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11년(642. 백제 의자왕 2년) 8월, 의자왕은 윤충 장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의 대
야성을 치도록 명했다. 그 동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내내 시달려왔다. 백제는 신라의 서
쪽 변경을,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 영토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해 7월,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탈취한 데 이어,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와 당나라 간의 교역 창구인 서해안
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나라와 모든 교유가 차단될 위기에 처한 신라는 사력을 다해 겨우 당항성을
지켜냈다. 대야성전투는 신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낙동강 교두보를 빼앗음으로써 신라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한 의자왕의 승부수였다.
백제 장군 윤충은 신라 장수와 내통한 끝에 어렵잖게 대야성을 점령했다. 이 대목에서 고려 때 김부
식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이 엇갈린다. 먼저 「백제 의자왕 본기」에는 성이 함락되자 성주 김품
석이 온 가족을 데리고 나와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윤충은 김품석과 그의 처 고타소를 포함한 일
가족의 목을 벤 뒤 품석의 목을 신라의 수도인 금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죽죽열
전」※은 같은 장면을 두고 다르게 쓰고 있다. 즉, 백제군이 성문을 열고 물밀듯이 침공해오자 김품
석은 패배를 직감하고 사랑하는 아내 고타소와 자식들을 모조리 죽인 뒤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고 되어 있다. 다른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후자 쪽이 맞는 것 같다. 김품석 정도 되는 화랑 출신 장
수가 항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 『삼국사기』에 「죽죽열전」을 따로 두게 된 이유는 대야성전투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사지(舍知) 죽죽의 용맹함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사지 벼슬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0관등이다.
1만 백제군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대야성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함락된 데는 어처구니없게
도 치정사건이 얽혀 있었다. 성주 김품석은 대야성을 관할하는 대량주 도독(제4관등)보다 높은 이찬
(제2관등) 벼슬이었는데, 그의 막객(幕客) 가운데 검일이란 장수가 있었다. 막객이란 주인을 따라다
니며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는 최측근 호위무사를 말한다. 문제는 검일의 처가 너무 아름다운 데 있었
다. 김품석은 주인의 금도를 지키지 못하고 그예 검일의 처를 빼앗아버렸다. 품계로 보나 왕실의 전
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김품석의 위상으로 보나 감히 항변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인 검일은 절치부심
벼르고 있다가,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오자 첩자와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어주
어 성이 쉽게 함락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품석도 검일도, 자신들의 사감(私憾)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
꾸는 도화선이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을 터.
김품석의 아내 고타소는 김춘추(훗날 제29대 태종무열왕)와 본부인 보량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었
다.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매우 현명하고 용맹한 장군이었는데, 그만 춘정을 다스리지 못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고타소 또한 신라 제일의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는데도 말이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식음을 전폐한 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안에 앉아서 며칠을 보
냈다. 그 동안 김춘추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이윽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찾아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해 함께 백제를 치겠다고 진
언하여 윤허를 받았다. 김춘추의 한을 익히 알고 있는 선덕여왕은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
만 김춘추는 단출하게 길을 나섰다.
고구려도 대야성전투를 보고받고 미구에 김춘추가 찾아와 원병을 요청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먼저 보장왕(고구려 제28대 마지막 왕)을 알현하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 뒤 함께 백제를
치자고 제의했다. 보장왕은 김춘추를 심심하게 위로한 뒤 그렇게 하겠으니 연개소문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협의가 되어 있었던 듯 연개소문도 김춘추의 제의에 순순히 동의했다. 단,
‘신라 진흥왕 9년(548)에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을 돌려주면’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김춘추
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하옥시킨 뒤 며칠 내로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춘추는 고구려 大臣 선도해의 중재로 ‘귀국 즉시 왕의 윤허를 받아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겠다’는
각서를 쓰고 간신히 풀려났다.
이후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왜국과 당나라를 다니며 외교전을 펼친 끝에, 자신
이 보위(태종무열왕. 재위 654~661)에 오른 뒤인 재위 7년(660) 당나라의 원병과 합세하여 기어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660년 7월 18일,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에 피신해 있던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막을 내렸다. 7월 29일, 태종무열왕은 직접
사비성에 왕림하여 나당연합군을 위로하고 백제 멸망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승전을 통보했다.
660년 8월 2일, 태종무열왕은 나당연합군을 위해 대대적인 잔치를 벌였다. 무열왕은 당나라 원병 총
사령관 소정방과 함께 단상에 나란히 앉아 단하에 꿇어앉아 있던 의자왕을 불러올렸다. 의자왕이 올
라오자 무열왕은 곁에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하여 술병을 의자왕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의자왕은 어
푼 눈치를 채고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차례로 술을 따랐다. 오라에 묶인 채 단하에 꿇어앉아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백제의 고관대작들과 장군들이 일제히 대성통곡했다.
그 자리에는 대야성을 침공해온 백제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전 신라 장수 검일도 끌려나와 있
었다. 무열왕이 18년 한을 담아 준엄하게 검일을 나무랐다.
“너는 신라의 장수로서 사소한 일로 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으니 그 죄가 하나요, 성주를 윽
박질러 그들 부부를 죽게 했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의 장군이 되어 조국의 군대에 대항했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에 대한 벌은 죽음뿐이다. 내 말에 이의가 있느냐?!”
이의가 있다한들 통할 리도 없었다. 무열왕의 명을 받은 신라의 군사들은 즉각 검일을 끌고 나가 능
지처참한 뒤 토막토막 잘린 시신을 백마강에 내던졌다. 이로써 김춘추는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백제
에 대해 철저하고도 처절한 복수를 마무리했다.
후세 사가들은 삼국통일의 역사적 가치와 이를 달성한 김춘추의 안목에 대해 구구절절 찬사를 늘어
놓았지만, 정작 김춘추에게는 삼국통일의 웅지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딸을 죽인 데 대한 복수로 백
제를 멸했고, 원병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마저 죽이려 한 데 대한 복수로 고구려를 멸했을 뿐이었다.
혹자는 이민족인 당나라와 손을 잡고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느냐고 비분강개하지
만,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한 적국이었을 뿐 민족이란 개념이 싹튼 것은 세계적으로
나 우리나라나 20세기에 접어들어서였다. 우리나라는 3‧1운동을 전후하여 비로소 민족의식이 자리잡
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개념이 싹튼 후에 벌어진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우리나라의 6‧25전쟁에서도
지도자들의 야욕은 항상 민족개념에 앞섰다. 국공내전이나 6‧25전쟁 모두 미‧소 양군을 끌어들인 국
제전이었다. 공연히 김춘추를 너무 원망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밤새 거동이 불편하여 불참하는 회원님도 계시지만 서울 회원 29명, 마산회원 10명, 부인동반 10명, 모두 49명 정도 총회참석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새벽녘 천둥 번개가 심하였던 서울날씨 지만 현지 도착무렵은 비가 그친다는 예보가 있어 다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1년만의 반가운 만남이 되리라 여깁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불참하시는 회원님, 잘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