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단순히 객관적으로 본다면.. SNUT 말대로 전혀 의심점이 없는것만도 아니야.
다만 지만원햏을 비롯한 혹자들이 말하는것처럼 시위주도자 윤상원이가 ~@!%@!#%@!
마르크스 자본론 존나 읽고다니고 그랬어!@%@!#%!@ 그래서 빨갱이야 빨갱이!!
라는식의 논리는 별로 타당성이 없는게 사실이지..(자본론 읽어보거나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놈들은 모
두 동감하겠지만 그걸읽고 난 이제 빨갱이가 될꺼야! 혁명을 할꺼야! 라는 생각이 드는놈은 없어.ㅋㅋㅋ
대부분의 햏자들이 10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아 존나 어렵네하고 책을 팽개치게 될꺼야.
다 읽는다 해도 무슨소린질 몰라서 몇번을 보고 반복해서 이해하고 아 이런내용이구나 하고 말지.ㅋㅋ
ㅋ 만약 자본론 읽고 난 빨갱이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놈은 나한테 말해라 국정원에 데려다 줄께.)
당시 전남도청과 광주시청에 인공기가 걸려있었다는건 신군부햏들의 낚시극이었다는게
밝혀지진지 참으로도 오랜시간이 지났고..
실제로 진압에 참여했던 특전사 대원들도 인공기는 낚시질이었고 우리가 본건 분명 태극기라고
말하고 있지...
그리고 당시의 광주를 촬영했던 모든 내/외신기자들도 태극기라고 분명이 밝혀놨고.
다만 실제로 있었던 5.18의 몇가지 의문점들은 다시 밝혀두고 가야한다고 본다.
우선 부검결과이다. 당시 진압군은 M-16을 썼고 시민군은 M-1이나 칼빈소총을 썼는데
당시 시체를 부검했던 의사들의 기록에 보면 의외로 칼빈이나 M-1 소총에 사망한 햏들도 많아...
이점에 대해선 당시 외신기자들의 기록을 보면알수있는데
"학생들은 총을 쏠줄만 알지 평상시 다루는 법을 모르는것 같았다... 안전핀을 해놓지도 않고
풀어진 상태의 총을 세워두는가 하면..."
"우리가 광주에 진입하던 도중 총소리가 났고 우리의 눈앞에 총탄이 날아왔었다. 우리가 외국인인걸
알자 총격을 멈추었다..."
이걸 보면 딱 감이오겠지만 시민군이 시민을 어쩌다가 죽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수 없는게
사실이지...
그리고 다량의 TNT에 관한 논란도.... 사실 무력시위용이라면 그렇게 많은 TNT를 가져다 놓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쩝.
그리고 광주항쟁이 민주항쟁이든, 좌파들의 폭동이든 이라는 그 참으로 진부한 역사적 논쟁
자체를 떠나서
당시에 일성이가 한국으로 밀고 내려오려고 했던것 자체는 사실이야.
CIA의 기록에 북한군의 햏햏한 징후가 이미 여러차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남침용 땅굴 26개를 파둔
상태였지.
1979년 10월26일부터 1980년 5월까지. DMZ지대에서 사망 혹은 부상한 남북 양군은 총 200명 가까이
돼.
남한군은 북한이 파는 땅굴을 찾기 위해서 북한은 그것에 겐세이를 놓기 위해서 서로 존나 충돌한거지.
(이규택 감독의 영화 "비무장지대 DMZ"는 이런 상황속에서 군생활을 했던 이규택 감독 본인의 경험담
을 영화로 만든것이라고 함... 그도 인민군 몇을 사살했었지 당시에...)
그 당시는 일성이 입장에서는 남침할수있는 절호의 찬스였어.
당시 영상물 기록들을 보면 알수있는데 박정희가 죽자 사람들이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좋던,싫던 존경하든, 안하든 20년가까이 남한을 통치해온 지도자가 죽었다는건 시민들에게 큰 충격
이었어.
왜 김일성이 죽었을때 북한시민들 울고 불고한거 말이다...
물론 김일성 ㅆㅃㅃ와 박정희를 어떻게 비교하겠느냐만 장기간 통치하던 통치자가 죽었을때의
불안,혼란,슬픔상황이라는 구조적 면에서는 비슷하지..(물론 북한시민들이 당국의 프로퍼겐다쉽에 의해
울고불고한 측면이있었떤것도 큰 사실.)
당시에 남한군이 모두 비상에 들어가고 휴가나갔던 군인들이 모두 돌아왔다면.
북한은 남침의 더없는 기회로 여기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거지....
국제사회를 보았을땐 미국은 카터가 이란에서 삽질하고 대통령햏자 선거한답시고 존나 바깥신경
쓸수도 없는데다가 박정희하고 카터는 굉장히 사이가 안좋았던 시기 였지.
더군다나 아랍동네에선 소련이가 붉은군대 포쓰를 발휘하겠답시고 아프간 존나게 때리고있었고..
당시 남한의 경제상황은 석유비축분이 채 열흘분량도 안남아있고
산업가동률은 -30%
그리고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열세....
1212사태로 인한 한국군 지도부의 혼란상황.
상황자체가 북한에게 너무나도 유리했었지. 지금도 남한내 간첩이 3만명으로 추산되는 판에(국정원 자료)
그시절이라고 간첩이 없을리 없엇고 김일성도 광주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있었을꺼라 보인다 ㄲㄲ
그래서 신군부가 대가리짜서 낚는답시고 했던게 광주를 좌익들이 선동하고있어!@^!@$^@!
빨갱이야 빨갱이!! 였는데
광주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억울해서 "김일성은 오판말라"는 글귀를 가지고 시위에 다니기도 했지.
(조갑제가 기자시절 광주가서 찍어온 광주기록에 보면그리나와있음)
하지만 의혹이 많다고 해서 광주의 일들을 좌익폭동으로 규정할순 없어.
문제는 광주시민들이 병신이 아니라는 점이지..
주체사상이 한국에 흘러들어오고 반미감정이 본격화된건 80년에 광주의 일을 거친후에
대학운동권햏들에 의해 그 사조가 형성되는것이지 그전엔 그러한 주류의 조직적 반미사조는 없었어.
더군다나 한국은 철저한 반공교육을 했던 시절이고 광주시민들도 어린시절 부터
반공교육을 받아왔다는점에서(광주 라고 교련이라는 커리큘럼이 없는게 아니고, 대한민국 공통 국정교과서가 없는것도 아니고, 반공도덕이라는 과목이 없는게 아니거든.)
그게 만약 빨갱이들의 선동이었다면 70만 광주시민중 50만명이 거리로 나왔겠는지 싶어.
그리고 광주시내 금은방 및 주요은행 70군데 중 군중들에게 털리거나,약탈당한곳은 한군데도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신군부 햏들이 아직까지도 거짓말을 치는게 너무 많다.
허화평은 "5월 15일 부터 착검했떤게 아니라니까!! 그땐 착검안하고 그냥 총만들었었어!!"
였지만 5월 12일짜에 기자들의 사진에 찍힌 군인들의 모습은 죄다 착검을 한상태지.
이런 조그마한 사실들 조차 거짓말을 했던 신군부햏자들이 글쎄...... 난 그들을 믿을수가 없구나.
다만 최대 논쟁은 반드시 역사가들이 해결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당시 기록과 자료 수천페이지를 뒤져봐도 전두환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는점..
이게 큰 논란의 문제지. 우린 흔히 광주문제를 떠올릴때 전두환 ㅆㅃㅃ 하는데
어쨋든 기록엔 전두환이 발포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는게 참 햏햏-_-;;
너희들의 생각을 알고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