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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묵상글 (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 자랑하지 않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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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31 03:42
- 자랑하지 않기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저는 저의 출신과 처지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복음에 비춰 저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아니니 다행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Positive Thinking(긍정적-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고 특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그 일을 하는 데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이요 사랑이시라고 하느님을 믿고 모진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믿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인지 잘 믿는 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믿기로 선택한 것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옛날 이발소에서 머리 깎으면 면도사가 면도해줄 때의 일입니다.
얼굴을 면도하고 나면 턱을 거쳐 목까지 면도해주는데
하루는 목 부분을 면도할 때 문득 저분이 면도하다가
제 목을 확 따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그동안 사람을 믿어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는데 계속 믿고 면도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리고 그때 선택했습니다.
계속 믿기로 그리고 모두 믿기로.
그리고 독서에 비춰 저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잠언이 얘기하듯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영향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인간이 영적으로 얼마나 약한지 정확히 꿰뚫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것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옛날에는 그러니까 세속적인 생각이 있었을 때는 열등감이 없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열등감이 있었다는 것이 바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의 반작용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가장 천박한 자랑은 명품 자랑입니다.
머리(아이큐) 자랑도 못지않습니다.
재능(달란트) 자랑도 꽤 많이 합니다.
가문이나 자식 자랑도 많이 하고 손주 자랑은 노골적입니다.
더 꼴불견인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이것을 신랄하게 꼬집으신 적 있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하느님 앞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며 머리를 쳐들지 못하는데
바리사이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도하러 갔다지만 실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랑한 것이요,
그것도 인간에게 자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랑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래,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분이 있다면 그분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데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까지 자랑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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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백 원 단위의 돈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천 원 단위의 돈 역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 돈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묵주기도를 하며 동네 공원을 걷습니다. 6~7km를 걸으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그날도 묵주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성당까지 오려면 아직도 꽤 먼 거리를 가야만 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서, 얼른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글쎄 지갑이 없었고, 여기에 휴대전화도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혹시 몰라서 바지 주머니를 뒤지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일 싼 우산의 가격이 7천 원으로, 2천 원이 부족합니다. 평소에 크지 않은 돈이라 생각했는데, 그 2천 원은 우산을 살 수 없는 너무나 큰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뜻밖의 사고로 자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이지요. 가족 중의 한 명일 뿐이지만, 그 빈자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슬픔이 떠나지 않았고,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부분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부분이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작은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특히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면서 불평불만을 가집니다. 하지만 작은 부분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 주인이 떠나지요. 다섯 텔렌트 받은 이는 그 돈을 활용해서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는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길 뿐이었습니다. 결과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게 되었고,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한 탈렌트는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를 받은 이보다 적게 받았다는 불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한 탈렌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게 받았다면서 불평 불만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충실한 사람만이 주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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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된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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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명’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말씀처럼 ‘씨앗’(마태 13,1-23)으로, 곧 ‘종자돈’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활용하여 맺은 열매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실행’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임은 비워진 만큼만 받을 수 있고,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기에 결국, 베풀수록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 준비하는 삶”은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요, 맡겨진 일에 충실함은 일을 ‘맡긴 분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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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인과 함께 기쁨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바탕으로 나의 정성을 더 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은 배를 흔들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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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 새로운 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름을 정하는데 몇 가지 제안이 있었습니다. ‘망치회, 요셉회, 목수회’ 중에서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이분들은 본당 ‘창고’를 만들었던 분입니다. 의기투합해서 앞으로 본당 시설의 관리와 수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자고 했고, 그렇게 해서 목수회가 탄생했습니다. 요셉 성인도 목수였고, 예수님도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단체 이름을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목수회의 첫 번째 과제는 사제관 ‘에어컨’ 문제였습니다. 사제관 에어컨의 온도 조절이 안 되었습니다. 몇 가지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필터’였습니다. 에어컨의 필터를 6개월에 한번은 교체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 한분이 에어컨 필터를 교체 하였고, 온도 조절이 잘 되었습니다. 앞으로 목수회는 본당의 시설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기꺼이 굳은 일을 맡아서 해 주기로 한 ‘목수회’ 형제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나누었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의 직책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 지사장’이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임무였습니다. 주된 임무는 ‘신문홍보’였습니다. 직원들이 원고를 작성하면 교정하였고, 가끔씩 필진과의 만남도 가졌고, 광고주와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팬데믹이 왔고, 뉴욕에 온지 6개월 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노력하면서 신문사를 운영하였습니다. 덕분에 신문사는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동북부 ME 담당신부입니다. 저는 엠이 봉자들과 함께 피정을 준비했고, 가을 소풍도 함께 했습니다. 주말 봉사도 함께 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은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처음에 3개월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뉴욕을 떠날 때까지 3년 6개월을 함께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야외미사를 하였고, 작년에는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지금 댈러스 성 김대건 성당에서 지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눌 것이 없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부활로 열매를 맺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은 늘 푸르고 많은 생명이 살아갑니다. 이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모래에는 생명이 살기 어렵습니다. 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곁에서 듣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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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젊은 사람들은 그 매력을 외모에서 찾을지 모르겠습니다. 티비에 나오는 잘생기고 훤칠한 사람을 보고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잘록한 허리에 예쁜 얼굴을 한 연예인을 보고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외모를 사람의 매력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진 매력 중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가치를 가지는 매력은 바로 ‘성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면 볼수록 진국인 사람은 아마도 성실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사람의 성실함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작은 것에 성실한 것이 얼마나 큰 은총과 축복을 가져오는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종들에게는 달란트라는 돈이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다섯 달란트는 아주 많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으로서 그 정도의 돈은 적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세 종에게 똑같이 적은 돈을 맡겼습니다.
물론 종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달랐는지 복음을 통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맡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큰 것일 수도 있고 하늘에서 보기에 적은 것일 수도 있는 우리 곁의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곁의 사람들에게 성실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 관계 안에 아픔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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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란
가끔 외부 강연을 나갑니다. 본당에 가서 강연할 때도 있고 단체를 위해 강연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날입니다. 어떤 본당에서 강연을 마치고 가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자매님께서 제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중학생 때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 몇 동 몇 호에 사셨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영험한 분이 제 강연을 들으러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아셨냐고 물으니, 그분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신부님 집 옆집이었거든요. 그때 어머니께서 제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성당 다니고 있습니다.’라며 다시 인사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그 자매님은 신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웃집 아주머니, 즉 저희 어머니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나중에 그분의 발걸음을 성당으로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전교는 끌고 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전교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성전이라는 하느님 꽃밭을 향해 걸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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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에게 맡겨진 탈렌트
“날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시편33,12)
제 유일한 소망은 가을단풍처럼, 저녁노을처럼, 곱고 품위있게 나이들어 가는 것입니다. 외관에는 초연하고 자유로우니, 안이 맑고 밝으면 밖도 저절로 그러하리란 믿음 때문입니다. 새벽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 때 마다 되뇌는 오래된 자작시가 있습니다. 세월 흘러 지나도 여전히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시입니다.
“문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9>
하느님의 사랑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도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삶의 좋은 지혜가 됩니다. 매사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깨닫습니다.
“선은 아무리 쌓아도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악은 아주 작은 불씨일지라도 집을 태울수 있다.”<다산>
“선은 반드시 쌓인 후에 이뤄지고 악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경계해야 한다.”<주자>
어제 교리문답같은 말마디도 고마웠습니다.
“예수님이 3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사셨고, 그로써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루하루 맡겨진 사명에 최선의 노력을 다함으로 거룩한 일상을 사는 게 참으로 중요하며 잘 사는 일입니다.
어제 마산 배기현 주교님이 수도공동체에 선물한 “거제도 가는 길, 피델리스” 책을 보는 중입니다. 서문 대신 쓰여진 말마디가 마음을 끕니다.
“귀한 순례기가 있어 보내드립니다. 배기현 주교, 2024년 성녀 모니카 축일에”
오늘 제1독서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샘솟는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은 겸손이요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살아가기에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각자 맡겨진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저절로 자기가 받은 탈렌트의 활용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몇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번역에 초인적인 활동을 펼치는 분들입니다. 성염대사, 안실비아수녀, 윤주현신부입니다.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온전히 활용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 묵상을 보면 안실비아수녀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받은 탈렌트를 활용하고 나누는 마음으로 날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씁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 둘입니다. 어제 열처녀의 비유에서처럼 늘 깨어 있는 삶이요, 오늘 탈렌트의 비유에서처럼 맡겨진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상에서의 참행복한 하늘나라의 삶이겠습니다. 남이 받은 탈렌트와 비교할 것도 없고 추호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 활용하라 맡기신 탈렌트니 자랑할 것도 아니고 다만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책임감을 지니고 최대한 활용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닌,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오늘 다섯 탈렌트를 받아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아 두 탈렌트를 남긴 이의 삶의 질은 5/5, 2/2, 똑같은 1입니다. 둘 다 주인이신 주님께 격찬을 받습니다. 둘 다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가 되어 산 이들입니다.
1.“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경구(警句)와 더불어 가나안 여자에 대한 다음 주님의 격찬도 내 삶의 경구로 삼아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종아! 여인아! 대신 내 이름을 넣고 되뇌어 보세요.
2.“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반면 한 탈렌트 받은 자는 주인의 뜻을 완전히 착각했고 오해했습니다. 잘 활용하라 맡기신 한 탈렌트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안전일변도의 삶을 선택하여 한 탈렌트 그대로 보관했다가 그대로 바칩니다. 한 탈렌트만 더 남겨도 충분한 것을 그냥 사장시켜 버리고 말았고 주인의 격렬한 반응과 더불어 한 탈렌트도 회수당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영적 현실에도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각자 맡겨진 탈렌트를 잘 활용했는가 주님께 셈바치는 시간입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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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 계시 듯 나 있으리>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얼마일지 모를
잠시 나를
떠나시는
임께서
당신의
빈자리에
나를
놓으시니
임의
빈자리에서
임 계시 듯
나 있어
임의
빈자리가
비어있지
아니 하면
임께서 내게
오시는 날
나의 임은
임의 나와 함께
마냥 기쁘시고
내가 임을
맞이하는 날
임의 나는
나의 임과 함께
마냥 기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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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6-18)
돈을 숨긴 사람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물러가서 주인의 돈을 땅에 숨겼습니다. 탈렌트를 땅에 숨긴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세속적인 생각에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영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가 아니라 세상일에 쓴다는 뜻입니다. 이해력의 은사를 받았지만 몸과 관련된 것들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 대해 예언자는 “악을 저지르는 데는 약삭빠르면서도 선을 행할 줄은 모른다."(예레 4,22)고 합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섭니다. “내 아들아, 성인들의 반사된 영광 속에서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 110,3).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허다한 성인들로 둘러싸여 있다”(집회 24,16).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버지 안에”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영원 속에", 이제까지 누구도 하느님을 발견한 적이 없었습니다.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숨어 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15). 히.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느님은 숨어 있다가 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십니다. 이제까지 누구도 하느님을 발견한 적이 없었지만, 하느님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어떤 성인은 말했습니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잊고 당신에게로 훌쩍 날아갈 만큼 당신과 함께하는 행복을 맛봅니다. 주님, 나는 이 행복을 완전히 받아들이려고 하건만, 당신께서는 그것을 내게서 옮겨 버리고 마시는군요. 주님, 그렇께 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나를 꾀면서 나를 취하지 않으시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요? 나를 사랑하시면서 내게서 달아나시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요? 오 주님, 당신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을!” 예언자는 말합니다. “나의 하느님!”“내가 네 하느님이라고 누가 말하더냐?” “주님, 나는 당신을 벗어나서는 어디에서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 안에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시편 16,2).
우리가 하느님을 이런 식으로 찾고 발견할 수 있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아멘.(231)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쓴 함석헌은 “사실 우리 나라 사람이, 조상 공경을 우상 숭배라 해서 종래의 도덕을 뿌리째 흔드는 기독교를 쉬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몇 천 년 동안 내려오며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박아 온 이 ‘하느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민족은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하느님' 신앙을 기지고 살아왔다.
그 ‘하느님' 신앙은 사람에 따라서 뚜렷이 자각된 상태일 수도 있고, 거의 자각히지 못한 채로 무신론적 인생관을 지니고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세계 종교들의 형이상학과 종교 신앙에 접촉한 선비, 승려, 유식자들은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외국에서 전래된 ‘궁극적 실재관'을 자기 자신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학의 도움이 없더라도, 마치 옛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가나안 지역의 ‘엘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점차로 ‘야훼 유일신' 신앙과 지평 융합을 이루어갔듯이, 한국인의 종교적 절대자관도 그렇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문으로 적혀 있는 <삼일신고> 제 2장 일신(一神)장을 문헌 비핀적 사료 분석을 통해 보면, 후대 학자들의 ‘해석학적 눈'이 그 안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간파할 수 있지만, 그 속에 흐르는 기본적 신관은 한민족의 마음속에 면면이 흐르는 ‘궁극적 실재관'을 잘 나타낸 자료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하느님은 위 없는 으뜸 자리에 계셔서,,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만드시고, 수 없는 누리를 주관하시니라. 만물을 창조히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짐이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음성과 기운으로 원하여 빌면 몸소 보이시리니 본성에서 그 씨를 구하라.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계시느니라."(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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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5,21.23)
오늘의 복음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익히 잘 아시는 작가 ’코엘료‘의 유명한 소설「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코엘료가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썼듯이, 코엘료도 자신의 젊은 시절 연금술에 관한 오랜 연구와 방황을 통해 깨달은 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알아 오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사십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산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이르렀지요. 그곳에 현자가 사는 집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말을 들은 현자는 우선 자신의 아름다운 집을 모두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동안 기름이 담겨진 찻숟갈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집안을 모두 둘러보았는데, 오직 찻숟갈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무것도 보질 못했지요.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다시 가서 집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 숟가락의 기름이 흘러 없어져 버렸지요. 현자 중의 현자인 그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데 있도다.’ 』 라고.
이것은 코엘료가 연금술이란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며, 그것은 곧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곧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 것에 있다, 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법을 그는 <작가의 말>에 자기 스승인 ‘람’이 들려준 이야기로 써놓았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느 수도원을 찾았을 때, 사제들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성화를 그려 보이기도 하며 경배를 드렸다지요. 그런데 그중 맨 끝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가 경배드리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마음을 바치고 싶어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지요. 그러자 아기 예수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고, 성모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겁니다. 』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기 신화를 사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산티아고가 보여 준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산티아고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할, 매 순간에 자신의 신화를 살기 위해서 안락함을 버리고 고난을 택하는 용기를 가졌지요. 그런데 바로 그 고난이 곧 납을 녹여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의 용광로가 된 것입니다. “연금술의 작업 과정은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신의 변화를 나타낸다.” ( C.융)
연금술은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하늘나라는 선물이요 과제라는 것, 그리고 은총이요 요청이기에, 곧 현재와 임박할 종말 사이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나눠 준 액수가 당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5 탈렌트는 30,000 데나리온, 2 탈렌트는 12,000데나리온 그리고 1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인데, 당시에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엄청난 거금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 종은 주인이 맡긴 돈을 활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에 대한 응답이며 성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셋째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을 다만 안전하게 보관만 합니다. 이는 곧 자신과 자기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무튼 때가 되어 돌아온 주인은 종들을 불러 셈을 했고, 그에 따라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 23) 여기서 주인은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한 까닭은 두 종이 벌어들인 돈의 많고 적음 보다 종들의 자신(=주인)에게 대한 신의와 성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보다 주인에 대한 됨됨이를 판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모지신 분(마태25,24)이라고 생각해서 그릇되게 주인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결국 주인은 맡긴 돈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셋째 종에게서 빼앗은 돈을 첫째 종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29)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칭하는 경제용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남을 시기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더욱더 초라해진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고 봅니다. 뒤늦게 후회한다 해도 때는 그땐 이미 늦을 것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25,30) “주님, 저희에게 지금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또한 저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주시고, 이 모든 일을 성실히 끝내고서는 자만하고 자랑하기보다,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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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분께서 주신 탈렌트는 갈고 닦아야 /
박윤식 [big-llight] 240830. 22:09 ㅣNo.175534
예수님 시대의 부유한 지주들은 대부분 재산 관리와 증식을 전문가에게 맡겼단다. 그들은 자유민일수도, 종일수도 있었단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한 예수님께서 이르신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첫째와 둘째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돈을 재활용하여 배 장사의 큰 수익을 거두었다나. 반면에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 받은 그 돈을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단다. 땅에 묻은 그 종은 주인이 모진 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도 모은다고 생각으로 그러했단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과연 그의 생각이 맞는지는 논외로 치자. 그렇지만 그는 눈 딱 감고 재투자를 해야만 했다. 주인이 신뢰하지 않았다면 감히 맡기지도 않았을 그 돈인데, 그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던 거다. 맡기기만 해도 큰 수익 거두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건 단순히 각자의 재능을 잘 활용하라는 것만이 아닐 게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크게 신뢰하시는 그분의 고귀한 뜻을 깨달으라는 거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상 순례를 나설 때에, 아마도 누구든 하나 이상의 탈렌트를 그분한테 그저 받았으리라. 이는 기쁘게 살라는 뜻일 게다. 우리는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진정 기쁘게, 아니 마냥 썩히는지를 살펴볼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이는 그마저 빼앗길 것이란다. 얼핏 들으면 매우 불공평한 것 같다. 많이 가진 이가 부족한 이들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일 게다. 아무리 그 능력이 출중하여도 자기 관리가 없이는 그것은 손쉽게 퇴화하고 말 것이기에.
만물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분의 창조사업에 따르려 변화되는 노력을 실제로 해야만 한다.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주님, 주님!”이라고 기도만 한다면, 어찌 변화가? 지금의 모습에 쉽게 안주하지 말고, 실천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게다. 이처럼 꾸준히 변신의 노력으로, 좋은 밭에 뿌린 씨앗의 비유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사실 우리는 각자 받은 재능에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는, 그것을 귀찮은 짐, 또는 두려운 과제로 여길 때가 더러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이끌도록 부여하신 것들이 언제나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에. 그럴 때 우리는 움츠리고 도망가거나,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낄게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한 삶의 출발은, 부여받은 그 재능을 감사히 여기면서 갈고 닦는 데 있으리라. 이렇게 작은 일에 성실한 이는 큰일도 그러하다.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의 어떤 작은 일도 갑자기 일어나지는 않는다. ‘천 길 높은 둑은 개미나 땅강아지의 구멍으로 무너진다.’ 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아무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에 내던져 지리라. 큰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작고 사소한 것에 의해 모여 일어나리라. 따라서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매일의 작은 일에 성실할 때, 우리의 신앙도 점점 성숙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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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탈렌트의 비유는 저에게 매우 강력합니다. 저에게 늘 이 비유로 말씀하시던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탈렌트를 주실 때는 개인의 명의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그 탈렌트에 대해서 너에게 결산을 요구하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2009년 겨울에 받은 편지 한 통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봅니다.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것을 감추는 것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십오 년이 지난 편지를 왜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 말씀이 지금도 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종들에게 맡긴 탈렌트가 그 종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탈렌트는 묻어 두거나 활용을 하거나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탈렌트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탈렌트를 가진 종의 것을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는 것은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불의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은 실제로, 가꿀 때에 자라납니다. 은총을 부어 주셔도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지 않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은총을 잘 가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같은 분의 말씀을 인용하면,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탈렌트를 내어놓을 때 은총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라고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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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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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르게 탈렌트를 나누어 줍니다.
결과에 가서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와
두 탈렌트를 받은 이가
똑같은 말을 듣는 것을 보면
능력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자의 능력 안에서
그 만큼의 결실을 맺는 것이
즉 다섯에서 다섯을
둘에서 둘을 맺는 것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는
주인의 말입니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들은 종으로서 할 일을 다한 것이지만
성실함의 결과는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아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즉 성실함은 피조물인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유한함의 차이는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그것이 종류이던 크기이던
그 탈렌트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능력만큼
충실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충실함을 위해서
나를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섯 개를 가졌는지
두 개를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두 개 가진 사람이 세 개를 버는 것을
하느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즉 우리 각자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 평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자신을 과소 평가 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과소 평가한 나머지
나는 해도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영향을 주었지만
주인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를 게으르다고 말합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면
주인은 그에게 다섯 개도,
두 개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가 한 탈렌트를 더 벌지 못했어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소 평가한 나머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성실한 다른 종들과 비교해서
게으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시도한다는 것,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더 나아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나의 한계도 경험하고
완급 조절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도, 그 시작은
성실함의 결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많고 적음을
스스로 판단하기에 앞서
시작해 볼 수 있는 용기를 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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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이 하루는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탈렌트 비유를 묵상하면서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우울한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면서, 주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에게는 저리 좋은 탈렌트를 주셨으면서, 어찌 제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나요?
백번 천번 생각해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어찌 이리 사람을 차별대우 하시나요?” 하면서 많이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탈렌트를 분명히 주셨다는 것을. 관건은 우리 인간 측의 노력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주셨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고, 캐내고 갈고 닦고, 엎그레이드 시키려는 우리 측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늦었지만 주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제게 선물로 주신 재능, 장점, 오랜 기간 쌓아올린 전문성, 스펙 등도 탈렌트이겠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있는 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이 둘도 없는 탈렌트입니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이 좋은 탈렌트입니다.
조금 나이든 중년의 원숙함과 균형감각도 좋은 탈렌트입니다.
크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노년의 지혜로움도 멋진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새 아침과 24시간이라는 하루가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하루 온종일 빈둥빈둥 영양가 제로의 하루를 보낸 날이 있습니다.
하루의 끝자락에 서면 무의미한 하루를 허송세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고 우울해집니다.
반대로 하루 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헌신한 날이 있습니다.
몸은 파김치처럼 녹초가 되고 너무나 고되어 자동으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마음은 뿌듯해지고 영혼은 맑아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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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탈렌트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맡겼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액수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결코 적은 액수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 탈렌트는 엄청난 돈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탈렌트를 이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이처럼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주인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사는 모습이다. “오랜 뒤에”(19절)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된다. 첫째 종은 자신감에 차서 주인에게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주인은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절). 이 말씀은 온갖 축복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두 탈렌트를 더 벌은 사람에게도 같은 칭찬과 함께 영원한 보상으로 인도되었다.
한 탈렌트를 받아 땅에 숨긴 종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다. 게으른 종은 묻어두었던 탈렌트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준다.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하면서 종을 꾸짖은 다음,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 한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선물들도 받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가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물들마저 빼앗긴다. 자기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빼앗겨도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된다. 그때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30절) 선언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내가 받은 탈렌트를 늘리려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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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나의 능력이 얼마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실까?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개발하거나 성장시키지 않고 게으르게 살다가 온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탈렌트는 ‘재능’입니다.
나의 재능은 어느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재능은 내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에게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자아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먼저
믿어주었고 내가 그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습니다.
사람은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유지할 능력도 잃게 됩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진범인 이춘재 씨가 잡힐 때까지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윤성여 씨입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보상금을 도박으로 다 날렸습니다.
혼자라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성여 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당신 이 사건 때문에 많은 경찰 간부들이 해직을 당하던 터라 경찰들도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여 씨를 고문하여 자신들이 써 놓은 대로 읽고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특히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을 때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백을 시키고 무기징역을 받게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그런 죄질로 들어온 사람은 집단 구타와 따돌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세상에 남겨진 그는 살 힘도 잃었습니다.
사는 것도 누군가가 기대해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 나타납니다. 박종덕 교정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범죄 자체를 전면으로 그것도 일관되고 부정하는 수용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며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너의 인내심이다.”
그는 그렇게 감옥에서 20년을 버텼고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윤성여 씨는 박종덕 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감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더 힘들다고 합니다. 친척들도 왜 왔느냐는 듯이 그를 문전박대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여 씨 때문에 친척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박종덕 씨의 믿음과 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만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박지성 씨도 좌절에 빠져있을 때 큰 선수가 될 것이라는 히딩크의 그 한 마디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믿으려 합니다.
하지만 잘 믿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이들을 믿었다가는 오히려 삶을 망치고 맙니다.
뱀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뱀과 같이 타인을 먹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마이클 타이슨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감옥에서 살다시피 한 그의 젊은 시절에 그를 알아보고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 코치가 ‘커스 다마토’였습니다. 타이슨은 말합니다.
“커스는 나 자신을 믿게끔 도와주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수건 오타구이건 말이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을 믿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의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커스 다마토가 죽고 ‘돈 킹’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 킹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 킹은 타이슨을 그저 자신의 돈벌이로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타이슨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범죄로 감옥 생활을 하고 링은 즐기는 곳이 아닌 물어뜯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망해서 많이 번 돈을 다 잃고 파산신청까지 하게 됩니다.
커스 다마토도 자신을 믿게 했고 돈 킹도 자신을 믿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 부족합니다.
자신을 믿게 만든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믿음을 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탈렌트를 가진 자는 그 탈렌트에 다른 탈렌트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일하게 되면 나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분명 누군가 한 명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를 어떻게 단련시키는지
보면 됩니다.
돈 킹은 타이슨을 방탕한 생활로 길들였습니다.
그러나 커스 다마토는 그를 혹독한 훈련으로 길들였습니다.
사람은 방탕해지면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게으름’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나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스 다마토는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잠재적인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마음 깊이 스스로에 다한 강한 믿음을 가진다.
스스로를 믿을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믿은 후에 육체적 훈련은 쉽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옥훈련을 거칠 힘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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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탈렌트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4-30)”
1) ‘탈렌트’를 ‘주님의 것, 주님께서 주신 은총,
주님의 선물’이라는 생각만 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탈렌트를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즉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인데, 내가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탈렌트를 돌려받지 않았고, 종들이 탈렌트로 돈벌이를 해서 더 벌어들인 탈렌트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종들은 처음에 받은 탈렌트와 더 벌어들인 탈렌트를 모두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준 것은, 자신이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기 위해서”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21절, 23절).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다면, 그것은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받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비유를 보면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준 탈렌트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갑니다(28절).
<돌려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주인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종을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씨’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그 씨를 심고 가꾸고 잘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도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2)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에 대해서, 비유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탈렌트의 차이는 ‘은총의 양의 차이’도 아니고, ‘능력의 차이’도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그 다양성은 보통 ‘옹기장이와 진흙’으로 설명됩니다.
“옹기장이가 제 손에 있는 진흙을 제 마음대로 빚듯,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께서는 당신 결정에 따라 인간에게 되갚으신다(집회 33,13).”
3)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한 말,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은다.” 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빼앗아 가기만 한다.” 라는 비난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바치는 것이 많은데도 받는 은총이 별로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주인이 세 번째 종을 꾸짖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큰 죄에 속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우리는 최소한 악행을 행하지는 않았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이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 큰 죄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또 이웃들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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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탈렌트란 재능, 소질, 능력 등을 가리키지요. 각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만큼 주셨으니 저 사람과 내가 서로 다른 것을 받았다한들 누구에게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차고 넘치도록 탈렌트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나에게 주신 의도와 뜻을 헤아리며 거기에 맞게 내가 받은 탈렌트를 최선을 다해 활용하면 되지요. 왜 저 사람에게는 저걸 주시고 나한테는 이걸 주시느냐고, 왜 저 사람은 저 만큼이나 주시고 나한테는 이만큼 밖에 안 주시냐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만큼 알아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받고 싶은 만큼 못 받았다고 투덜거려봐야, 남과 나의 탈렌트를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비교해봐야 나 자신이 더 불행해보이고 비참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열심히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그냥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 기쁘게 활용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겁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탈렌트를 왜 맡겼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돈만 밝히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집사도 아니고 그저 ‘종’에 불과한 비천한 이들에게 그렇게 큰 돈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긴 목적은 그저 그것을 더 많은 ‘양’으로 불리는게 아닙니다. 종들이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불리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탈렌트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원금에 큰 손실이 생기더라도 주인은 종들을 질책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인은 그저 종들이 각자 받은 탈렌트를 최선을 다해 활용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주인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어들인 종과 두 탈렌트를 더 벌어들인 종을 똑같이 칭찬합니다. 종들이 자기가 맡긴 소명에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또한 그 기쁨이 그저 자기 혼자만의 것이 되지 않기를, 자기 종들이 자기와 동등한 수준의 기쁨을 함께 느끼는 동반자이자 조력자로 성장하기를 바라지요. 그런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종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고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반면 주인의 의도를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종은 주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을 향한 주인의 인정과 사랑의 마음까지도 물리적인 ‘수량’으로만 가늠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적은 양의 탈렌트를 준 게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거라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오해하게 되지요. 그렇게 주인을 오해하고 미워하다보니 주인이 맡기고 간 탈렌트도 꼴도 보기 싫어져 땅 속 깊이 묻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오늘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비유의 핵심은 종들 각자가 받은 탈렌트의 ‘수량’이 아니라, 종들이 믿는 그대로 보상을 내려주는 주인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받아서 누리는 탈렌트는 그 종류도 양도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주시는대로 받아서 그분께서 원하시는대로 잘 쓸 뿐이지요. 그러나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주인이신 하느님을 다시 만나 받게 될 참된 보상은 그분께서 주신 탈렌트를 열심히 활용하는 만큼, 그분께서 맡기신 소명에 성실히 임하는 만큼 커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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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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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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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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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현재 겪는 고난에서 자유하는 삶
<2024.8.31>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6:32~48절)
❝현재 겪는 고난에서 자유하는 삶❞
❚ 하나님은 고난의 삶을 통해 의로운 자들을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 고난이 임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 망령된 말들로 인하여 임하게 됩니다(32~33절).
시인은 민수기 20:1~13의 사건을 회상합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므리바에 다다랐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였고, 결국 모세까지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습니다. 망령된 말은 ‘생각 없이 경솔하게 내뱉은 말’입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켜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석을 내리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는 망령된 말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를 책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 어린 심정까지 담긴 불평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떠난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다시 담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경솔한 말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시험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죄 되지 못하고 내뱉은 한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상처를 안겨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입을 잘 지키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술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망한다...”(잠 13:3,새번역)는 말씀을 기억하므로 우리는 말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신중을 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더러운 행위로 인하여 임하게 됩니다(34~42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민족들을 ‘말씀하신 대로...’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방 나라들과 섞였다는 말은 가나안 족속과 통혼했다는 말인데, 그들의 우상 선택은 복이 아니라 올무가 되었습니다(34~36절). 그들은 또한 악귀들에게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등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은 더러워지고, 그런 행동으로 음란하게 되었습니다(37~39절). 그들의 이와같은 더러운 행위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40~42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을 섬기는 행위는 올무가 되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으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문화와 접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긴장감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통해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유혹을 극명하게 분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까닭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는 진노의 팔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긍휼도 선택이며, 책벌도 전적인 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죄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교묘한 죄악을 통하여 임하게 됩니다(43~48절).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번 건져 주셨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신들의 죄악으로 더욱 비참하게 되었습니다(43절). 그러나 그들이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마다, 그들이 받는 고난을 살펴 주셨고, 그들과 맺으신 그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그 크신 사랑으로 뜻을 돌이키시어 사로잡아 간 자들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44~46절). 하나님은 성도의 고통 속에서의 간구를 외면치 않으시고, 어느 경우이든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강조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인은 이제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절). 이는 이스라엘 포로기 70년 동안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곁과 속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결코 누리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를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동기와 행위를 가진 자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교묘하게 거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사들을 세워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음에도 백성들은 거듭 우상숭배를 통해 죄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들으시고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자를 배반하거나 이용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간사함을 버리고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사방이 욱여쌈을 당한 것처럼 막막한 현실이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므로 모든 상황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현재 겪는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는 그래서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6:32~4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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