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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에 걸쳐 『월간조선』에 신동아그룹 기사가 나가자 전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 측으로부터 기자
에게 연락이 왔다. 억울한 것으로 치면 동아그룹이 훨씬 더하니 만나서 얘기를 좀 들어보라는 것이었
다. 데스크는 즉석에서 OK!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원석이라면 모든 언론사와 잡지사들이 노리는
최고의 취재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이 나라 최고의 글래머 여배우와 최고의 여가수와 미스
코리아 출신 아나운서를 아내로 거느렸던 사나이이자, 4000㎞가 넘는 시리아 대수로공사를 성공리에
완수하여 사하라사막을 초원으로 변모시킨 기적의 사나이 아니던가.
기자가 최원석을 만난 것은 2009년 11월 4일, 청담동 소재 DIMA의 조그만 사무실에서였다. DIMA는
최원석이 설립한 동아방송예술대학 산하 학교기업이었다. 한때 재계서열 10위의 재벌 총수가 22개
계열사를 다 빼앗긴 뒤, 겨우 자신이 설립한 대학 산하 학교기업 한 귀퉁이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소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원석은 23세에 부친이 설립한 동아콘크리트 사장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뛰
어들었다. 30대에는 그룹의 주력기업인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을 떠맡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
다. 40대에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라는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낙찰받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
여 세기적 난공사를 계약기간 이내에 흑자로 완공시킴으로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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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은 김대중이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98년 5월,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천억 원 대의
사재도 몰수당했다. 이후 10년에 걸쳐 40여 건의 민형사상 재판에 휘말리면서 최원석의 인생은 산산
조각이 났다. 수십 번의 가택수색과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법률에 정해져 있는 일사부재리 원칙도
무시당한 채 동일 죄목으로 일곱 번이나 법정에 섰다. 대표적인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힌 동아건설은
자산 6조 2천억 원, 부채 4조 9천억 원에 불과했다.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회사를 부실기업으로 처리
한 김대중, 그는 분명 거액의 떡고물을 노리고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이처럼 무리한 짓을 저질렀을
터였다. 민주화 투쟁의 최종 목적이었다.
김대중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서울은행장이 최원석을 찾았다. 정권의 뜻이라면서, 당신이 회장직에
서 물러나고 개인재산을 내놓으면 그룹은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그처럼 억지춘향으로 이
나라에서 대표적으로 건실한 동아그룹을 강탈했다. 권력의 힘을 잘 아는 최원석은 선선히 회장 자리
를 내놓았다. 그러자 모든 언론이 ‘최원석에게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개인재산을 몰수하기로 했
다’고 보도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재판도 없이 사유재산을 몰수한 것이다. 그리
하여 건실한 기업인 최원석은 하루아침에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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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최원석에 대한 검찰 수사기록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최원석이 회장직
에서 물러나 개인재산을 다 내놓았을 때 동아그룹의 재무상황은 매우 건실했다. 검토를 도운 회계사
도 동아그룹의 재무구조가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있던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며 매우 놀라워했다. 그
가운데 검찰이 대표적 부실기업이라고 발표한 동아건설의 분식회계 총액과 법정이자 및 협조융자금
등을 모두 반영해도 부채보다 자산이 5500여억 원이나 더 많았다. 김대중이 처음부터 동아그룹을 노
리고 억지로 때려잡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리고는 당초 약속과 달리 여러 가지 누명을 씌워 최원
석을 구속했다. 김대중은 개인적으로 최원석의 선산까지 빼앗아갔다.
동아건설이 청산절차에 들어갔을 때였다. 재무실태를 조사한 안건회계법인 대표가 청와대 고위 인사
에게 ‘왜 건실한 기업을 청산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 인사는 ‘동아건설은 회계 차원의 문제가 아니
다’라고 대답했다. 의도적인 기업 살인이라는 자백이었다. 삼일회계법인이 실사했을 때도 동아건설
은 청산가치보다 존속가치가 높았지만 김대중은 처음부터 실사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상한 점
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일회계법인의 실사가 끝나기도 전에 법원은 이미 동아건설의 파산선고를
결정해놓고 있었다. 최원석은 상소마저 포기했다. 상급법원도 이미 각본이 다 짜여 있을 게 불을 보
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재벌 탈취계획을 수립해놓았고, 그 중에서 동아그룹을 첫손가락으로
꼽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정치를 해오면서 김대중에게는 신세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동아그룹의 22개
계열사는 그들에게 나눠줄 최적의 먹잇감이었다. 최원석은 난잡한 여자관계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해줄 인맥이 가장 적다는 계산에서였다. 첫 번째 매각대상은 동아증권이었다.
동아증권은 김대중이 권력을 잡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세종기술투자라는 급조된 회사가 단돈 21억 원
에 인수했다. 세종기술투자 사장 김형진은 김대중이 신세를 갚아야 할 1순위 인물이었다. 5개월 뒤,
김형진은 520억 원을 받고 동아증권을 팔아넘겼다. 1999년에는 멀쩡한 동아생명에 공적자금 1조 100
0억 원을 투입하더니, 두 달 뒤 금호그룹에 단돈 1천억 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김대중은 입만 열면 자신이 경제를 가장 잘 아는 정치인이라고 떠벌였다. 그가 집권했을 때 동아건설
은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하고 있는 세계적인 우량기업이었다.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지도자라면
그런 기업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동아건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국제적 공신력이 훼손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대한민국의 대외신인도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과 하수인들
의 주머니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한통운도 사전 각본대로 리비아 대수로공사 하자보수 기
간이 끝난 2008년 금호아시아나그룹을 거쳐 CJ로 넘어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김대중의 후광으로
얼마의 마진을 남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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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김영삼이 IMF사태를 불러왔고 김대중이 이를 극복했다고 곡해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규모
는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그처럼 쉽게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IMF사태는 기업인들이 사세확장 붐을
타고 무리하게 단기 투기자본을 유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때마침 국제경기 침체로 기업의 유동성 부
족사태가 닥쳤고, 이로 인해 적기에 차입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되어 IMF로부터 고리채를 빌려다 급한
불을 껐던 것이다. 우리 공직자들은 IMF사태를 불러올 만큼 배포가 두둑하지도 못하고 IMF사태를 극
복할 만큼 유능하지도 못하다. IMF사태를 초래한 것도 해결한 것도 결국은 기업인들이었다. 김대중
은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자랑했다. 나는 김대중의 이 말에 100% 공감한
다. 다만 김대중은 ‘나라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대통령’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어제 종일토록 내린 봄비가 농사에 유익한 단비라니 다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더욱 싱거런 초록이 주변에 가득인 길을 걸으며 주말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낮동안 햇빛이 나면 지난주 완주 하였던 영장산 - 태제고개길을 다시 걸으리라 벼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