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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야 할 이유
시편 136편 1-16
2022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성도 여러분들과 가족과 가정과 직장과 사업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래전에 설악산 대청봉을 올라보았습니다. 우리노회 목사님, 장로님들과 함께 해발 1708m 대청봉을 올라본 후엔 그 어떤 산도 오를 자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보다 높은 1950m의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도 올라 보았지만 대청봉 처럼 힘들고 어려운 산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든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발톱이 빠질만큼 힘들었습니다.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어두울 때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험한 대청봉을 오른 후에는 산에 대한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렇듯 최고를 경험해 본 사람은 그 아래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최상의 고난을 겪은 사람이 담대해집니다. 해병대 출신들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평생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의 군대 생활이 그 어느 군대보다 더 고되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힘든 고난을 겪어본 사람은 사회에서도 무난히 어려움 들을 이겨내는 것을 봅니다.
1. 감사해야 할 사람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에겐 어떤 감사 제목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주변에 특별한 감사 제목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올해 최고로 감사해야 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프로야구에서 우승한 선수들일까요, 주식으로 소위 말해 대박이 난 사람들일까요, 그렇게 바라던 반쪽을 찾아서 결혼에 골인한 노총각, 노처녀들일까요, 수능시험을 보는데 지금까지의 모의고사보다 점수가 더 잘 나와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는 수험생들일까요, 그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가지 못한 해외여행을 가족들과 가서 멋진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일까요? 분명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와 부러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사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할까요? 이들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없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은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언제 감사 고백할까요? 감사할 제목들, 감사할 이유들이 생길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감사할 이유는 지극히 상대적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감사할 이유가 너무 많다는 사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오늘 본문 시편 13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지만 각절마다 다양하고 충분한 이유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라는 동일한 후렴구가 반복됩니다. 본 시편은 서로가 주고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제 선창은 레위인들이, 후렴구 제창은 성가대원 또는 회중 전체가 따라 하는 구조입니다. 각 절의 앞부분에는 감사의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성가대원이나 회중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라고 화답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 뛰어나시다, 하나님은 모든 주권자 중에 가장 뛰어나시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헤세드’는 ‘자비, 인자’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필요에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를 가리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말은 능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그 선함과 인자함이 한결같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믿음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 때론 기도 응답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때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 사실로 인해 감사하며 찬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시편 저자는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행하신 가장 큰 두 가지 사건, 창조와 구원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4~9절까지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고백합니다. 큰 빛들을 지으시고, 하늘을 지으시고, 해를 지어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달과 별을 지어 밤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0~16절까지는 구원하신 하나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집트에서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사이를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 바로와 그 군대를 빠뜨리시고, 그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 창조와 구원의 감사
시인의 감사 제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창조’와 ‘구원’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가장 중요한 감사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생명과 호흡과 건강을 주셔서 지난 한 주간 잘 지내다가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요, 감사한 일입니까? 이 찬란한 가을 하늘을 보게 하시고, 계절의 변화 속에서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게 하셨습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뭘 그런 것까지 감사하냐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습니다. 내가 숨을 쉽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체적으로 출애굽 사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종살이를 하던 그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입니까? 이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가야 할 곳들도 많을 텐데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2000년 전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시고, 나에게 구원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분께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 그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창조와 구원’, 이 두 가지 사실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른 어떤 문제도 이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그 어떤 제목도 이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창조와 구원,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일상에서 더 구체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고,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 당연함이 아니라 마땅히 감사
감사함의 반대말은 불평, 불만입니다. 그런데 감사에서 갑자기 불평, 불만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사이에는 당연함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감사함의 가장 큰 방해물은 당연함입니다. 감사했던 일인데 익숙해지면서 당연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금방 싫증을 냅니다. 짜증을 내고 원망합니다. 당연함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영적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더 나아가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실, 어떤 사건을 당연하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다는 생각이 조금만 더 많아지면 금방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반대로 그 당연함이 조금만 더 적어지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전에 차가 많지 않을 때 차를 가진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직장 근처에 있는 몇 분을 차를 태워 준 덕분에 몇 분이 편하게 직장에 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조금 늦게 왔습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이유도 모른 채 겨울에 무작정 기다리다 보니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은 연락도 없이 안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택시라도 타고 직장에 간 날은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감사한 일이었는데 점점 익숙해지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조금 마음에 안 들면 불평, 불만, 원망의 마음이 생깁니다. 삶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일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까? 아내가 정성껏 차려주는 식사가 감사하지 않고 이젠 너무 당연하게 여겨집니까? 남편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감사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진 않습니까?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나요? 좋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나요? 지극히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이런 일들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감사해야 할 제목들이 불평과 원망의 제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연함이 불평과 원망으로 바뀌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4. 풍성한 감사
마지못해서 주는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선물에는 상대방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포장지부터, 내용물, 심지어는 선물을 주는 장소와 타이밍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깝고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선물을 받으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인색한 감사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할 수 없어서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감사의 표현을 하려면 풍성하게 넘쳐나는 감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미결수 신세로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편지 안에는 감사, 기쁨, 풍성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바울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흘러넘쳤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울이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상황은 어제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새로운 것들이 보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어떤 색의 선글라스를 착용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검게도, 붉게도, 노랗게도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 믿음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내 주변의 일들을 볼 때,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고백이 바로 감사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어려운 환경이 바뀐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이 바뀔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바뀌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바뀔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표현을 하되 마지못해, 인색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5. 감사의 타이밍
감사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난번에 감사했어요.” 한참 지나서 하는 감사는 김이 빠진 탄산음료와 같습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면 감사하는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지니고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감사하면 큰 감사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식당에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물건을 살 때도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십시오. 내 돈 내고 내가 사는데 뭐가 감사하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감사하면 상대방도 기억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법칙은 작은 감사는 더 큰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중물의 법칙입니다. 적은 양의 물을 넣었을 때 펌프를 통해서 많은 물이 쏟아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작은 감사를 통해 더 큰 감사할 내용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사가 습관이 되면 힘든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절대로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런 일을 감사하면 더 큰 감사 거리가 찾아옵니다. 그 이유는 그 감사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받고 나서 감사할 수도 있지만, 감사하고 나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어려운 일에도 감사하다 보면 정말 감사할 일들이 벌어집니다. 다음은 제이 데니스 목사님이 말한 감사의 이유입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다면 감사하십시오.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엉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하루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할 이유를 찾으십니까? 한 해를 결산해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결실로 인해 결실이 없었다면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음에 손해를 보았다면 더 큰 손해가 없었던 이유로 인해 우리는 어떤 모습이든지 감사할 제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감사의 마음과 고백을 통해 더 풍성히 채워 주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됨에도 당연히 여기거나 현상 유지한 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손해 본 것에 대해서 누군가를 탓한다면 결국에는 감사를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 될 것이고,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별 의미 없이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복의 비결입니다. 우리 삶에 감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감사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감사 제목이 풍성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더 큰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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