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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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롤로 가니엘 (CHARLES GARNIER)
축일 : 9월 26일.
그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퀘벡으로 갔다.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론 마을이 이로그마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게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했다.
가니엘 신부의 장상은 그를 이렇게 말하였다:
"웃으면서 선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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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브리엘 랄러망 (G.LALEMANT)
축일 : 9월 26일
그는 1630년에 예수회원이 되어
외국 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건강은 늘 좋지 못하였다.
2년 동안 퀘벡에서 사목한 후 그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합류하여 휴론 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할 즈음에
이로그마족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사제가 포로가
되어 쌩 이나스까지 호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몸서리치는 고문을 받았는데 브레뵈프 신부는
몇 시간 내에 운명하였으나, 아주 묘하게도
가브리엘 신부는 그날 밤은 넘겼지만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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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스마(Cosmas)
성 다미아누스(Damianus)
축일 9월 26일
성 코스마(또는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는
아라비아 태생으로 쌍둥이 형제였다고 전해오는데,
그들의 전기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므로
전설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실리시아(Cilicia)의 에게해(Aegean Sea)
근방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의료기술이 남달리 뛰어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서 명의라는 높은 칭송을
듣고 살았다. 또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실리시아의 집정관
리시아스(Lysias) 앞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신앙 때문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이던 안티무스,
유프레피우스 그리고 레옹시오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코스마와 다미아누스는
이발사의 수호자이고, 루가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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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노엘 카바넬 (Noel Chabanel)
축일 : 9월 26일
프랑스의 망드 군교에서 출생한 그는
163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1643년에
뉴 프랑스의 휴론 인디언들의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에타리타의 인디언 마을에서
샤를르 가르니엘 신부의 보좌로 활동하다가,
이웃 마을인 생뜨 마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배교자 인디언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는 북 아메리카의 순교자로서,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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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닐로(Nilus)
축일 9월 26일
성 닐루스(또는 닐로)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출신의 그리스인으로서,
젊었을 때에는 고향에서 세리 일을 맡아 보았고,
젊은 여인과 함께 살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940년에 그 여인과
아이가 죽자, 그는 캄파니아(Campania)의
팔마(Palma)에 있는 비잔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 그가 유명 인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선성과 지혜 때문인데,
성 데메트리오 코로네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수하 수도자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인접한 곳으로
피신하여 세르페리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리스 수도자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세 번째 계승자인 크로타페라타의
성 바로톨로메오(+1055, 축일 11월 11일)는
닐루스가 세운 수도원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던 그의 수제자였고, 스승과 같이 찬미가를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노련한 서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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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달마시오 모네르(Dalmatius Moner)
축일 9월 26일
설교자회의 고해신부로 일생을 지냈던
달마티우스 모네르(또는 달마시오)는 수도원의
일상적인 의무를 수행하면서 조용히 지냈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카탈루냐(Cataluna)의
산타 콜룸바(Santa Columba)의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고, 몬트펠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는 이곳의 생활에서 극도의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을 마친 뒤에
제노바(Genova)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5세였고, 서약한 뒤에는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규칙을 설명할 때마다 자발적인 금욕과
고행을 역설하였고, 금주는 물론 의자에서
그냥 잠을 자는 등 자신이 먼저 수많은 고행을
자발적으로 행하였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상이라고
하면서 밖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달마시오가 없어졌는데, 다른 형제들이
그를 찾고 보니 깊은 탈혼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천사와 이야기하는 형제’로 불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날을 라 생트 바움에서
마치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그 이유는
도미니코회의 수호성녀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Maria Magdalena)가 30년 동안 지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제노바(Genova)의 어느 동굴에서 지낼 허락은
받았다. 그는 이 불편한 곳에서 4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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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 쿠데륵(Teresa Couderc)
축일 9월 26일
프랑스 사브리에르의 마슬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 쿠데륵(Teresia Couderc, 또는 데레사)은
마리 빅토리아로 영세하고, J. 테름 신부가
자기 본당에 세운 교사 봉사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다. 테름 신부가 남동 프랑스의
비브레의 선교사로 파견될 때, 그는 테레사와
다른 두 자매로 하여금 라 루베쉭의
성 프란치스코 레지스 경당에서 부녀자를 위한
숙박소를 운영토록 하고, 성 레지스 수녀회의
원장으로 그녀를 임명하였다(1829).
여기서 테레사는 평신도를 위한 피정도
실시하였는데, 1834년에 테름 신부가 타계하자
예수회가 이 경당을 맡았으며, 마더 테레사가
원장으로 있는 성 레지스 수녀회원 12명을
선발하여 피정 지도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이것이 세나클에서 피정을 전담하던
성모 수녀회의 모태였다. 1838년 테레사 수녀는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수녀회가
재정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녀는
리옹(Lyon)에 새 수도원을 세웠고,
여생을 평수녀로 봉사하면서 지냈다.
테레사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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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치아 (LUCY)
축일 : 9월 26일
돈 루이지의 출신지로 잘 알려진
시실리의 칼타지로네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생동안 살레르노의 프란치스칸 율수 3회
수도원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전기는
알려진게 없다. 다만 그녀가 수련장이었고
또 예수님의 오상에 특별한 신심을 지녔으며,
살았을 때나 죽은 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그녀의 높은 덕을 증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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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질리오(Vigilius)
축일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브레시아의 주교인 성 비길리우스
(또는 비질리오)는 지역 수도원을 후원하고
자신의 교구의 기초를 굳건히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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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나토르(Senator)
축일 9월 26일
성 세나토르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몇몇 지방
중의 하나일 수 있는 알바눔(Albanum)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실질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이탈리아 알바노(Albano)
사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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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만시오(Amantius)
축일 9월 26일
성 아만티우스(또는 아만시오)는 이탈리아
치타 디 카스텔로의 본당 사제로 그의 성덕으로
인해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에
의해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치타 디 카스텔로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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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9월 26일
12세기의 북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좋은 가문의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와 애덕 사업에 힘을 모은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 베르나르두스
(Bernardus)의 권고로 세속의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밀라노(Milano)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로데나리오에서 은수자로
살던 성 요한(Joannes)이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들이 소위 ‘후밀리아티’
(Humiliati, 가난한 이들)이다. 그는 이들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회칙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성모 소성무일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모습은 후일에 크게 변하여,
1571년에는 성좌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
(Alexander III, 1159-1181년 재임)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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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치프리아노)
성녀 유스티나(Justina)
축일 9월 26일
역사적인 확실한 근거는 희박하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안티오키아(Antiochia)에 살던 이교도로서
잡귀신들을 불러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 때문에 그리스,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교도 청년인 아글레데스란 사람이
안티오키아의 신자이던 미모의 성녀 유스티나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에게 그녀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온갖 예식을 거행하였지만 유스티나의
신앙심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그는 자기 창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유스티나에게 덤비는 악마를 불렀다.
그러나 유스티나는 십자가의 표지로 마귀들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악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그를 덮치고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 키프리아누스는 십자가를 만들어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행운을 맛보게 되자,
즉시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교리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온갖 마술 서적을 불태웠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마침내
아글레데스와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고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유스티나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다마스쿠스
(Damascus)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 앞으로 끌려 나가 재판을
받았으며, 니코메디아
(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트)의
갈루스(Gallus) 강 언덕에서 황제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때 키프리아누스를 찾아와 위로하였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신자도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방치된 채로 있었지만, 6일 후 신자인
선원들이 발견하여 로마(Rome)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루피나(Rufina)라는
귀족 부인의 영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콘스탄티누스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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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칼리스트라토(Callistratus)
축일 9월 26일
성 칼리스트라투스(또는 칼리스트라토)는
49명의 동료 군인들과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 박해 때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자루에 넣어져 꿰매진 후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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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보스트(John Boste)
축일 : 9월 26일
잉글랜드 웨스트모랜드의 터프튼에서 태어난
그는 옥스포드의 퀸 대학에서 수학하고,
그곳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576년에
가톨릭이 된 후, 라임스로 가서 158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잉글랜드
선교 길에 올랏으며, 북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요인 암살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그는
더르햄 근교에서 프랜시스 엑클스필드에
의하여 배신을 당하여,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그는 오랜 감옥생활을 하다가,
다시 더르햄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594년 7월 24일 참수당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와 웰스 40명의 순교자의 일원으로
1970년에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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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사악 요그(Isaac Jogues)
축일 : 9월 26일
그는 1624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2년 뒤에 카나다로 가는 선교사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모호크족들에게 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레이크 슈페리올의 동쪽 통로를 관통하고
개척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1642년, 그는
이로꽈 인디언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처참하게 손이 잘리는
등의 고문을 받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어느
화란 사람의 도움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3년이 채 못되어 그는 다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칼로 난자당한 끝에,
마지막으로 도끼로 쳐죽이는 죽음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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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콜만(Colman)
축일 : 9월 26일
그는 아일랜드 티론의 글리넬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숙부인 성 골룸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590년경에 란 엘로라 부르는 오팔리에 수도원을
세웠다. 또한 그는 묵카모어에도 수도원을
세웠으며, 원장이 되었고, 콘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마도 신심의 알파벳
(Alphabet Of Devotion)의 저자인 듯하다.
그는 또 콜만 마쿠살일니로 알려졌는데,
니날리에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