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꽃은 중생이고 그 안에 있는 연(蓮)이 부처님입니다.
꽃 속에 부처님이 들어앉아 있다.
그렇게 알면 불교 공부 끝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전부 부처라고 생각 안 하고 중생이라고 자처하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중생 속에 부처가 들어앉아 있어요.
뭐 그게 어린 중생이든, 늙은 중생이든, 젊은 중생이든 아무 상관 없어요. 늙은 중생이라야 열매가 있는 게 아니라고요.
연은, 봉우리 맺었을 때 헤집고 봐, 그 안에 역시 있다고요. 그 안에 이미 연이 있어요.
그래서 어린 중생 속에도 부처가 있고, 젊은 중생 속에도 부처가 있고 늙은 중생 속에도 부처가 있어요.
무슨 꽃이 됐든, 어떻게 생겼든, 설사 벌레가 좀 먹었든, 누가 뭐 슬쩍 지나가면서 상처를 주었든,
우리가 벌레 먹은 인생, 상처받은 인생, 또 한 잎, 두 잎 떨어져 나간 인생이라손 치더라도 그래도
성한 연은 말할 것도 없지만은 성하든 성하지 않든
그 중생 속에 전부 부처가 들어있어.
다 부처가 들어있습니다.
누군들 상처 안 받고 사는 사람 어디 있어요? 그 상처를 보지 말고, 그 속에 연을 보라 이거예요.
도종환 시에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그런 시 있죠. 아 그거 근사하잖아요.
다 비 맞고 피게 돼 있고, 흔들리면서 피게 되어 있어
인생은. 다 상처받고 살게 돼 있어.
다 어딘가에 성치 않은 부분이 다 있어요.
부처님 앞에 오니까 다 평화로워 보이지.
마음속에 다 생채기가 다 있고,
상처가 다 있고 그 나름대로.
그래도 부처님 덕택에 잘 잊어버리고 견디고 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서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 이런 좋은 법석에 함께 하는 거예요.
그거 생각하지 말고, 그 연꽃이 뭐 한 잎 떨려가 버렸든 아니면 바람에 그 연잎이 몇 개 떨어져 나갔든, 아니면 벌레가 와서 거의 다 갉아먹었든 아무 상관없이.
그 연꽃 안에는 연이 고스란히 있어요, 부처가 고스란히 있어. 우리 상처 받은 인생 속에도 부처가 고스란히 그 안에 있는 사실,
내가 어떻게 살았든, 어떤 팔자 어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서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그거 우리 볼 게 아니라,
그 안에 부처라고 하는 아주 지고한 가치,
아, 꽃을 하나 가지고도
이루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가치,
가치의 내 삶이, 내 인생이 그 속에 있다고 하는 이 사실
우리는 법화경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아야 됩니다.
연화(蓮華), 연꽃이라는 게 그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것도 그렇지요.
더러운 곳에서 핀다는 소리가,
인생사 뭡니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그저 보면 탐욕부리고 진심내고 어리석고 좋은 일이 있으면 그저 손톱만한 좋은 일을 가지고 이만치 부풀려서 자랑하고 싶고 내 허물은 어쨌든 덮어가지고 남한테 안 보이려고 하고 그래서 입 싹 닦아 버리고,
절대 나는 아무 죄 없다고, 죽어도 그냥 나는 받은 적이 없다고 받은 적이 없다고 그렇게 덮잖아요. 이게 중생이야. 이게 우리 사람이라고.
그걸 이제 뭐라고 하냐, 더러운 흙탕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 속에, 그런 인간 속에 아름다운 부처가 있다고 하는 사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비로소 아름다운 부처의 꽃을 피웠다고 하는 사실.
그래서 묘법연화(妙法蓮華) 하면은 나는(무비스님)
연꽃처럼 아름답고 미묘한 진리의 가르침이라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 <문수선원 금요법회;법화경녹취:제1강-2>
음악감상; 흔들리며 피는 꽃;노래-범능스님
https://www.youtube.com/watch?v=hSOlbTGqdfk&spfreload=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