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가는 마음 절로 가는 운문
속세와 멀리감치 떨어진 산사로 며칠만이라도 템플스테이를 떠나고 싶어도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 누그려지지 않는 팔월 초순이다. 템플스테이를 대신해 하루만이라도 산사 탐방을 떠나려고 창원중앙역으로 나갔다. 마산에서 대구로 오르내리는 무궁화호 첫 열차였다. 진영을 지날 즈음 차창 밖으론 봉하마을 사자바위가 보이고 화포천엔 엷은 아침안개가 깔렸다.
삼랑진을 비켜 밀양으로 올라가 상동역을 지난 청도역에 내렸다. 역전엔 예전과 달리 추어탕집들이 즐비했다. 버스터미널에서 하루 예닐곱 차례 다니는 운문사행 농어촌버스를 기다렸다. 첫차로 출발한 버스는 시골길을 달렸다. 제철을 맞은 복숭아가 한창 수확되는 때였다. 동곡과 대천을 지나 운문댐을 돌아갔다. 지난 장마철 강수량이 적어 댐 저수량은 아직 더 채워져야 할 형편이었다.
청도읍에서 운문사까지 한 시간 걸렸다. 종점 식당에서 지역 특산으로 빚어 파는 동동주를 한 병 샀다. 절간 입구 매표소 직원에게 아랫재로 넘는 등산로가 개방되는지 물었더니 자연생태 보존을 위해 통제한다고 했다. 예상은 했었어도 국립공원도 아닌 운문산 탐방로를 통제하기에 아쉬웠다. 운문사를 찾음은 절간을 들리는 일보다 절간 뒤 계곡을 걷어보려는 것이었는데 마음에 걸렸다.
들머리 솔바람길을 걸어 절간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여름 뙤약볕에도 청청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대웅전 뜰에 서서 잠시 두 손을 모았다. 다른 부속 전각들에는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도량이오니 외인의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절간을 빠져나와 사리암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맞은편 먹물 승복을 입은 비구니가 다가왔다.
여승을 비켜 문수선원으로 건너가는 다리 앞을 지났다. 그 즈음에서 나는 마음속 결정을 하나 지어야 했다. 사리암주차장에서 운산사 계곡을 통제할 환경감시원을 어떻게 설득할지였다. 아마 직분에 충실할 환경감시원에겐 어떤 명분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다. 이럴 땐 정공법보다 우회 루트를 찾았다. 사리암주차장보다 한참 바깥에서 개울 건너편 산기슭을 따라 숲을 헤쳐 나갔다.
한 마리 산짐승이 되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친 숲을 뚫고 지났다. 반시간이면 닿은 사리암주차장까지 한 시간 더 걸렸다. 젊은 날 병영생활 각개전투훈련 철조망 통과보다 더 힘들었다.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환경감시원은 운문사 꼭뒤 탐방로에는 한 사람도 들여보내지 않아 인적이 끊겼다. 혼자 호젓한 숲길을 걷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 이럴 때는 안단테 안단티노로 걸었다.
학심이계곡과 아랫재로 가는 이정표가 선 삼거리에서 배낭을 풀었다. 아까 종점 가게에서 산 동동주를 꺼내 몇 잔 들이켰다. 그동안 환경감시원 통제를 받지 않으려고 거친 숲을 헤쳐 나오느라 흘렸던 땀방울이 식어갔다. 계곡물은 바위에 부딪쳐 포말을 일으키며 흘렀다. 일급수엔 버들치들이 헤엄쳐 다녔다. 등산화를 벗고 발을 담그고 싶었다만 상수원보호구역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삼거리에서 아랫재까지는 비스듬한 비탈이라 산행보다는 산책이 더 어울렸다. 목책다리 개울을 건너 물가 바위에서 가져간 도시락을 비웠다. 삼거리 쉼터에서 남긴 동동주도 마저 비웠다. 운문산 계곡은 여름에도 좋지만 겨울엔 더 좋다. 아랫재에서 삼거리까지 십 리 길을 아무도 지나지 않은 숫눈을 밟으면서 걸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몇 곳 가운데 하나다.
고개 가까운 약수터 못미처 가랑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덩치는 두더지보다 훨씬 컸고 움직임은 족제비보다 느릿했다. 아하! 그 녀석은 운문산 깃대종인 담비였다. 운문산 생태보전지구엔 담비 말고도 깃대종이 더 있다. 운문산반딧불이는 밤이 아니라 볼 수 없었고 꼬리말발도리는 벼랑에 자라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아랫재에 올라 저 멀리 재약산에 걸쳐진 구름을 바라보았다. 15.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