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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째 날, 태국의 벌판과 강기슭
낯선 이국땅에서 꿀잠을 자는 게 어려웠는지, 새벽에 눈이 떠지고 귀가 열렸다.
옆방에서 물소리가 나고 텔레비전 소리도 들렸다. 아내도 부스스 눈을 떴다,
씻고 아침 먹을 준비나 하자고 했다.
뒷문을 여니 바람이 믈고 들어오는데 방안 공기보다 더웠지만 풀 냄새와 어울려 코끝이 맑아졌다.
태국이란 나라가 전자담배 반입까지 금지하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권련을 피워야 해서 뒷 베란다로 나가 안락의자에 길게 누웠다.
옆방 친구는 이른 새벽부터 카메라를 들고 열대 꽃을 찍고 있었다.
아내가 칠순 기념으로 사주었다고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니 웃으며 지켜보았다.
잠시 뒤 친구 내외와 같이 호텔식당으로 갔다. 각 코너 별 담당직원들이 미소로 맞아주었다.
한 차례 메뉴를 살핀 다음 쌀죽부터 챙기고 바나나 잎에 싸서 구운 찰밥과 햄과 소시지를 자리로 가져왔다. 친구는 채소 중심, 아내들은 샐러드와 시리얼을 챙겨왔다. 각자가 자기 요량으로 배를 채우면 될 터인데 아내들은 남편을 위한답시고 이것저것 가져와서 권했다.
갓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일행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맛있는 것 몇 가지를 소개한 뒤에 호텔 내의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실외 수영장과 숲 사이사이에 설치한 벤치에 앉아 오늘 일정을 궁금해 했다.
어젯밤에 다른 부부들이 사진도 찍었다길래 하는 수 없이 아내와 몇 장 찍었다.
흔줄에 들어서서 태국을 한번 다녀온 적이 있었던 아내였지만 남편과의 여행이니 감흥도 달라서인지 바짝 다가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아내가 눈을 감는 일은 없겠다 싶어서 한껏 다정한 양 포즈를 취했다.
9시가 되어 산악 코끼리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부부 당 한 마리의 코끼리를 타고 정해진 코스를 따라 가는데, 바로 앞에서 코끼리가 거대한 배설물을 쏟아내는데 주변이 온통 배설물 천지였다.
조련사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코끼리의 수명이 80년이라는데, 평생 세 사람 이상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배우고 따르기 때문인데 주인이 바뀌면 조련사도 따라 간다고 했다.
태국에서는 3 종류의 동물학교가 있는데, 코끼리 학교, 원숭이 학교, 닭 학교가 있단다.
코끼리는 여기서처럼 트래킹 전용이거나 운반용으로 쓰기 위해서이고, 원숭이는 야자수에 올라가 야자를 따기 위함이며 닭은 싸움용으로 쓰기 위해서란다.
코끼리 조련사들은 촬영서비스를 해 준다고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수십 장을 찍어주었다.
가이드가 미리 알려준 대로 2달러 씩 봉사료를 건넸다. 우리 돈 2천원도 받는다는데, 순간적으로 이게 더 싸게 먹힌다 싶기도 했다. 조련사들끼리는 웃고 대화를 하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들과는 눈이 마주쳐도 웃질 않으니 참 건조한 트레킹이다 싶었다.
강으로 가서 뗏목 배를 탔다. 대나무를 엮어 바닥을 깐 거룻배였고, 사공은 모두 서른 안팎의 여성들이었다. 일행은 두 척의 배에 나눠 탔고, 모터를 단 보트가 앞에서 끌고 상류로 올라갔다. 강폭은 50m쯤 되고 물살은 거셌다. 언덕에 높다란 사원이 세워져 있고, 스리랑카식 부처가 우뚝했다. 노 젓는 여성에게 사탕 몇 알을 건넸더니 고맙다면서 ‘베이비’에게 주겠다고 손짓을 해서 일행이 너도 나도 사탕을 더 건넸다.
어디쯤에 이르렀는지, 보트가 돌아갔고, 물결 따라 뗏목 배는 노를 이용해 방향을 잡으며 출발 장소로 돌아왔다. 봉사료로 가족 당 1천 원 씩 주었다. 코끼리 조련사들과는 달리 고맙다고 합장해주었다. 여성들이어서 그랬을까? 어쨌든지 주고 받는 관계가 조금은 인간적이라 생각되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죽음의 계곡으로 갔다.
2차 대전 당시에 연합군 포로를 수용한 곳인데,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이 협궤 기찻길을 만들고자 절벽을 깎은 곳이다. 절벽 아래는 콰이강이 거세게 흐른다. 포로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군수품은 일본군이 독차지했으므로 전쟁포로들은 굶주여야 했고, 각종 열대성질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하여 힘든 노동에 동원되었으니 강물에 빠진 포로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을까. 그 전쟁포로들 중에 영국군 공병장교가 일본에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포로 처우개선을 요구했고, 콰이강에 목조 다리를 놓게 되었는데 이게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당시에 일본군 포로수용소장과 영국군 장교가 전후에 다시 만나 사로 용서하고 화해했단다. 그 때 영국군 장교가 한 말이 “용서는 하지만 상처는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고 했단다. 언제나 어디서나 잘못은 저질러지고, 아무리 진정한 사죄라고 해도 아픈 기억은 절대 지워지질 않는다는 걸 일본이 알기는 할까. 강제징용 둘러싼 한일갈등은 아직 이어지고 있으니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정과 망치로만 뚫었다는 철길 옆에는 제법 커다란 법당이 있고, 역시 스리랑카식 부처를 모시고 있었다. 현지인 여성 몇이 참배를 하는데 우리와는 달리 다리를 옆으로 나란히 두고 합장을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한 마을에 들렀는데, 주위가 온통 돼지감자 밭이었다.
볶음밥과 빵을 중심으로 제공되었고, 채소와 과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한참 뒤에 70년대 우리나라 완행열차 같은 기차가 도착했다. 창문이 모두 유리창은 없이 뻥 뚫려 있었다. 여러 국적의 관광객들로 기차는 붐볐다. 역에 멈출 때마다 승객들이 타고 내렸다.
우리들은 콰이강의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목제가 아니라, 철제로 바뀌었지만, 모양은 당시와 똑같이 유지시켰다고 한다. 다리 가운데 몇 곳에 대피시설도 두었는데 기차가 다니지 않을 때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니 전통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제스 전쟁 박물관으로 갔다. 태국의 역사 속에서 치렀던 수많은 전쟁 기념물을 전시한 곳이라는데, 사원과 비슷하고 왕실이나 유명한 전쟁영웅들의 유품들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철창 사이로 밀어 넣은 것인지 지폐와 동전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수북하였다. 어느 나라든지 역사는 기념할 장소에 보존되어야 하고, 후세 사람들이 기억하게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태국에는 3대 불가사의가 있단다.
태풍이 없고, 지진이 없으며, 빗물을 받아두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태풍은 발생하여 올라보다가 베트남이 다 막아주고, 화산 판이 없어서 지진도 거의 일어나질 않으며, 석화수가 흐르는 강물은 음용하기 어려워 집집마다 커다란 항아리에 빗물을 받아서 마셨는데 우기가 끝나도 썩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강물은 깨끗하다고 말 하지만 흙탕물처럼 탁하다. 세탁과 목욕에 사용된다고 하는데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콰이강 다리 아래 뷔페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네 가지 요리로 즐기는데, 애주가인 일행들이 사탕수수를 발효시켰다는 아주 독한 술을 시켰다. 고량주나 안동소주 같은 독한 향이 없어서 마실만 했다. 물고기 먹이를 받아 강물에 뿌려주니 떼거리로 모여들었다. 후식으로 몽키 바나나를 직접 나무에서 따 먹으라는 게 신기했다.
배를 두드리며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정리하였다, 오늘밤만 자고 나면 담넉 수상시장을 둘러 본 뒤에 먼 방콕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내외는 캐리어 하나에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모두 담아 왔기에 정리하기도 쉬웠다. 하룻밤을 묵은 덕분인지, 낮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라 피곤했던지 금세 잠에 빠졌다. 이튿날, 역시 6시에 눈이 떠졌다. 친구 내외와 호텔식당으로 가서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아침 메뉴로 허기를 채우는데 다른 내외들이 속속 모였다. 어제 보다 30분이 앞당겨졌다.
3. 셋째 날 수상시장과 안마 체험
담넉 수상시장은 버스로 1시간 30분이나 달려야 했다.
운하 주변에 수상 가옥들이 빼곡하게 자리잡았는데, 역시 강물은 흐렸다. 군데군데 커다한 빗물 받을 항아리가 한 두 개씩 놓였고, 폭 4∼5m 정도의 운하를 두꺼운 스티로폼 조각을 타고 건너편 집으로 오가고 있었다. 집앞에는 열대 식물 화분이 화려한 꽃송이를 피우고 있었다.
롱테일 보트에 두 가족씩 올랐고, 노를 젓는 아녀자는 달랑 하나였다. 선착장을 나서 이동하고 운하 촉이 더 넓어진 곳으로 나가니 엔진을 단 롱테일 보트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양 팔을 조금만 벌려도 옆 보트와 부딪힐 판이어서 보트 안쪽을 잡은 여러 척의 롱보트들이 복잡하게 판매대를 이어놓은 시장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 좁지 않은 시장인데도 여러 척의 롱보트가 뒤엉키고, 롱보트에 판매할 걸 싣고 다니는 장삿배도 있으니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았다. 희한하게도 서로 부딪히거나 다투지 않으면서 수상가옥 끝에 나앉은 장사치들은 롱보트에서 파는 쌀국수나 요깃거리를 사서 가족들끼리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진열 상품 마다 현지화폐의 가격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관광객을 위한 달러표시를 찾기 어려웠다. 장사치들은 손에 계산기를 들고 물어보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그저 눈요기만 했을 뿐, 그 어느 것도 구입해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점심때가 되어 요즘 인기를 끈다는 MK수끼라는 메뉴를 먹으러 갔다. 일종의 샤브샤브 요리로 닭고기와 채소 그리고 해산물을 넣어 익혀먹는다는데, 가이드의 말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태국인들이 평소에 먹는 음식보다 조금 더 고급스럽다고나 할까. 그래도 나중에 후루룩 들이키는 육수는 제법 담백하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방콕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태국전통안마 체험 장소로 갔다.
고가도로 아래쪽은 빈부격차를 실감할 정도로 옛과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담장이 나무판자이거나, 대나무발 울타리인 집도 있고, 슬라브인지 벽돌인지 시멘트로 쌓은 집도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지붕은 거의가 슬레이트기와 같았다. 버스가 멈춘 곳은 그런 집들 사이를 지나 커다란 단층 창고 같았다. 다만 대형버스 몇 대가 들고 날 정도의 주차장이 널찍했다. 붉은 색 지붕과 한글로 쓰인 안마 체험이란 자그만 간판이 눈에 확 띄었다.
안에 들어가니 홀이 보이고 남자들과 여자들을 따로 맞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행들이 손을 씻은 뒤에 지정해준 호수의 방으로 들어가려니 복도에 안마사들이 목욕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수줍게 대기하고 있었다. 방안은 조명이 무척 어두웠다. 군대 내무반처럼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매트를 깔고 이부자리를 펼쳐둔 게 보였다. 일행이 각자 알아서 자리를 차지하자 손짓 발짓으로 옷을 바꿔 입으라고 했다. 팬티만 입고 바지와 가운으로 갈아입었더니 반듯이 누우랬다. 조명이 조금 더 어두워지고 안마사들이 발 주변에 꿇어 앉아 물수건으로 발을 닦아주고, 오일을 발라주었다. 기분이 묘해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발가락과 발등에서 종아리까지 안마가 이어졌다. 옆 자리에 누운 일행은 벌써 가볍게 코를 골았다. 나는 무릎수술을 하였으니 가볍게 안마해달라는 부탁을 미리 해 두었기에 서툰 우리말로 ‘괜찮아요?’라고 물어오는 안마사에게 ‘OK’라고 답해 주었다. 양쪽 다리를 모두 안마하고는 윗몸을 거쳐 돌아눕게 하더니 등 쪽까지 골고루 안마해주었다. 가끔 ‘으윽’하는 소리를 내는 일행도 있었는데 사람마다 느낌이 달랐던 모양이다. 2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불이 환해지자 다시 오일을 바르고 닦아 준다. 수고비를 4천 원씩 주라는 말을 들었기에 태국 돈 100바트를 주었다. 안마사는 더 바라는 눈치였지만, 못 본 체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안마의 효과가 크지 않았고, 다시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지만, 여자들은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모두 부산스럽게 안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버스에 올라 퇴근길 정체가 극심하다는 방콕 시내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를 방콕에서 가장 높은 호텔 뷔페식당에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이욕타위 뷔페는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라 했다. 환한 대낮이라면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무려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호텔 아래 길은 주차된 차량들과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용권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다시 30분을 줄 서서 기다렸다. 84층 건물인데 우리는 77층에서 내렸다. 78층이 뷔페식당이라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이용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었고, 저마다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를 찾아 다녀야 했다.
코너 별로 중식, 일식, 양식, 현지식이 섞여 있었으니 대략 50여 가지 정도가 되었다. 일행은 일식 코너 앞좌석이어서 주로 새우와 게구이를 가져다 먹었다. 이용시간이 90분이래서 이것저것 골고루 가져다 배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쌀국수를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84층 회전전망대로 올라갔다. 방콕의 밤은 아름다웠다. 사방이 뻥 뚫려있고, 차량의 전조등과 후미등이 마치 회전목마처럼 휘돌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둥근 원판 저 먼 곳은 그저 까만 어둠이었다.
내려오는 것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호텔 엘리베이터를 세 번 갈아타고 겨우 출발장소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까지 가는 길도 복잡하기는 똑 같았다. 10시가 다 되어 겨웅 호텔에 도착 방 배정을 받았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19층 복도 끝 서로 마주보는 방이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크고 넓고 깨끗했다. 출입 카드를 방마다 두 개씩 주는 것이 신기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식당에서도 카드를 보여주어야 입장한다면서 부부가 하나씩 지니고 다니라 했다. 여행 중에 가장 늦은 시간 취침이라 샤워만 간단히 하고 곯아떨어졌다.
-계속
첫댓글 "용서는 하지만 상처는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ㅎㅎ그런 기억을 지우는 후시딘도 곧 나오지 않을까요?
안부를 물어오는 관절때문에 때로는 지치고 피곤 하셨겠지만 ㅎㅎ
영화로만 봤던 그 콰이강도 가보시고 안마도 받아 보시고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
긴 글이어도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힙니다.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