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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44개국중 16개국 여성 지도자… 평균 49세 ‘젊은 바람’
유럽 정치 휩쓰는 ‘女風’
유럽 지도자들 ‘여성 시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권력 전면
낙태-동성애 등 해결 숙제 쌓여
《유럽 44개국 중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수반이 여성인 나라가 15개국이다. 이달 총리 취임이 예상되는 이탈리아를 포함하면 16개국으로 전체 유럽 국가의 36%에 이른다. 역사상 가장 많은 여성 지도자가 활약하는 유럽은 ‘여성 시대’다.》
유럽 정상 3명중 1명은 여성
유럽은 지금 ‘여성 시대’다. 6일 현재 전체 유럽 국가 44개국 중 여성 지도자를 현직 대통령이나 총리로 두고 있는 나라는 총 15곳이다. 이탈리아 총선에서 승리하고 이달 중 총리 취임이 예상되는 극우정당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 조르자 멜로니를 포함하면 여성 지도자를 둔 유럽 국가는 총 16곳이다. 전체 유럽 국가의 36%에 달한다. 유럽 역사상 최대 수치다. 몰도바에서는 현직 대통령과 총리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6개국에서 17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국정을 이끌고 있거나 이끌 예정인 셈이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49.2세로 50세를 넘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상 기후 현상까지 겹치면서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는 유럽 각국에서 여성 지도자가 속속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권력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 유럽 국가 36% 여성 지도자… 역대 최대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실시된 이탈리아 총선에서 FdI가 이끄는 우파연합이 출구조사 결과 41∼45%를 확보해 중도좌파 연합에 압승을 거뒀다. 이로써 멜로니 FdI 대표가 차기 총리에 유력한 상황이 됐다. 각 정당은 7월 최다 득표를 한 정당에서 총리 추천권을 갖기로 합의한 바 있다. 멜로니 대표가 총리에 취임할 경우 이탈리아 사상 최초 여성 총리이자 1922년 독재자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집권한 첫 극우 성향 지도자가 된다. 저성장과 고물가에 지친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를 해결할 대안으로 ‘여자 무솔리니’ ‘유럽에서 가장 강한 여성’으로 불리는 멜로니를 선택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서유럽 국가뿐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도 여성 총리가 위기에 빠진 나라를 이끌고 있다.
유럽연합(EU) 수뇌부도 여성들이 휩쓸고 있다. 1월 EU의 입법부인 유럽의회 신임 의장으로 선출된 몰타 출신 로베르타 메촐라(43)는 역대 최연소이자 20년 만에 선출된 여성 의장이다. 여기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회 위원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 EU 최고위직 3인방 모두 여성이다.
최근 들어 여성 지도자들의 약진은 더욱 두드러진다. 멜로니 대표에 앞서 지난달 6일에는 영국에서 리즈 트러스 총리가 당선됐다. 5월 프랑스에서는 30년 만에 여성 총리인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가 취임했다. 같은 달 헝가리에서는 노바크 커털린 대통령이 당선됐다.
이들은 각종 ‘최초’ ‘최연소’ 호칭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019년부터 핀란드 총리로 재임하고 있는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1985년생으로 핀란드의 역대 최연소 국가 수장이다. 노바크 대통령을 비롯해 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 그리스 대통령, 주자나 차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 마이아 산두 몰도바 대통령 등은 모두 자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다.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스웨덴 총리와 아나 브르나비치 세르비아 총리도 ‘최초 여성 총리’ 수식어를 갖고 있다. 브르나비치 총리는 세르비아 사상 첫 성소수자 여성 총리다.
○ 총체적 난국 속 구원투수로 등판
유럽은 최근 몇 년간 총체적 복합 위기를 겪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러시아발(發) 에너지 위기, 마이너스 성장과 고물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올여름 이상 고온 현상이나 폭우 피해까지 겹쳤다.
유럽 여성 지도자들은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등장했다. 현직 유럽 여성 국가 지도자 17명 중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인 2019년 12월 이후 취임한 사람은 12명으로 3분의 2에 달한다. 멜로니 대표는 8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9.0% 상승하는 등 민생고에 지친 이탈리아 유권자들에게 선택을 받았으며 트러스 총리도 1980년대 경제 위기를 극복한 마거릿 대처 전 총리와 같은 ‘철의 여인’ 이미지를 내세워 당선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발트 3국 여성 지도자들의 위기 대응 능력도 관심을 끌고 있다.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반(反)러시아 전선을 이끄는 핵심 인물로 꼽힌다. 칼라스 총리는 지난해부터 러시아가 독일로 향하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을 무기화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남성 정치 지도자들은 때때로 표 계산에만 밝으며 권력을 탐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지곤 하는데, 위기 상황에서는 이 같은 현실에 지친 유권자들이 여성 지도자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유로뉴스는 “여성 지도자들은 부드러운 이미지에 힘입어 위기 국면에서 등판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미국 기업 리더십 컨설턴트 회사인 ‘젱거포크맨’의 잭 젱거 최고경영자(CEO)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기고에서 “여성 지도자가 국가나 조직의 구성원이 갖는 두려움에 대해 보다 많이 공감하고, 구성원들이 여성 리더가 내놓는 대책에 신뢰를 느끼는 경향이 많아 위기에서 여성 지도자가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프리야 가라키파티 영국 리버풀대 교수는 2020년 6월 세계 194개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 등 피해를 분석했는데 여성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라키파티 교수는 “여성 지도자들이 보다 예방적이고 정제된 정책을 편 결과”라고 분석했다.
○ 부드러움, 우파 부정적 이미지 상쇄
최근 급부상한 여성 지도자들은 우파 정당 출신 비율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로뉴스는 “유럽의 여성 지도자들은 발칸 반도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우파 출신이 대다수”라며 과거에도 영국의 대처와 테리사 메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에 이르기까지 주요 여성 지도자들은 모두 우파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근에도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2019년 12월 이후 취임한 유럽의 여성 국가 지도자 12명 가운데 8명이 우파 정당 출신이다. 극우정당인 FdI를 이끄는 멜로니 대표, 트러스 영국 총리, 노바크 헝가리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몰도바에서는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중도 우파 정당 출신으로 정부 실권을 쥐고 있다. 메촐라 유럽의회 의장을 비롯해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라가르드 ECB 총재 등 EU 여성 지도자 3명 모두 우파 정당에 적을 두고 있다. 차기 프랑스 대선 유력 후보이자 2017년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결선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프랑스 대표 여성 정치인 마린 르펜도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 소속이다.
유로뉴스는 “여성 지도자들이 남성 지도자들보다 진솔하고 솔직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의 이미지가 극우 정당이 갖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함으로써 선거에 이길 가능성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위기에 빠진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극우 바람’이 거세지는 가운데 여성 지도자들이 갖는 부드러운 이미지가 유권자들이 우파 정당에 투표할 때 생길 수 있는 ‘도덕적 부채감’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지도자들이 우파 정당에 대체로 부정적인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얻는 데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다. 영국 랭커스터대의 루스 워닥 교수는 NYT에 “우파 정당은 보통 젠더 이슈를 등한시하기 마련이지만 최근 들어 우파 정당에 중요한 강령이 된 ‘반이슬람’ ‘반이민’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여성 인권이라는 이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이러한 행태가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얻는 데 효과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우파 정당은 히잡(머리와 상반신 윗부분을 가리는 이슬람 전통 복장)을 오랜 기간 이슬람 문화권에 팽배한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비판해 왔으며, 최근에는 유럽 내 이슬람 집단 거주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 및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를 적극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멜로니 대표는 총선 전 아프리카 이주민이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는 영상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가 논란이 되자 삭제했다. 트러스 총리는 반이민 정서를 동력으로 한 2016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를 앞장서 지지해 인기를 끌었다.
○ 여성 지도자들 향한 기대와 우려
유럽에 ‘여성 시대’가 도래하면서 여성 지도자들이 ‘유리 천장’을 혁파하고 낙태권이나 동성애 등 소수자 인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이란 기대도 커지고 있다. 안데르손 스웨덴 총리는 내각을 남성 11명, 여성 12명으로 구성해 남녀 비율을 맞췄다. 또한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트랜스젠더 여성인 리나 악셀손 킬블롬을 교육장관으로 임명해 이목을 끌었다. 트러스 총리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재무장관과 외교장관에 흑인을 임명했다.
하지만 우파 출신 여성 정치인의 도약이 두드러지면서 이들이 특정 계층이나 인종에 대한 혐오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극우 정당 출신인 멜로니 대표의 총리 당선이 확실시되자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낙태권 옹호 시위가 벌어지는 등 벌써부터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멜로니 대표는 총선 과정에서 낙태권 축소를 공약했고, 여성 할당제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수차례 피력했다.
이탈리아 총선 이후인 지난달 28일 로마에서 열린 낙태권 옹호 시위에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다. 낙태권 축소를 공약으로 내건 극우 성향의 조르자 멜로니 대표의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자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권리가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로마=AP 뉴시스
미국 정치 전문 일간 폴리티코는 “멜로니는 정치 커리어를 쌓으면서 자신이 미혼모이자 워킹맘으로서 받는 차별과 불합리를 앞세워 왔지만 정작 그의 당선이 이탈리아 여성 인권 문제 해결에 기여하거나 사회 참여 기회를 확대할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다”고 지적했다.
노바크 헝가리 대통령 역시 동성애에 공식적으로 반대해 논란이 됐으며, 메촐라 유럽의회 의장도 “낙태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여성계의 비판을 받았다.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지도자에 비해 더욱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된다는 우려도 있다. 8월 마린 핀란드 총리가 파티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유출됐을 당시 “총리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란 비판과 함께 “개인 시간에 유흥을 즐긴 것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는 옹호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전 세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마린 총리에 대한 연대의 뜻을 밝히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도 자신이 춤추는 영상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마린 총리를 지지했다.
미국 경제매체인 포브스는 “음주와 관련해 유독 여성 정치인에게 가혹한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며 “마린 총리가 파티 동영상 유출로 자질 논란에 휩싸인 것 역시 이 같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카이로=강성휘 특파원, 파리=조은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