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라! 봄바람/장미숙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솔잎처럼 비쩍 마른 햇살이 비실대며 논두렁에 엎드려 있었는데요. 3월이 되자 제법 살이 오른 햇빛이 밭두렁을 어슬렁거리네요. 빗장 단단히 걸어 잠근 흙의 문지방을 기웃거리는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풋풋하면서도 쌉쌀한 냄새가 들판에 흐르고 있어요. 햇빛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더니 흙과 마음이 통했나 봐요. 너울가지 좋은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이 보이네요. 반가움에 달려가자 살짝 윙크를 보내는데요. 자신의 기운을 멀리 퍼뜨려달라는 표시겠죠.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대지의 꿈틀거림에 나무들도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나무가 얼마나 현명한지는 핵인 겨울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매서운 겨울바람을 대비해 늦봄부터 겨울눈을 만드니까요. 인아(鱗芽), 나아(裸芽), 은아(隱芽), 엽병내아(葉柄內芽) 등 종류도 다양하죠. 동그란 꽃눈과 길쭉한 잎눈을 간직한 나무는 봄의 전령들을 몹시도 기다렸을 겁니다. 겨울눈 속에는 무더기무더기 피어날 꽃숭어리와 세상의 색을 평정할 초록 이파리들이 담뿍 들어있으니까요.
그것들이 얼굴을 내밀려면 제 역할이 필요해요.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봄이 왔음을 알려야 하니까요. 제가 이렇게 수선을 떠는 이유예요. 빠르기로는 저를 따를 자가 없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신(神), 헤르메스라도 쫓아오지 못할걸요. 제가 바삐 움직이는 건 생명을 위한 일이니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도 기뻐하겠죠.
이쯤에서 친구들을 불러야겠어요. 개성은 다르지만 각기 저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존재들이에요. 아, 우리의 태생에 대해 말해야겠군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태어난 곳을 몰라요. 어느 날 보니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겠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가 겨울의 등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혹은 창창한 댓잎 사이에서 솟았다고도 해요. 또 다른 이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팡, 터졌다고도 하고 농부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어요. 아무려면 어때요. 본래 생이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단지 시간만이 흐르면서 모든 걸 바꿔놓죠. 그래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티탄 왕이었던 크로노스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식들을 잡아먹은 건 시간에 대한 상징 같은 것이죠. 물리적 시간은 반드시 과거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원칙 말이에요. 크로노스의 시간에 치우치다 보면 많은 걸 잃어버리니 방심할 수 없어요. 기회와 행운의 신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붙잡아야 하거든요. 머뭇거릴 새 없이 새로운 계절의 문을 열어야 해요. 제 때에 할 일을 마쳐야 세상이 아름답거나 혹은 따뜻하거나 순조롭게 유지되거든요.
자 그럼, 일을 시작해볼까요. 먼저 널따란 흰그루부터 살펴야겠어요. 농부들 얼굴에 피는 미소야말로 한해의 풍요로움을 책임질 소중한 증표니까요. 아직은 칙칙한 풍경이 온 대지에 드리워져 있네요. 저 우중충한 빛을 몰아내려면 바삐 움직여야겠는걸요. 겨울의 발자국마다 햇살 한 보따리와 산뜻한 기운을 뿌려야겠어요. 꿈틀거리는 생명에 훈기를 심어주는 건 우리가 지닌 덕이고 의무이죠.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머잖아 나무도 잎을 뾰족 내밀고 호수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나겠죠.
그나마 탁 트인 시골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만 도시는 아니에요. 빌딩 숲은 미로 같아서 재바른 저도 헤맬 때가 많거든요. 똑같아 보이는 건물들이 허공의 허리를 잘라 먹고 하늘의 발치까지 다가가 있으니 뛰어넘기도 벅찹니다. 가끔 견고한 벽에 부딪혀서 나동그라지기도 해요.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 마천루를 피해 낮은 세상으로 가려면 건물과 숨바꼭질도 해야 해요. 벽을 뚫을 순 없으니 창틈으로 살짝 들어갈 때도 있죠. 탁한 공간에서 머리를 쥐어짜는 사람들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면 숨어 있던 봄이 생그레 피어나요. 병원에서 햇살을 고대하는 환자들의 이마를 쓸어줄 때도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온기를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3월을 소생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저는 화합의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꽃이 피고 촉촉한 비가 내리고 초록 잎이 톡톡 터지는 건 혼자 할 수 없잖아요. 만물의 움직임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조화를 만들어가죠. 겨울의 단절이 깨지고 한바탕 세상이 어우러지는 화합의 길에 우리가 존재해요. 포근한 바람이 불면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자연과 교감하는 걸 봐도 알 수 있어요.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생동하는 봄은 사람들의 가슴에 삶의 의지를 심어주지요.
개울물이 재잘재잘 음을 맞추고 새들의 날갯짓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 때면 꽃은 이미 마음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해요. 육체와 마음이, 하늘과 땅이, 바다와 산이, 낮과 밤이 손을 맞잡아야 할 순간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요. 얼었던 땅이 몸을 풀고 생명의 씨앗들과 화합할 때면 이미 세상은 흐름으로 이어져 한 계절을 반듯하게 완성하지요.
지금 당신의 등에 찬 기운이 남아있다면 ‘불어라! 봄바람!’ 이렇게 외쳐보세요. 그러면 저는 당신을 향해 꽃향기를 몰고 달려갈게요.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곳에 있거든요. 작지만 부드러움을 간직한 저는 봄바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