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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 이덕대
기억의 저편에서 아슴아슴한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주 하찮고 수수한 것들이다. 자고 일어나면 만났던 것들,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것들이 오늘 소환된다.
어린 시절 먹고 입고 움직이게 했던 것들의 기억은 처연하나 때로는 아름답다. 기억은 단순히 박제된 과거의 정지 화면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오늘의 삶이다. 가난했던 먹거리, 차가운 메밀묵을 추억한다.
안채 뒤란을 돌아들면 언제나 바람이 웅얼거렸다. 봄바람은 생강나무나 국수나무의 나른한 향기를 묻혀왔고 가을바람은 수수한 도토리 냄새나 다복솔 아래 핀 싸리버섯 향과 함께 왔다.
산 아래로 돌아드는 좁은 골목길 돌담에는 바람과 함께 길 잃은 새끼 족제비가 무시로 오갔다. 비온 뒷날이면 신작로 이슬받이에는 꺼병이 숨어 할딱거렸다.
여름내 자주색 방울꽃을 달고 있던 늙은 더덕 덩굴은 무서리 내린 가을이 되자 두텁게 마른 열매를 매달고 힘겹게 돌담을 붙잡았다. 감나무 밭 사위질빵 넌출은 말라 끊어져 더넘바람에도 달랑거렸다.
계절의 변화는 무상하고 적막함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내일의 삶을 준비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말잠자리 파닥이던 왕거미 집은 바람에 쓸린 누런 댓잎 하나가 매달려 흔들린다.
밤이 되면 작은 하늘에도 은하수가 쏟아져 내렸다. 무성한 감나무 잎이 덮여 사라졌던 하늘은 작은 대소쿠리 크기로 나타났다가 가을바람에 잎이 지자 둥근달이 가득 차고도 몇 아름이 더 되었다.
달빛이 구름 속으로 숨으면 민둥산 꼭대기에 서있는 작은 소나무들은 등 굽은 할머니가 되어 기다란 막대기를 짚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불면 별들은 깜박깜박 물을 머금었고 훤히 떠오른 달은 일없이 서있는 감나무 마른 가지를 휘기도 하고 꺾기도 하면서 하얀 창호지 바른 안방 문에 그림자를 뿌렸다.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대밭을 찾은 뒷산 부엉이 울고 작은방 솥에서 끓고 있는 메밀묵은 북덕북덕 처량한 장단을 맞추었다.
젓기를 반복하던 누나는 쑤고 있는 묵이 된지 묽은지 나무주걱에 흘려보다가 박 바가지에 퍼담아 방으로 들어왔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무서운지 부르르 어깨를 떨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찬바람 불어 묵 쑤는 밤은 그렇게 무섭고도 적막하게 흘렀다.
어스름 저녁,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며 부뚜막 위에서 차갑게 식은 메밀묵을 먹었다. 윗부분은 딱지가 앉아 단단했고 껍질을 벗기듯 숟가락을 깊이 넣으면 속은 뚝뚝 끊어지면서도 적당히 말랑거렸다.
메밀묵을 끓인 후 솥 바닥에 눌어붙은 메밀묵 누룽지를 메밀 당숙이라 했다. 사촌이 가장 먼 친척이었던 집 형들은 메밀 당숙도 당숙이라며 웃었다. 번성한 가문이 부러웠다. 아버지 세상 일찍 떠나시자 집안 울타리가 무너졌다.
요즘 메밀은 건강한 식재료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그 시절 메밀묵은 정을 나누는 음식이었다. 동네잔치가 있을 때 대표 음식이기도 했지만 환갑이나 결혼식 품앗이 노릇도 했다.
메밀묵 한 판을 주고받으며 이웃 간 구순한 정을 쌓았다. 목판에 담겨서 돌담을 넘어오는 묵 상자를 눈웃음으로 받으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이야기했다.
쌀이나 보리가 떨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잘 말려 고방 구석에 비축해두었던 메밀을 디딜방아에 찧어 묵을 쑤었다. 먼저 받아먹은 집은 갚기 위해 묵을 만들었고 묵을 끼니 삼던 집에서는 가난이 서러워 정으로 건넸다.
메밀은 인고의 작물이다. 비를 기다리다 끝내 모를 심지 못하면 하늘을 원망하듯 풀풀 흙먼지가 날리는 논에 메밀 씨를 뿌렸다.
시기를 놓친 메밀을 심을 때는 언제나 기대 반 눈물 반이었다. 곧 서리가 내릴 만큼 가을이 다가왔을 때 마지막으로 심는 것이 메밀이었다.
미처 열매를 얻지 못하겠다 싶으면 어린 싹을 잘라 나물로 먹었다. 어른들은 이런 메밀나물을 아린 맛이 난다고 했다.
나물이 상위에 오르면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고 어른들은 젓가락을 놓았다. 아이들은 허기가 사라져 먹지 않았고 어른들은 한숨이 나와 먹지 못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차가운 달빛에 메마른 댓잎이 어석거리며 골목길을 쓸고 다니면 메밀묵을 해먹는 시절이다. 디딜방아가 없는 집에서는 통 메밀을 맷돌에 갈고 껍질을 분리하여 거뭇거뭇한 가루를 물에 개어 끓인 후 묵을 만들었다.
손이 많이 가는 과정에 비해 싱겁고도 구수하며 소박한 음식이다. 뜨겁게 끓인 음식이지만 차갑게 식어야 맛이 느껴지는 음식이기도 하다.
메밀묵은 쓸쓸하고 적막한 밤에 어울린다. 참기름 몇 방울과 김장김치를 쫑쫑 썰어 섞어 먹는 겨울밤의 묵은 수수한 만큼 담백하다. 이웃을 불러 함께 먹어도 좋고 허전한 마음으로 혼자 먹어도 목이 메지 않는다.
추적추적 비 흩뿌리는 아침, 잔칫집에 가면 가장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던 묵을 떠올린다. 세상에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힘들 때 위로가 되는 탓이다.
어머니와 누나가 메밀묵 한 모를 들고 꿈결에 오셨다. 이제 세상에 밀려난 가난한 삶을 어기차게 살아낼 용기가 필요하다. 차가운 메밀묵을 따뜻하게 먹을 시간이다.
한국수필 2024년 7월호 <사색의 뜰> 부분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