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5
4월22일[부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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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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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c7qMUbKX2c
[서울대교구 태철민 엘제아리오(경찰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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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거짓 목자를 경계합시다!>
요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거짓 목자, 즉 양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목자가 아닌 잡아먹는 삯꾼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대마귀들이요 악령들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고 등장해 어린 양떼를 현혹시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양들을 섬김의 대상이나 사목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먹잇감이요 욕구충족의 대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가짜 뉴스를 진짜인 양 목숨 걸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가장 기본인 인성이나 품위, 겸손의 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박한 언행과 기이한 억지 논리로 양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베엘제불입니다.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습니다. 홀로 식별이 어려울 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톨릭교회 목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거짓 목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주님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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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EHP0f0Ot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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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목자시라면 나는 양인가? 그럼 문지기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등장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헛갈릴 수 없습니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부르심은 마치 “마리아야!”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소리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아이는 어머니의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여기는 이들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면서 절대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목자는 한 명입니다. 어머니가 하나인 것처럼. 어머니가 여럿일 수 없듯, 아버지께 가는 길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어머니를 좇아가면 잘못된 아버지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풀밭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양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양들이라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양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목자와는 구별되는 일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양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제가 다른 신부님과 몇 명의 평신도분들과 함께 시작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미사하고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눕니다. 가끔은 힘든 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끔은 기쁘게 웃고 떠들기도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공동체가 미사를 하고 나눔을 하기에 그 직무를 담당합니다. 미사와 나눔이 빠지면 이 공동체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사제로서 이 공동체의 울타리가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공동체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사람, 혹은 세례 받았더라도 오랜 냉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들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불교를 믿던 한 자매가 명동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자매는 이번 모임 때 30년 만에 고해 성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 전에 모임을 하고 헤어질 때 제가 “이번 부활 땐 꼭 미사 나가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하나의 명령처럼 들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혹은 고해성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 지를 고민하며 망설였는데 막상 고해성사하고 성체를 영해 보니 그동안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30년 만에 성체를 영한 그분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문지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때까지 양들을 지키는 역할입니다. 공동체가 유지되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역할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불린 이는 새롭게 공동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리나 거짓 목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참 목자에게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는.
저도 교사회를 하다가 교사 피정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뒤돌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묶어 주는 공동체가 없었다면 그 부르심을 받는 게 가능했을까요? 우리에겐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엮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부르심을 기다리는 양들이 아닌, 양 우리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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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성금요일입니다. 성금요일은 3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말씀의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입니다. 말씀의 전례 중에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창에 찔린 상처에서 나온 예수님의 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무도함과 우리의 잔혹함으로 예수님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의 무도함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용서하는 피였습니다. 그 상처에서 나온 피는 우리를 사랑하는 피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피와 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전례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교우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은 자식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자식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도 그 자식을 벌하거나, 그 자식의 죄를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 ‘공공의 적’이 생각났습니다. 학벌이 좋고, 능력이 있는 증권맨인 아들이 부모님에게 큰돈을 벌 수 있다며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하였습니다. 보모님은 보육원을 운영하기에 아직은 유산을 줄 여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부모 몰래 생명보험을 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강도로 위장해서 부모님의 가슴을 칼로 찔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들의 손톱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비정한 아들을 보면서 떨어진 손톱을 삼켰습니다. 손톱 때문에 아들의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손톱 때문에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자식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인이 어떻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설령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난 너희를 잊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다른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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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 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며 인도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3절) 문지기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문이시며 진리이시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이 목자는 양들을 앞에서 이끄신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친다.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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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서로 오랫동안 사귀어 왔어도 상대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매번 의심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공적으로 소개하는 ‘계시’이고, 요한 복음서는 이 계시를 “나는 -이다.”라는 문장으로 선언합니다. 그 어떤 과장이나 기교 없이 “나는 -이다.”라는 조금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당신을 계시하셨다면, 오늘은 “나는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양 우리의 문’이라고 하시지 않고 “양들의 문”이라고 하신 부분을 눈여겨보게 되는데, 단순히 물리적인 울타리의 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고 ‘풀밭을 찾아 얻게’ 하며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독서는 바로 그 문으로 들어가 이제 새로운 전망을 가지게 된 베드로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그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가서 유다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음식을 먹은 일이 논란이 되자 베드로는 명백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새 이스라엘’, ‘진정한 양 떼들’을 위한 문이 열렸음을 장엄히 선포한 것입니다.
사방이 막혔다고 느낄 때,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 예수님께서는 홀연히 문이 되어 주십니다. ‘여기로 와라, 이게 문이다!’라고 하시며 몸소 당신께서 ‘양들의 문’이 되어 주십니다. 그 문만이 숨 막히는 압박과 불의, 공포와 불안에서 우리를 참된 자유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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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목자이신 주님 말씀만 들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1) 이 말씀은, 당신만이 ‘참 목자’ 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다.’는 양들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문으로 들어오다.’인데, ‘문으로 들어오신 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진짜 메시아“를 뜻하고,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오는 자‘는 “하느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가짜 목자와 가짜 예언자, 가짜 메시아”를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ㄱ)
‘이단, 방탕한 행실, 탐욕, 착취’ 등은, 그자들이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며 거짓 목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요즘에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양이라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입니다. <세례를 받은 뒤에도 자만하지 말고 성경과 교리를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양이라면 앞장서 가는 목자의 뒤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거짓 예언자들, 거짓 목자들,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자들의 선전을 듣지 말고, 그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입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자들의 말을 듣다보면,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말씀이 아닌 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아닌 말들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리가 들린다고 하더라도 안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여기서 ‘참아 주다.’ 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방치하다. 내버려두다.’이지만, 뜻으로는 ‘들어주다.’입니다. 듣다보면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듣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1) 이 말씀은,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메시아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이며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생명과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2) 예수님 말씀의 ‘문’이라는 말에서 ‘좁은 문’이 연상됩니다.(마태 7,13-14)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더라도 그 길과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길과 문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길과 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잘 식별해야 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더라도 사람들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구원의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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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영혼의 안테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지만 이 마저도 자신의 깨달음은 아니었으니 그분을 진실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그분의 말씀을 들은 바리사이들은 “무슨 뜻인지 깨닫지”못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분의 말씀의 뜻을 묻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성령은 하느님의 깊은 것을 깨닫게 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성령만이 인간을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성령으로 변화된 이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임에도 아직 따지려드는 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였습니다.
으뜸인 수제자를 무시하는 행위로 여기지 않고 교회의 반석으로써의 위상이 깍이는 불쾌함을 표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그분의 특별한 은총에 대한 우월감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 결과라 믿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이해한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분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 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끝내 변화시키실 그 사람을 결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선물을” 주실 하느님의 성령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은 우리의 행함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걱정과 염려 우리의 근심과 고통 우리의 오해와 비판과 무관심을 능가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의 무엇보다 훨씬 소중한 진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무엇 때문에 오시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깨닫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그분의 주파수에 정확히 맞춘 영혼의 안테나로 수신됩니다. 고장 난 안테나는 그분의 뜻을 왜곡시키고 엉뚱한 주파수에 맞춰진 안테나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분의 뜻을 수신하기 위해서 영혼의 안테나를 늘 점검해야 할 까닭입니다. 진실로 그분의 뜻을 수신한 이는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작업은 내가 변화되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수신된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맡겨드리는 우리 모두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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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동원 베드로 신부님]
내가 살던 신학교의 창밖에는 집채만한 큰 단풍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시험을 준비하느라 밖에 자연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아침, 커튼을 제치는 순간 단풍나무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장관을 보게 되었습니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닫혔던 문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 들어가는 듯한 체험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문은 막혀 있던 곳에서 탁 트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을 체험하게 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목자이며, 또한 드나드는 문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문은 열리고 닫히면서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를 연결시켜 주고, 사람들을 서로 만나서 친교를 나누게 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눈을 열어줍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의 문을 열어 세상과 하늘나라를 연결시켜 주시고 사람들이 드나들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드나들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심각한 문제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에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거부하고 단죄하면서 폐쇄적인 태도로 공허하고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문이 열릴 때에 그 마음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내롭게 사랑으로 그를 지탱해 주며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때 풀밭에 이르는 문을 찾고 좋은 풀을 배불리 먹도록 도와주십니다. 무엇인가 막히고 닫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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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요한 복음은 목축업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친근한 ‘목자’와 ‘양 떼’라는 표현을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과 착한 목자에게 속한 적이 없어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목자에게 속한 양 떼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가 인도해 주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아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양 떼도 있고, 양 떼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훔치고 죽이려는 이들도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에 공감하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이단시하며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아가던 군중과 유다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위선자이자 거짓 예언자로 몰던 자들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이는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을 만나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음식을 먹었다며 논쟁에 휘말렸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다 민족에 국한된 율법 전통에 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의 거룩함과 선함, 아름다움을 깨달은 모든 이에게 열린 것임을 환시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말씀처럼, 자기 편견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성령 세례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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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들려주신 다음에,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여기에서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또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밝혀줍니다. 바로 당신이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예수님이라는 ‘문’은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러니, 예수님이라는 이 '문'은 ‘들어가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과 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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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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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입니다.”(10,9.7)
저는 성당 門하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L.A. 주교좌 성당의 문입니다. 성당의 한쪽은 대도시의 복잡한 도심이, 다른 한쪽은 도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옆에 주교좌 성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짧은 순간에 방문자는 침묵의 무게로 압도당합니다. 단지 문 하나로 외부와 차단된 그 공간 안에 꽉 찬 거룩함의 침묵과 고요는, 길게 숨을 쉬지 못하고 잘게 숨을 나눠 쉴 만큼, 엄숙하면서도 짙은 평화가 평온으로 인해 눈물을 쏟을 정도입니다. 단지 문 하나 밀치고 들어왔을 뿐인데, 대도시의 복잡함에서 갑자기 사막과 같은 고요와 침묵이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방문한 여행객이나 기도하러 온 영혼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어머니의 가슴처럼 꼭 품어 안아 주는 느낌이 듭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고 갈망하던 영혼의 쉼터이며 안식처처럼 느꼈기에 L.A를 방문할 때마다 저는 주교좌 대성당을 찾아가곤 합니다.
오래전 상영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보면 ‘스카이 캐슬’로 들어가는 입·출구 대문이 화면에 자주 나옵니다. 위압감을 주는 크고 높은 대문은 이곳에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쉽게 느끼게 해줍니다. 안과 밖의 세상을 구분 짓는 도구는 단지 대문 하나이지만, 이렇게 큰 대문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그리고 높은 대문은 그 신분이 얼마나 높은가를 상징하는 장치로 다가오더군요. 참 불편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나는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입니다.”(10,9.7) 하고 자신의 ‘에고 에이미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문의 기능은 안팎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통로입니다. 보통으로 대문의 한 면은 밖으로, 다른 한 면은 안으로 나 있는 것처럼, 주님의 문의 한 면은 땅 위에 있는 인간을 향해 있고, 다른 한 면은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의 문은 땅과 하늘, 육과 영, 어둠과 빛, 불안전과 안전, 죽음과 생명을 구분 지으며 동시에 밖에서 안으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양들의 문이신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양들의 문이신 주님을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생명의 양식)을 찾아 얻을 것이다.”(10,9) 하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마르6,34) 같고, “길 잃은 양”(루15,4)과 같은 이들을 찾아와 푸르고 싱싱한 초지가 조성된 생명의 목장으로 이끌어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더)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것”(10,10)입니다.
주님은 양인 저희가 들어가는 문이며,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안전하고 마음대로 생명의 양식인 풀을 먹을 수 있기에 생명을 생명으로 풍요롭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목장으로 초대이며 기쁜 소식입니까? 누가 있어 우리를 이토록 잊지 않고 찾아오시고, 돌보아 주시며 이끌어 주시는 목자가 또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뿐입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고 때론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시기에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 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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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본당에서 사목 위원으로 봉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아주 열정적이라서 신부님과 함께 즐겁게 사목한다는 것입니다. 전의 신부님 때보다 일이 많이 늘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너무 즉흥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럽게 전례가 바뀌거나 일정이 변경되어 혼란스럽다고 하십니다. “이 점만 아니라면….”이라는 말씀에 뜨끔했습니다. 그 본당신부님 모습이 제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신자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생각을 뒤로 미루면 괜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로 행동했습니다. 문제는 이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 박자 늦추는 삶이 필요함을 그리고 이 역시 또 다른 배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좋은 의도로 곤란한 상황에서 힘들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겸손은 기다림이 아닐까요? 나서서 행동하면 물론 빠른 일 처리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이에 따라 힘들고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떠올려야 했습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모습이 예수님의 주특기였음을 묵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기다려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예수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의 주님임을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문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옮길까요? 문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래야 양들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양들에게 이 문은 구원의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주님이 계시기에 길을 잃었다가도 얼른 그 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 들어올 때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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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넘치게 하려고 왔다>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매달리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감실 앞으로 가서 쉴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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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요한 10,1-10 (목자의 비유, 나는 착한 목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요한 10,2)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해맑은 웃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정겨운 목소리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따사로운 눈길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오롯한 믿음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새하얀 희망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당신 곁을
당신 없는 듯
스쳐가지 않고
뜨거운 사랑으로
당신에게 스미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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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문(門)이다>
-문을 드나듬의 축복(祝福)-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시편 43,3ㄱ)
어제 4.21일 성소주일, 아침부터의 각별했던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요즘 신록의 아름다움이 절정입니다.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나 믿음의 색깔이 있다하면 아마 이런 신록의 새깔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파스카 축제시기, 파스카의 기쁨은 신록의 기쁨입니다.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늘 주일 아침마다 부르는 찬미시편 노래이지만 1시간 찬미로 주일 하루를 여니 참 행복하고 기쁜 아침이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요즘입니다. 아침 정갈하면서도 아름답고 풍부한 식사에 식사후 주방장 형제에게 감사의 덕담 인사를 드렸습니다.
“천국에서의 아침식사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천국의 주방장같습니다.”
참 하느님 섭리의 신비가 오묘합니다. 20대시절 10여년간 왜관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분인데 사정상 퇴회하여 세속에서 결혼후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다가 약40년후 은퇴하여 나이 70을 넘어 수도원에서 주방봉사를 하며 수도원에 머물게 됐으니 오랜후에 고향집에 돌아온 듯 기쁘게 지내는 분입니다. 결혼생활과 수도생활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각별한 축복입니다.
또 하나 나눔의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영산홍꽃이 한창입니다. 정말 진분홍색깔의 그 강렬함은 장관입니다. 꽃말을 살펴보니 첫사랑이었습니다. 하여 24년전 옛 자작시 “성 요셉”에 이 첫사랑 말마디를 넣은 것을 시적 감성이 풍부한 도반이 참 멋진 시화를 만들어 전해줬고, 고단한 “광야여정”중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의 오아시스”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요즘 들어 참 많은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활짝 핀 진분홍색 영산홍꽃을 배경한 성 요셉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성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영산홍꽃!
꽃말은
첫 사랑이라네”-2004.4
지금은 나이 60 환갑을 바라보는,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옛 제자와, 조카가 보낸 답글도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선생님과 신부님 두 명칭답게 살아야 함을 다시 배웁니다.
“선생님, 시가 너무 아름다워요, 요셉 성인의 사랑을 말하는 듯합니다!! 첫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을 품고 있네요. 항상 선생님의 시는 편암함을 줍니다. 감사드려요. 선생님!!! 건강하시구요. 편안한 밤 되세요.”
“삼촌 신부님 시는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아, 이 모든 은총으로 빛나는 깨달음과 풍부한 나눔, 순전히 파스카 예수님의 은총임을 깨닫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깨달음의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도 또 얻어 넘치는 것이다.”(요한 10,9-10)
“나는 문이다!” 예수님의 선언은 얼마나 은혜로운 구원의 복음인지요! 예수님은 벽이 없는 사면팔방 활짝 열린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하늘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 문을 드나들면서 날마다 강론을 길어 올립니다. “문이냐 벽이냐?”,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한 때 열광했던 말마디들입니다.
제대로 성장중인 영적 사람들이라면 벽은 날로 넓은 문으로 바뀌겠지만 많은 경우는 점차 방어의 벽은 커지고 문은 날로 작아질 것입니다. 과연 나는 문입니까? 벽입니까? 벽은 점차 커지고 문은 점점 작아지지는 않습니까? 이웃이 답답해하면 벽이고 편안해 하면 문일 것입니다. 문이라하여 다 좋은 문이 아니라, 멸망이나 죽음에 이르는 지옥문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이듯 문도 선택입니다.
“나는 문이다!”, 바로 하느님께 이르는 주님의 문을, 하늘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 지혜의 문, 생명의 문, 자유의 문, 평화의 문, 믿음의 문, 희망의 문, 평화의 문, 기쁨의 문, 행복의 문, 구원의 문, 무수한 명칭을 지니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바로 주님의 문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 무수한 교회의 성인들은 이 주님의 문을 발견하고 수없이 드나들며 끊임없이 축복을 받은 분들이며 지금도 무수한 신자들이 이 주님의 문을 드나들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감격을 노래한 행복기도란 제 자작 기도문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 시 또한 주님의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을 드나들며 깨달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멋진 지혜로운 깨달음도 바로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지혜의 문을 드나들며 얻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오늘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의 보고에서 잘 들어납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번도 제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주님 지혜의 문을 드나들면서 이런 놀라운 은총의 체험과 깨달음이 참으로 베드로를 활짝 열린 자유인, 지혜의 문이 되게 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놀라운 분별력의 지혜도 주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얻은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제 매일 강론 역시 이에 해당됩니다. 마지막 베드로의 겸손한 발언이 지혜의 절정이요 결정타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통쾌한 완벽한 승리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베드로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승복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제 벽이 문이된 예루살렘의 보수파 신자들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11,18)
이제 다른 민족들도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구원 문을 드나들며 축복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바로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 문으로 들어와 주님의 정화와 성화은총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시편 43,4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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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름을 불러>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한 장 전체가 한 주제를 다루곤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6장에서는 빵을 주제로 생명의 빵이 주제였고, 이번 주는 10장으로서 목자와 양들의 관계가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 얘기합니다. 목자는 한편으로는 양들을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 불러내어 풀을 뜯어 먹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목자가 있는 한 양들은 안전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존재입니다.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목자는 양들이 다른 이의 양이 아닌 자기 양이 되게 하고,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목자는 양을 떼로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 소중히 대합니다.
다들 나가 알아서 풀을 뜯어 먹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데리고 나가서 풀을 잘 뜯어 먹는지 살피며 먹게 하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인격과 고유성을 존중하며 소중히 대하는 겁니다.
이런 목자의 사랑을 받는 양들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목자의 그 양이라면 자기 목자를 몰라보고 다른 목자를 따르지 않고,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고서 자기 목자를 따라갈 것입니다.
목자의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낯선 목소리와 분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 불감증의 양일 것입니다.
목자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데 양은 목자가 자기를 부르는지 모르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목자의 사랑은 망실되는 겁니다.
여기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나 이 시를 소개하며 끝을 맺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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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10,7)
<영적인 문(門)!>
오늘 복음(요한10,1-10)은 '목자의 비유'입니다. 성소 주일이었던 어제 복음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드나드는 문(門)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7.9)
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모두 도둑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
양 우리로 들어가는 방법은 둘입니다. 하나는 정문을 이용하고, 다른 하나는 개구멍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와 양들을 보살피고, 도둑이나 강도는 개구멍으로 들어와 양들을 훔칩니다.
'영적인 문!'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문은 '영적인 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는 '회개의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의 문'이시고, '사랑의 문'이십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문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고, 특히 이방인들에게까지 열려져 있는 문입니다. 오늘 독서(사도11,1-18)가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11,18)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러한 영적인 문을 자주 이용하고, 이 문을 자주 드나들도록 합시다! 그래서 날마다 다시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복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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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Dt92yAtw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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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우리는
외부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양들을 살리는
문이 있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문도 없고
우리도 없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양들의 문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문이 있듯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이 계십니다.
문(門)은
도움이며
문은
은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생명의 문을
필요로 합니다.
생명으로 가는
생명의 문이
있습니다.
생명의 문은
우리를 기르며
우리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서로의
말을 듣고
서로의 마음을
만나는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문이십니다.
도둑이며
강도는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옵니다.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도둑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생명의 문과 함께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생명은
생명의 문과
언제나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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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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