축하받으려고 먼 길로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행렬한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가 어려웠을 게다. 그래서 신부는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대신 친구들이 마을 어귀에서 신랑과 그 일행을 맞이하는데 올 때까지 밤새 기다려야만 했으리라. 그러다가 신랑 친구가 다가와 “저기 신랑이 온다.”라고 외치면, 그제야 등불을 밝히고 나가 신랑을 영접하였단다.
이렇게 혼인은 온 동네잔치로 치렀다. 당연히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 밝혀 춤과 노래로 축제를 벌인다. 결혼식은 주로 밤에 한다. 낮에는 사막의 열풍 땜에 어려웠기에 주로 바람 부는 밤을 택했다. 증인인 들러리는 대략 열 명쯤이었다. 그들은 깨어 있는 자세로 함께 신랑을 기다리는 공동체였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노력과 책임이 필요하다.
선수는 평소에 열심히 연습해야 시합 때에 좋은 경기를 펼친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정적일 때에 그분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할게다.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기준은 별것 아닌 단지 준비성이다. 지혜는 학력이나 지식이 아닌 믿음이기에. 깨어 기다리는 이만이 주님을 만난단다. 그러면 어떤 게 준비를 잘하는 것일까? 그 모범 답안은 가장 작은 이,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이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 그를 주님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등잔에 준비해서 넣어 두어야 할 기름일 게다.
이렇게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 준비에서, 세삼 확인이 되리라. 사실 신랑은 예수님을 뜻하고, 그분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이다. 한밤중에 예상하지 못한 그분의 도착은 주님께서 오실 예견할 수 없는 시간을 나타내고,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공동체이니까. 혼인 잔치에 들어가거나 거부당함은 심판의 판결을 나타낸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늘 깨어 준비할까?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다시 오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신다고 굳게 믿는 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단순히 각자가 뿌린 작은 이 사랑이다. 물론 그 날 그 시각만큼은 아무도 모르기에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작은 이’ 사랑으로 깨어 기다리자. 그분께서 지금쯤 저만치 오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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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의 복음에 대해서, 일반적인 해석은 아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해설을 소개하려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여기서 말하는 잠든 처녀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고 등잔의 기름은 선행이라고 설명합니다.
등잔에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자선을 베풀지 않은 이들입니다.
비유에서 열 명의 처녀들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동정의 가치를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9,12 참조).
동정은 계명으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동정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동정 생활을 하면서 선행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은 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처녀들”(25,3)이라고 일컫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그들이 “몸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였지만 돈에 대한 사랑에는 굴복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동정 생활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더라도,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선행을 전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등불에도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관대함이 요구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가지고 있지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다음에는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에게 기름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때,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를 위하여 준비할 기름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한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등잔에 기름을 마련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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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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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음은
우선 준비를 가리킵니다.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미리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그 날과 그 시간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즉 그 날과 그 시간은 우리가 준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기름이 없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흔히 종말의 시간으로 해석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지금 당장 종말을 준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종말은 심판과 연결되는데
심판이라고 하면
우리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 날과 그 시간을
나의 모습이, 감추어 두고 숨겨 왔던 내 모습이
드러나는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감추어 왔던 것들이
의외의 순간에
생각도 못했던 상황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잘 준비한다는 것은
언제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드러나지 않게
더 잘 감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잘 맞이한다는 것은
평소에 나의 삶을, 나의 모습을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히 다 드러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고 드러낼 필요도 없습니다.
남에게 드러내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단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본래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과 행동은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전혀 다른 것을 꺼내놓지만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서 언젠가
그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했던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
나의 민낯이 드러날지 모릅니다.
온전히 솔직하게 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솔직하려고 노력할 떄
민낯이 드러나는 상황은
그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언제 그것이 드러날까하는 걱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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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하루는 주님께서 아직 우리에 대한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는 말씀 가운데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젠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의 날이겠지요.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뵙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그분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날,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심판과 단죄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었던 대상들, 넉넉한 은행 잔고, 탄탄한 주식들, 멋지게 쌓아 올린 지상 장막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슬픔의 날도 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의 그 날과 그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 삶의 많은 날들이 베틀의 북에 남아 있는 실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가 주님 대전으로 나아가는 날, 결국 우리 각자의 종말, 즉 개인의 죽음도 그 날과 그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지만 내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 새로운 시간은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매일 매일 펼쳐지는 하루하루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 하루를 어떻게 하면 보다 알차게, 복음적으로, 주님과 이웃과 공동선을 위해 잘 사용할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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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며,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예기하지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 선은, 사랑은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쳐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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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 등이 꺼지지 않게 태워야만 살 수 있는 인간
오늘은 등불에 필요한 기름이 충분하여 혼인 잔치,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과
기름이 부족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련한 처녀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의 불, 곧 사랑의 의지가 타오르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등불의 의미는 봉헌이다.
나를 태우는 것.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나의 봉헌이 그리스도께 합당하기 위해 어때야 하는가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은 자기를 봉헌하는 삶, 자기를 불태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부터 알아야겠습니다.
나에게 불을 붙여 준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태우는 삶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한 사업가가 김창옥 교수의 강의 CD를 내고 싶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 표정이 제가 한마디만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시네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남자 사장이 그 자리에서 진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방금 함께 들어왔던 여자 실장은 자기 아내이고, 아내에게 회사를 맡기기 위해 나와서 일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자녀들 교육보험도 다 들어놓고, 자신은 지금 자살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막내였는데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가난했는데, 게다가 어머니가 중풍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는데 이미 결혼한 누나들의 집에 돌아가며 1년씩 얹혀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이 “왜 냄새나는 할머니가 우리랑 살아야 해?”라고 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니 조카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자신도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기숙사와 장학금을 대 주는 곳에 합격하여 나중에는 원양어선을 타서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실만하게 성장했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걸린 어머니가 창피하고 떠나고 싶었던 과거의 자기 모습이 너무도 마음이 아파 그다음부터는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효도를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주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수많은 사기를 당하여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삶은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안 되니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할 수 없으니 죽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에서 주인공은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강에서 뛰어내렸는데 떠내려간 곳이 밤섬이었습니다.
밤섬은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기 자아에 갇혀서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싶은 꿈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마치 불경에 나오는 칡넝쿨에 매달려 떨어지는 꿀이나 맛보며 고통을 잊는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던 나그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김 씨는 한 여자가 보내는 신호에 응답하게 되고 조금씩 자기 섬에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가 사람을 자아의 지옥으로부터 구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봉헌하라고 한 것입니다.
봉헌은 자기를 태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위해 십분의 일도 태울 수 없다면 세상에서 그 심장에 불을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불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제물들에게 등불이 나타나 그 제물을 태운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외아들까지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맛과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체조배와 미사, 하.사.시., 7기도와 같은 것들로 그 불을 다시 지피려 합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지옥이고 나를 사랑한 이를 위해 나를 태우는 삶이 행복입니다.
이것을 알고 규칙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하는 예배를 올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수많은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 앞에서 300명의 자기 군사에게 준 것이 나팔과 항아리에 든 횟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항아리가 깨질 때 손에 들리게 됩니다.
주님의 등불은 나에게서 자아의 항아리를 깨뜨립니다.
그렇더라도 그 횟불이 지속적으로 타려면 계속 기름을 보충해주어야 합니다.
오하이오주 해밀턴에 사는 남편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아내 준 네이피어(100)는
80년간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일 자기 전에 뽀뽀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있더라도 각자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여 삭힙니다.
뽀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삭혀야 했고 또 키스하고 나면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두 부부가 매일을 연애하듯이 살게 된 방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적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성체를 영한다면 결코 우리 안의 등불은 꺼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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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13).”
1) 여기서 ‘어리석다. 슬기롭다.’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기름을 미리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들이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신랑이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하는 말,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
이 말씀의 바로 앞에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과 주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세속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사람들도 모두 ‘어리석은 처녀들’에 포함됩니다.>
2)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라는 말은, 인간들의 생각보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질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고 표현됩니다(마태 24,50).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갑자기
재림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의 날과 시간은 인간들이 미리 계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이비 종교에서 종말의 날짜를 자기들 마음대로
계산해서 예고하고, 그래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일들이 자주 생기는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도 “종말과 재림이 언제인지 미리 아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아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일까?
만일에 주님께서 종말의 날과 당신의 재림 날을 미리 예고하신다면, 잘 준비하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조금은 있겠지만, 아마도 인간 세상은 굉장히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날이 되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에서 쾌락에 빠져들 것이고, 그리고 그 예고 자체를 아예 무시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떻든 종말과 재림은, 판공성사 날짜를 미리 공지해서 준비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회개는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깨어 있는 일’도 평소에, 즉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평소에(지금) 하지 않고 갑자기 하는 회개는, 또는 억지로 하는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이고, 그런 회개는 회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비유는 비유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문을 닫아버려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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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지휘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휘자의 길을 처음부터 '엘리트코스'처럼 밟아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래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담당하던 연주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자기 앞에 놓아둔 보면대 위의 악보조차 잘 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연주가 있을 때마다 항상 악보 전체를 통으로 미리 외워서 연습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연주회 직전에 갑자기 지휘자에게 긴급한 사정이 생겨서 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된 것입니다. 지휘자 없이 연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대체할 사람을 섭외할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관현악단 단원 중에 누군가가 지휘를 하는게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는데, 문제는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연주할 곡의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단원들 중에 곡을 전부 외우고 있던 사람은 토스카니니 한 사람 뿐이었고 그가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봉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19세, 전 세계적인 명 지휘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회의 신"은 머리의 앞쪽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뒤쪽은 대머리라고 하지요. 그래서 기회가 나를 찾아왔을 때 잡지 못하면, 나를 떠나버리고 난 다음에는 붙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기회를 살리는 것은 아니지요. 평상시부터 준비되어 있던 사람만이 그 기회를 통해 삶의 긍정적 변화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기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잘 준비하고 있던 사람, 즉 평소에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느님 뜻에 맞는 것들을 선택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들만이 종말의 순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잘 준비하라.'고 강조하시며 어떻게 하는 것이 종말의 순간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혼인잔치는 종말의 순간에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신랑을 준비하는 열 명의 처녀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열 명의 처녀는 어떤 자세로 종말을 기다리는가에 따라 '어리석은 사람들'과 '슬기로운 사람들'로 대비되어 보여집니다. '어리석은 처녀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신랑을 기다리는데에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그들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으며 등불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그녀들은 신랑을 기다렸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들은 불을 밝힐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려면 등잔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손에 들고 있었을 뿐 그 등잔이 구체적으로 왜 필요한지, 그 등잔을 어떻게 밝혀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기에 일단 세례를 받기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분을 왜 따라야 하는지도 모른채 그저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라는 기름이 없기에, 알맹이가 없기에 무의미하고 지루한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이 왜 등잔을 들고 있는지 그 이유와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찾아오는 신랑의 처지와 마음을 생각하고 배려했기에 혹시라도 신랑이 밤 늦게 도착할 상황까지 대비해 기름을 준비해두었던 것입니다. 내 입장, 내 바람만 생각하지 않고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받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며 행동하기에 그들의 신앙생활은 모든 순간이 의미있고, 기쁨이 가득합니다. 등잔이라는 것이 결국 혼인잔치를 더 기쁘게 보내기 위한 준비이듯, 지금의 신앙생활이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준비임을 잘 알기에 사랑과 자선을 행할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그 실천들이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기름이자 동시에 그 잔치를 더 큰 기쁨으로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줄 기름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기로운 처녀들을 본받아 구원의 기름, 사랑의 기름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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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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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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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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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의로운 중재자로 살아가는 삶
<2024.8.30>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6:13~31절)
❝의로운 중재자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화목과 화평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의로운 중재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 탐욕을 벗고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3~18절).
홍해의 기적의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호성은 잠시였을 뿐 어느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13절).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에 감사하지 않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을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했습니다(14절). 그리하여 비록 그들이 요구한 것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을 피폐하도록 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당신의 대리자로 모세를 세우셨고,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하게 한 레위 지파의 첫 대제사장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다단과 아비람이 하나님이 세우신 중재자들을 질투하였고, 결국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키고 불이 임하여 사르는 무서운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16~18절).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교만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시적인 계획과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을 배신하는 어리석은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헛된 욕심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길이 됩니다. 탐욕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도와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목을 위한 중재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평화의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9~23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시내 산 부근에서 형상이 없는 하나님을 즉, 자기들의 영광이 되신 분을 금송아지로 형상화하여 섬겼습니다(19~20절). 그들은 또한 애굽에서 큰 일을 이루신 자신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함의 땅에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들도, 홍해에서 행하신 두려운 일들도 그들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21~22절). 그래서 하나님을 그들을 멸망시키시겠다 선언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세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파멸의 분노를 거두어들이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23절).
모세는 백성의 분노와 불순종의 집단적 행동에 맞서 싸우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며 인내할 줄 알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노를 풀어 드리고 백성을 살렸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인도해 가야 하는 목회자로서 자기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자기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의 일을 도모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의분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24~31절).
‘기쁨의 땅’은 열 두명의 정탐꾼이 정탐을 하고 온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복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기쁨의 땅에 대한 기대와 감사보다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를 하시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24~27절). 마치 씨를 공중에 뿌려서 땅에 흩어지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면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음으로 우상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그들의 행실로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였고, 재앙이 그들에게 닥쳤습니다(28~29절).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중재하니 재앙이 그쳤습니다(30절).
비느하스는 악한 자들을 과감하게 처단하고 관영 하던 죄의 기운을 다스렸습니다. 이와 같은 비느하스의 열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그 결과 재앙이 그쳤습니다. 분노 그 자체는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불의 대하여 일어나는 분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비느하스는 직분을 잘 감당한 자로서 큰 영광을 누렸으며 하나님은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여기셔서 대대로 무궁한 이름을 남기게 하셨습니다(31절). 하나님을 위하여 의분을 품고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중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중재자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중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탐욕과 욕망을 버리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감사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본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의 일을 도모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6:13~3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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