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 조선처럼 고려왕조실록을 편찬했었다. 조선 왕실은 개경에 있던 고려왕조실록을 한양으로 옮
겨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에 보관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춘추관에 불을 질러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고려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조선조에서 편찬된 『고려사』 목판본이 부
산 동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사』는 고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을 기전체
로 정리한 서책으로 모두 139권 75책으로 되어 있으며, 세종대왕의 명으로 재위 28년(1446) 편찬에
착수하여 문종 원년(1451)에 완간되었다. 여기 소개하는 고려사는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고려
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려왕조실록은 고려 제8대 현종 때 처음 편찬되었다. 이에 앞서 1011년 거란의 제2차 침입으로 왕궁
이 불타면서 전임 임금들의 사초(史草)도 모두 소실되었는데,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전국에 흩어
져 있던 사료들을 모아 제1대 태조부터 제7대 목종까지 『칠대실록』을 편찬했던 것이다. 실록 편찬
책임자인 황주량은 젊은 사관들을 동원하여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사료를 모으고 질의응답 형
식으로 원로들의 기억을 짜내어 사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원로들은 대부분 제2대 혜종 제거와 관련
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공한 사료나 진술 또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칠대실록』을 토대로 한 『고려사』 역시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
고려는 918년 제1대 태조 왕건(877~943)에 의해 건국되어 제34대 공양왕(1345~1394)이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474년간 존속한 왕씨의 나라였다. 조선조에서 편찬한 『고려사』가 있기는 하
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권을 찬탈한 조선의 시각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공정한 기록이라고 볼 수 없
다. 우리가 고려를 미개한 삼국시대와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조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나라 정도
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모두가 『고려사』의 이러한 역사 왜곡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
인 몽골제국과 당당히 맞서기도 하며 474년을 버틴 나라라면 분명 우리가 모르는 강점이 있었을 것
이다. 지금까지 무신정권, 몽골 침입, 팔만대장경 조판 등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고려사를 처음부
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제1대 태조실록」
1. 고려 건국
금년 3월 「소설 진성여왕」에서 잠시 살펴봤듯이, 왕건은 아버지가 송악의 호족이었고 왕건 자신은
궁예의 신하였다는 사실 외에 조상이나 출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민담으로 전해오는 탄생설
화가 있기는 하지만, 동서고금의 어느 건국임금이나 다 가지고 있는 허황한 내용이라 소개는 생략한
다. 정인지가 주도하여 편찬한 『고려사』에는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었다.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넓적했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딱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
을 맡았던 최수종의 용모, 음성, 동작 그대로다.
왕건이 문경새재 이북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궁예의 신하로 들어가면서 역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견훤은 이미 후백제를 건국하여 호남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신라의 지배력은 겨우 금성 일원에만
미치고 있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후삼국시대다. 후삼국시대는 견훤이 후백제를 수립한 892년부터 왕
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44년간 지속되었다. 신라가 기울고 궁예와 왕건이 각각 태봉과 고
려를 세우는 과정은 「소설 진성여왕」에서 간략하게 소개했으므로 중복을 피해 소개를 생략한다.
견훤은 정규군, 궁예는 지방 호족들의 사병과 각지에서 끌어모은 초적(草賊)들을 군대로 삼았기 때문
에 아무래도 후백제가 더 강하고 정연했다. 그러나 궁예는 왕건이라는 출중한 장수 덕분에 후백제의
영역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913년, ‘굴러온 돌’ 왕건이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궁예 휘하의 제2인자인 파진찬 겸 시중에 오르
자 궁예의 ‘박힌 돌’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궁예 자신도 왕건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고 있는 데
위협을 느끼고 그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자 왕건은 경계를 강화했다. 그때 배현경‧복지겸‧
신숭겸‧홍유 등 궁예의 핵심측근 네 명이 은밀하게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강력하게 요청
했다. 왕건은 숙고 끝에 군사들을 이끌고 왕성으로 진격했다. 궁예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뒷문으로
도망쳐 강원도 평강지역을 전전하던 중, 허기를 못 이겨 밀서리를 해먹다가 주인에게 걸려 살해되었
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왕건과 이별주를 나눠 마신 뒤 폼 나게 목이 잘리는 장면은 시청자들
을 위한 눈요기 거리다.
918년 6월 15일, 왕건(877~943. 재위 918~943)은 고려 건국을 선포했다. 고구려를 잇는다는 의미의
국명이었다. 고구려 때도 이미 국명을 고려로 줄여서 부르기도 했었다. 고려는 고을을 뜻하는 고구려
語 구루를 한자로 표기한 말이다. 중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도 고구려가 고려로 표기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쓴 여러 사서에도 고구려를 고려로, 고구려 사람들을 고려인으로 표기했는데, 이때 고려
라는 국명과 고려인이라는 말이 비단길을 통해 페르시아에 알려지면서 그쪽 사람들이 고려를 코리아
로, 고려인을 코리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웅주(현 공주)의 성주로 있던 이흔암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웅주를 버리고 철원으
로 돌아와 칩거했다. 그는 궁예의 충복이었는데, 새카만 후배인 왕건 밑에서 신하로 지낼 수는 없다
는 뜻이었다. 덕분에 견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요충지인 웅주를 거저 얻
었다. 왕건은 이흔암을 역모로 몰아 저자에서 참수했다. 이 일로 철원 일대에서 왕건에 대한 거부감
이 확산되자 왕건은 919년 1월 송도로 천도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먹거리를 찾아 다니던 우리조상들의 생계 수단은 많이 걷고 움직인 활동 이었음에도 단명 했던것은
약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탓 이었습니다. 모든게 풍족한 현대인은 자동화 생활방식으로 걷는게 줄어 들고 자연식의 급감등이 만연 되고 있지만 약으로 장수를 누리는 듯 합니다.걷는 것 만큼 좋은 운동이 없는것 같습니다. 활기찬 한주 시작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