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리쑥국 외 2편
김보일
도다리쑥국
이 뽀얗고 간간한 것은
남쪽 어떤 아름다운 동네의 이름이고
쑥국새 우는 시절에 온다던
어질고 넉넉한 사내를 생각하는
귓불이 고운 한 여자가 마시는
낮술의 이름이다
사람이 사람을 기다려 도다리가 되고
쑥국이 되고 낮술이 되는 동네
도다리쑥국에 봄이 오면
밤중에 등불은 이르게 꺼지고
홍매화가 창마다 낯을 붉힌다
곡우 무렵
병을 걱정해주면서도
벗은 자꾸 잔을 채워준다
봄비도 낙화를 걱정해주면서
종일 꽃나무를 적시는지
벗의 마음을 봄비라고 읽으니
목젖에 걸리는 등불 하나
벗이 걸어준 등불로 길을 밝히며
비와 함께 나는 내 집 문 앞에 이르렀다
구름주유소
해거름 여우재 넘어가는 길에 기름이 엥꼬가 되어 죽을똥살똥으로 차를 밀고 가다보니 떡하니 푯말 하나가 나타나더라고. 구름주유소? 기름주유소를 잘못 읽은 것이겠지 했더니 눈을 씻고 봐도 구름 주유소라. 누구 없소 불렀더니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만 연해 들리더라고. 셀프주유소라 가격도 헐하니 우선 넣고 보자 싶어 주유구에 노즐을 집어넣고 기름을 넣는데 차가 으스스 몸서리를 되우 치는 거라. 요상하다 싶었지만 만땅으로 주유하고 엑셀을 밟았더니 차가 공중으로 붕붕 뜨는 거라. 이놈의 차가 실성을 했나, 백여시에 홀렸나, 못 먹을 걸 먹었나 싶어 어리벙벙해져 창밖을 보니, 어라 이것 봐라, 빨강차, 노랑차, 파랑차, 온갖 색색을 뒤집어 쓴 차들이 번호판도 없이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거라. 마침 서있는 차가 있어, 여기가 어디냐고 운전사에게 물으니 당신 주위를 잘 둘러보라는데, 왼통 시커먼 먼지구름 속인 게야. 이쪽저쪽을 살피다 백밀러를 들여다보니 얼레, 거울 속 계곡에 내가 새우처럼 구부러져 차갑게 식어 있더라고. 구름주유소라 씌어있을 때 애시당초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거기가 유턴이 불가하다는 불귀의 허공이었던 게야. 후진기어도 먹지 않으니 어디 한갓진 데 주차해놓고 두 발 가지런히 뻗고 깜박깜박 밀린 잠이나 잘 수밖에. 꿈 없는 잠이나 주무실밖에.
병이 나를 만든다
현실과 꿈 사이에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게 하는 ‘방화벽’이 있다. 생각해보시라. 꿈속에서 불이 나서 위급함을 느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해서 현실에서도 건물에서 뛰어내린다면 비극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그렇지만 꿈과 현실은 무쪽 가르듯 선명하게 두 쪽으로 나뉘지 않는다.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같을 때가 허다하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나의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가위에 잘 눌렸고 꿈에서 깰 시각에는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를 거닐었다. 이른바 몽유병, 구슬치기를 하다가 잠이 들면 구슬치기를 하는 꿈을 꾸었고, 그림을 그리다 잠이 들면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현실과 꿈 사이를 가로지르는 벽에는 개구멍 같은 것이 있어 현실은 꿈으로 자주 흘러들어왔다. 별똥별을 본 날에는 별똥별 꿈을 꾸기도 했다. 꿈은 현실의 연장이었다.
2년 전 자다가 뭔가를 걷어찼는데 다리 위로 무거운 책들이 실제로 쏟아졌다. 꿈속의 발길질이 현실에서도 재연된 것이다. 무엇이 이상했다. 왜 나의 꿈은 현실로 흘러나가는가, 왜 나의 현실은 꿈으로 흘러들어오는가. 인지과학에 의하면 분명히 현실과 꿈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했는데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의아했다. 나는 자다가 말고 야시한 시각에 아픈 다리를 감싸 쥐고 구글에 여섯 글자를 입력했다. “수면 중 발길질” 수많은 기사들이 떴다. 그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은 수면 중 발길질이 운동능력이 퇴화되는 질병 ‘파킨슨 병’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와도 관련이 된다는 것이었다. 뇌신경의 이상에서 오는 질병이었다.
한 후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 꿈에 난초가 피었는데 깨어나 보니 난초가 피어있더라고.” 나는 그 후배에게서 나를 보았다. 그는 꿈을 소재로 꿈 연작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지금 중증의 뇌종양을 앓고 있다. 금년 초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나의 병은 태아 때부터 진행되는 병이라 했다. 생각해보니 꿈을 빼놓고 나와 나의 시의 정체성을 말할 수는 없다. 꿈은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십대부터 꿈을 분석해보기 위해 인지과학과 심리학을 읽었던 것이 과학책을 쓰게 했고, 총천연색 꿈을 그려보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보기 위해 시를 쓰기도 했으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꿈이다. 꿈 이야기를 하자 하면 한이 없을 정도다. 꿈은 현실에서의 부정직함을 꼬집기도 하고, 현실에서 못 이룬 욕망을 채워주기도 하고, 과잉의 욕망을 반성하게도 했다. 초현실주의 회화에나 나올 법한 기괴한 이미지로 범벅된 악몽도 있었지만 까만 줄무늬 고래를 타고 바다를 달리기도 했고, 수은방울을 타고 하늘을 날기도 했다.
시는 일종의 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이 시 속으로 흘러들어가지만 그것은 반드시 왜곡되고 굴절된다. 그 굴절의 각도가 욕망의 각도다. 꿈과 시를 잘 들여다보면 나의 욕망이 어떻게 굴절되어 있는지가 잘 보인다.
병을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병은 나를 만들고 나의 그림을 만들고 나의 책을 만들고 나의 시를 만들었다. 새삼스레 병을 두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