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8:7]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나 여호와가...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 개역 성경은 1인칭 문장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3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너에게 징조니, 그가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호와께서 이루실 것이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일의 순서상 이사야의 말이 주어지기 전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적극적인 요청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행동은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의 불신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
[사 38: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
아하스의 일영표에...물러가게 하리라 - '아하스의 일영표'는 히스기야의 선왕 아하스가 세운 해시계를 말한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일영표는 바벨론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앗수르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이고,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한 지식을 도입한 듯하다. '일영표'는 문자적으로 '계단들' 이니, 해가 떠오를 때와 질 때를 기준으로 해서 계단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그림자가 앞으로 10도 나아가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제안했으며,왕은 좀더 어렵게 보이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이에...물러가니라 - 히찌히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 현상을 히스기야의 죽음이 뒤로 연기된 것과 평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10'이라는 숫자 대신에 '15'라는 숫자가 사용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당시 해시계는 12눈금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숫자상의 차이 때문에 꺼림칙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시계의 눈금의 정확한 수치는 차치하고라도, 해시계 자체에 대해서 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이 징조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이적적'인 것이다. 그럴진대, 이러한 현상이 히스기야의 눈앞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혹자는 이것을 부분적인 일식 현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로써는 그림자가 뒤로 물러감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이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오후에 바닥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이적적으로' 위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뒤로 물러간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그림자였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양의 진행이 한시적으로 거꾸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물리학적인 견지에서 이 지구상에 엄청난 문제점들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되어서는 안된다.그러나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자신이 설정해 두신 이 세상의 법칙들과 조화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듯하다. 마침 신기루가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상한 현상을 나타내듯이, 그 징조는 빛의 굴절 작용으로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문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추론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사 38: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 병이 나을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유다 왕 히스기야가...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 히스기야 왕의 시편은 오직 본서에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편을 죽음의 병에서 회복된 후에 지었다.본절은 이 시편의 표제인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유다 왕 히스기야의 글(믹탑), 그가 병들었다가 그 병에서 살아난 때'(원문). '믹탑'은 보통 '기록된 글' 혹은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시편의 표제에는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게세니우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믹탐'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믹탐'은 시편의 전문 용어로서, 시 16,56-60편에서 표제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문학에 탁월하였던 히스기야는 성전 예배시에 관악과 성악을 복구시켰으며,
특히 위원회를 결성하여 잠언을 수집하고 고대 문서들을 수집, 보관하는 등의 일을 추진케 한 바 있다(잠 25:1). 따라서 이러한 그가 본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 38:10]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 직역하면 '내 날들의 고요함 가운데서 음부의 문으로 내가 달려간다'이다. '고요함'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건강한 생활의 평탄한 과정', '격정의 때가 지나고 사람의 성격이 한층 고요해지는 때', '정오의 휴지 드의 긍적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그럴진대, '내 날들의 고요함'을 '내 생애의 정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음부의 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이다.
[사 38: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생존세계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또 말하기를...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 계속하여 히스기야는 돌연한 죽음으로 인하여 그가 상실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노래하니, 그 첫째는 '여호와를 뵈옵는 것'이며, 그 둘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뵈옵는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본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에서 공중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그와 살아있는 접촉과 교제를 나눈다는 말이다..하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는 필경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히스기야가 생존세계, 곧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죽음의 자리에서 이것들을 안타깝게 추상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뵈옵지 못하겠고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여호와'의 단축형인 '야'가 연속해서 두 번 나온다. 직역하면 '내가 보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여호와. 산 자들의 땅에서'이다. '야 야'는 '야훼'의 오류가 아니라 강의적인 반복을 나타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