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는 언어체계의 구조성을 밝혀서 ‘언어학적 혁명’을 일으켰다. 그가 밝힌 구조성이란, 한마디로, 랑가쥬(langage)에 있어
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간의 관련성이다. 랑가쥬는 누구나 타고나는 언어능력이다. 랑그와 파롤은 각각 랑가쥬의 특정한
경우이다.
먼저, 파롤은 인간 고유의 언어능력 곧 랑가쥬가 실현된 것, 즉 발화發話(utterance)이다[촘스키에서 performance]. 그러므로 발화는, 꼭 들어맞는 번역은 아니지만, 말(speech)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무의식적으로 발화되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랑그이다[촘스키에서 competence]. (** 랑그를 그냥 언어라고 번역/이해한 연구물이 많다. 그래서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오류가 뒤따르고 있다.)
랑그란 그러므로 우리가 사유하고 개념 지을 때 사용하는 것, 즉 어휘, 구문構文, 문법, 음운 등의 총합적 체계이다. 만약 이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 사유할 수도, 개념 지을 수도 없다. 따라서 유의미한 발화, 즉 말이 존재할 수 없다. 소쉬르는 그 총합적 체계 곧 랑그를 “우리의 ‘두뇌에 자리잡고 있는’ 특정 현실(a specific reality which has its ‘seat in the brain’)” 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특정 현실이란 어느 지역의 특정 시점 또는 특정 시대의 인간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 달리 말해,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특정 시대 사람들의 ‘두뇌에 자리잡고 있는’ —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이다. 이 (의미)체계로 인해 어휘, 구문, 문법, 음운 등의 복합인 말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농노(serf)인 것은 — [sə:rf]라는 발화가 농노라는 한 사회인을 의미하는 말인 것은 — 유럽 중세[어느 지역의 특정 시대]의 사람 두뇌에 공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체계 곧 랑그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sə:rf]라고 발화해서 그것이 농노라는 한 사회인을 지칭하는 말인 것은 중세 유럽인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에 ‘농노’라는 개념이 아프리오리(a priori)적으로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sə:rf]라고 발화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소리(sound)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래 전에 본 미국영화 <부쉬맨>을 떠올리게 된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물건 하나를 두고 부쉬맨 집단에서 왜 그렇게도 큰 소동이 났는가? 그것은 미국인에게 콜라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공시태] 그들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에 있지 않은 것, 그래서 희한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통시태(通時態, dyachroniciry)] 속에서 그것을 그들의 사회.문화적 용도에 맞게 사용하게 되면서 그것이 그들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에 포함되게 되어 그것을 지칭하는 새로운 말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말로 인해 기존의 그 체계는 조금 확장-변형된다.
비근하게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공들여서 잔뜩 바르고 꾸며서 나온 사람에게 ‘예쁘다’고 하면 표정이 별로이다. ‘섹시(sexy)’라고 해야 좋아한다. 바로 랑그에 의해, 즉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에 의해 [séksi]라는 발화가 ‘최고로 아름답다’, ‘최고로 멋있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 된 것이다. 예전 한국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라면 공공연하게 [séksi]라고 발화했다 가는 크게 봉변당할 것이고, 은밀하게 그랬다 가는 크게 얼굴 붉혔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아저씨’, ‘가게 주인’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리어카를 끌어도 ‘사장님’이다. 그래야 얼굴이 환해들 진다. 심지여 이 학수이를 보고도 ‘사장님’이다. 내심 기가 찬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그냥 넘어간다. 두세 번이라도 더 볼 사람이면 나는 사장이 아니다; 나는 성이 강이니, 꼭 강 선생이라고 부르라고 야물기 다짐을 준다.
“냉면 나오셨습니다”, “환자분 들어오실께요”, “이 카드, 수수로 안 나오시거든요” “강아지 이제 식사 드셔도 됩니다” 등 희한한 뒤죽박죽 존댓말이 이젠 보통이다. 그런 존댓말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로들 품격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말이 점점 ‘찐’해지고 ‘거룩’해지고 있다. 반면에, 우리가 느끼는 말의 진정성은 줄어들고 있다.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적 (의미)체계가 그렇게 희한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아…
첫댓글 아아,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훌륭한 "글이시네요."
만우,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마시오. 척추는 우리의 노년을 지켜주는 지팡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