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의 영광
시편 8:4~5,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찬송가 442장(저 장미꽃 위의 이슬)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이 만물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만물 중에서 특별히 인간이 가진 특별한 영광에 대하여 감격하면서 노래합니다. 인간 자체를 보면 악하고 연약하고 작고 보잘것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만물 중에서 인간을 지극히 영광스럽고 보시고 하나님보다 못하게 하시고 만물보다 더 존귀한 지위를 주셔서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담 이래로 타락하여져서 천사보다 낮은 지위에 떨어지고 죽음의 비천함에 눌린 존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지위가 여전히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은 만물보다 존귀하지만 종국에는 어리석어지고 멸망하는 짐승들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는 그들이 만물과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고 그가 보내신 구속자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49편 12절 이하에서 그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그들은 양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그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구원자로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아니하였음으로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들짐승들처럼 어리석고 결국은 영원한 썩음과 사망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하고 영광스럽게 살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죽음을 당하고 음부에 떨어지고 결국 스올 지옥이 그의 거처가 되어 버립니다.
그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대단한 칭찬을 받았고 많은 부와 많은 세상 권세를 누려서 스스로 잘 살았다고 자부할지 몰라도 그것은 지극히 헛된 자랑에 불과하니 그들의 운명은 달라지지 못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렸던 세상 영광이 그들과 함께 따라 지하에 내려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49편 기자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이 세상 영광을 자랑하는 무지한 자들을 향하여 이르기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담 이래로 타락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사망의 철창 권세 아래 무력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곧 대속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를 믿는 자들로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보다 낮아졌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지위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천사들이 수종드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3 이하의 말씀에서 이르기를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과 동일한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사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천사들의 우두머리가 되셨는데, 그 일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3:22 말씀에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함으로 인하여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보다 낮춰진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됨으로써 이제 성도들은 천사들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천사들로부터 시종을 받게 되는 존귀한 지위를 얻은 것입니다.
몸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성도들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범하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거기에 대하여 누가복음 20:35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누가복음 20:35,36)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죽어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함을 입게 되는데, 그들은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천사와 동등하게 되며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이 천사들처럼 죽음을 모르는 불사의 몸이 되며 또한 신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인 천사들보다 더 존귀하게 신분이 상승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극히 큰 영광의 변화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다윗이 성령 안에서 찬탄하면서 사람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즐거워했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우리들은 더욱 큰 구원의 영광을 인하여 더욱 크게 즐거워하며 성도의 영광을 인하여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을 뵙게 될 터인데 그 때 우리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뵙게 되는 주님의 영광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서 잠깐 보았으며, 사도 바울은 대낮의 태양보다 더 강력한 영광의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땅바닥에 쓰러져버렸으며, 밧모 섬에 귀양살던 사도 요한은 지극히 큰 영광의 옷을 입고 불꽃 같은 눈과 날카로운 검이 쏟아지는 말씀과 황금 허리 띠를 띤 빛나는 옷을 입은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보았을 때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주님을 장차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뵙게 될 터인데 그 때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죽은 것처럼 못 견디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그 찬란하고 광대한 영광을 우리가 직접 뵙고도 감히 견딜 수 있는 영광을 우리 몸과 영혼이 덧입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장차 받는 영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광과 존귀의 관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할 것인가를 지금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큰 영광을 이 땅에서 소망 중에 품고 비록 고난과 시련도 많고 우리 몸도 심히 쇠약해져갈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맙시다. 고린도후서 4:1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말씀을 우리가 항상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4:16~5:1)
그렇습니다. 우리의 낡은 집, 우리의 육신의 몸이 허물어져가고 있습니까? 천막처럼 약해지고 낡아지고 여기 저기 구멍이 나고 비가 샙니까? 그렇다면 곧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짓고 있는 새 집, 새 몸으로 덧입혀질 날이 가까움을 기억합시다. 그 때 우리의 낡은 집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영원히 사망과 질병과 연약함을 모르는 영원한 영광의 부활의 몸을 우리가 덧입게 될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소망 가지고 우리의 지극히 존귀한 신분을 잊지 말고 더욱 더 자부심을 갖고 순례길을 하룻길 하룻길을 찬양하며 걸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