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광개토대왕비/릉, 장수왕릉, 산성하무덤떼]
단재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비문은, 당 태종이 직접 쓴 <진서(晋書)>와 달리, 곧 태왕의 후손 제왕(帝王)이 설립한 것인데, 그 중에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文句)가 기재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영자평(英子平)이란 만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와의 필담 끝에 비(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비(碑)가 오랫동안 풀 더미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영희(榮禧: 이 또한 만주인이다-원주)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중에 고구려가 토지를 쳐서 빼앗은 사실을 기록한 자구(字句)는 모두 칼이나 도끼로 쪼아내어 인식할만한 자구가 없어진 것이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는데, 흔히 자구가 깍여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서 도리어 인식할수 없는 자구가 생겨나서,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덧붙여진 듯한 감(感)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이 비문에 정작 태왕의 선비 정복의 대 전공(戰功)이 없는 것은 그것이 삭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태왕이 평주(平州)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가 쇠퇴한 틈을 타서 자꾸 나아가 땅을 빼앗았더라면 태왕이 개척한 토지는 그 존호(尊號)이상으로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同族)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연(燕)의 신하 풍발(馮跋)이 연왕 희(熙)를 죽이고는 고구려 선왕(先王)의 서손(庶孫)으로 연(燕)에서 벼슬하던 고운(高雲)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이를 태왕에게 보고하자, 태왕이 이르기를 “이는 우리와 동족(同族)이니 더불어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사자를 보내어 그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그리고 촌수를 따져보고 동족 간의 의(誼)를 설명해 주고 전쟁을 그치니, 이로써 태왕의 북진정책은 종언(終焉)을 고하였다.
태왕이 기원 375년(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이 즉위한 해-원주)에 나서, 기원 391년에 즉위하여, 413년에 ?기니(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비는 지금의 봉천성(奉天省) 집안현 북쪽 2리쯤에 있는데, 그 길이가 약 21자(6.3m)나 되며, 기원 000년에 만주 사람 영희가 발견하여(榮禧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기원 1903년이다-원주) 탁본을 떠보니 빠진 자(缺字)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인이 그 비를 차지하여 탁본을 떠서 인쇄하여 판매하였는데, 그 빠진 자(缺字)를 혹은 석회를 바른 후 첨작(添作: 덧붙여 씀)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들은 그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조선상고사[지은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가, 문학가인 단재
단재는 조선 초기에 권세를 잡았던 신숙주의 후손이지만 조부
단재는 조부로부터 가학과 성리학을 배우고 조부의 친구인
조국이 일제에 강제로 합방되는 것을 바라보며 만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조국이 독립되기 위해서는 우리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에 단재는 우리역사를 올바른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며 역사공부를 시작한다. 망명 때 들고 왔던 역사서인 “동사강목”과 “동국통감”을 다시 읽으며,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 역사의 무대인 만주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만주는 우리나라 역사의 탄생지이자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터인 것을 깨 닿게 된다. 당시 만주는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의 각축으로 새로운 전쟁터가 되었다. 북방민족인 우리가 만주를 지배해야만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으며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재는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주무대가 바로 만주로 인식하고 이 땅을 우리가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주지역은 일제의 강제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밀양의 갑부였던
단재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키며 가까운 곳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우리 선조들의 찬란하였던 문화유적과 강대한 국가를 운영하였던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환인, 집안 지역의 유적을 직접 답사하였으며“집안현 고구려 유적을 한번 답사하는 것이
백두산도중1白頭山途中
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인생 사십년 지리도하다 병과 가난 잠시도 안 떨어지네 한스럽다 산도 물도 다한 곳에서 내 뜻대로 노래 통곡 그도 어렵네.
백두산도중2白頭山途中
南來北走動經年/남래북주동경년 來亦然然去亦然/래역연연거역연 從知萬事須自斷/종지만사수자단 俯仰隨人最可憐/부앙수인최가련
남북으로 오가며 세월만 가네 와도 그러려니 가도 그렇네 세상만사 제 뜻대로 결단해야지 남 따라 다니는 것 가장 가엾네.
고구려와 발해 역사기행 중 백두산을 함께 답사한 신백우와 김사,
단재는 집안답사에서 광개토왕비를 보고 선비를 정벌한 것에 대하여 일제의 비문 훼손에 대한 의문점을 나타내고 또한 선비가 고구려의 후손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더 이상 정복할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긴것으로 보아 단재의 동족 사랑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단재는 사학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상해에서 의열단의 약산
우리민족의 오천 년 역사를 재조명하고 조국이 해방될 수 있도록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역사인식은 우리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영高麗營
고려영高麗營 지나가니 눈물이 가리워라
나는 서생書生이라 개소문蓋蘇文을 그리랴만
가을풀 욱어진곳에 옛자취를 설워하노라.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군이 당 태종과 전쟁을 벌여 북경근처인 '고려진高麗陣', '고려성高麗城', 황량대 등의 10여 곳의 이름을 남긴 것에 대하여 아쉬움을 회고하면서 지은 시조이다. 단재가 조국을 잃고 한갓 서생으로 조국 해방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면서도 개소문에 대한 사랑이자 조국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을 울리게 한다. |
출처: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원문보기 글쓴이: 조은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