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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통의 해남윤씨(海南尹氏) 종택 녹우당(綠雨堂) 탐방기 2017. 9. 2
해남과 강진의 위치도지
꼭 가보고 싶었던 해남(海南) 강진(康津) 지역의 유적 답사가 오늘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남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가고 오고하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소요유적답사회(逍遙遺跡踏査會)에서 기획한 남도지역 유적 답사 안내를 보고 권오규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해남군 지도
해남 관광안내도
대구에서 해남까지는 대구에서 서울 가는 것 보다 거리가 멀고 시간도 더 소요되어 07시 50분에 성서홈플러스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광주대구간고속국도를 달려 동광주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화순나주방면 고속국도로 바꿔 타고 가다가, 다시 영암해남 방면의 고속국도국도를 달려 드디어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全羅南道 海南郡 海南邑 綠雨堂길) 130에 위치한 <녹우당>에 도착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
아늑한 덕음산(德蔭山) 아래 자리 잡은 고가(古家)가 보인다. 이곳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생가이다. 조선시대의 명문가가 자리 잡은 곳은 어느 곳이나 풍수지리학 상으로 길지(吉地)에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인 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녹우당 후면에 원림(園林-집에 딸린 수풀)으로 무성한 덕음산(德蔭산)에는 500연 수령을 자랑하는 400그루의 비자나무 숲, 적송(赤松), 곰솔, 참나무 류가 무성하다, 천년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350m의 비자나무숲 길은 고산 윤선도가 조림(造林)했다고 한다.
녹우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고산유적지 안내도
녹우당이 보인다
녹우당 해남윤씨 종택 - 안의 口자 모양의 안채와 바깥 口자 모양의 사랑채와 행랑채가 있다
어초은 윤효정이 아들의 진사시험 합격기념으로 식수한 수령 500년은행나무
수령300년을 자랑하는 해송
윤선도가 임금으로 부터 받은 시호가 충헌이다. 시호를 따서 윤선도의 유물을 보관하고있는 충헌각 표지석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사당
녹우당 원림이 잘 가꾸어진 덕음산
고산 윤선도의 사당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되었다. ㅁ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棟)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에 삼신 제단이 있으며 그 동쪽에 해남윤씨 득관조(得貫祖-새로운 시조 즉 중시조)인 어초은 (漁樵隱) 윤효정(尹孝貞)과 윤선도(尹善道)의 사당(祠堂)이 있다. 중시조인 윤효정은 원래 강진에 살았으나 해남의 대부호(大富豪) 초계정씨(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고 한다, 어초은은 해남으로 장가들어 자리를 잡고 해남 윤씨를 번성시켰다.
녹우당 주변의 안내 개념도
박학다식했던 시조문학(時調文學)의 대가(大家) 고산 윤선도는 많은 벼슬을 거치면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고, 유배(流配)와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는 동안 창작한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오우가(五友歌)” 등의 가사문학(歌詞文學)은 우리나라 국문학사를 빛냈다. 그는 상소와 당쟁,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반복되는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시인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공부한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어부들이 배 젓는 소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는 우리 민족의 흥과 멋이 넘쳐흐른다. 지금도 그 당시 배운 구절이 또렷이 기억된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보길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시조로서 어부의 생활을 춘(春), 하(夏), 추(秋), 동(冬) 사계절(四季節)로 나누어 각 10수씩 40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호자연(江湖自然)을 노래한 연시조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의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지은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고산 윤선도 초상화(존영)
유물전시관의 문적1
유물전시관의 문적2
유물전시관의 문적(교지)3
유물전시관의 문적4
소학을 강조한 윤씨 가문
유물전시관의 문적 5
유물전시관의 문적6
유물전시관의 문적(퇴계집)7
유물전시관의 문적8
윤선도가 그린 여지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고산의 증손자로 조선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文人畵家)이다. 고산의 한글 시 학풍은 공재로 이어져 조선사회에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다. 그는 그 당시 선비들은 난을 그려 양반의 체통을 지켰으나 공재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최초로 선보였고 사실주의(寫實主義) 화풍도 개척하였다. 공재의 작품중 국보로240호로 지정된 자화상(自畵像)은 서양화법을 도입한 사실주의 작품의 최고로 평가 받고 있다. 정면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한 공제의 화면 가득 얼굴을 채우고 머리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백성들의 삶을 담아냈다. 우리나라의 풍속화의 시원(始原)을 연 공재의 화풍은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진다. 공재의 자화상 외에 나물 캐는 여인(採艾圖-채애도), 목기 깎기(旋車圖-선차도), 산수인물도 등이 있다. 공재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 그의 학문적 세계관은 다산에게 미친다.
국보로240호로 지정된 공재 자화상(自畵像)
후손이 어렸을 때 그렸다는 여인상
공재 문화제 (자화상그리기) 입상 작품들
유하백마도
주마상춘도
공부자성적도
각종 도장
그 당시 사용했던 벼루
녹우당에는 지금도 살림을 하고 있어 집안에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윤선도나 윤두서와 관련된 전시품을 볼 수 있었다. 윤선도가 직접 쓴 금쇠동집고(金鎖洞集古), 산중신곡(山中新曲) 등의 가첩(歌帖) 인조와 봉림대군이 윤선도의 집에 쌀과 포(布)를 내리면서 보낸 사송장(賜送狀)을 모아 첩으로 만든 사은첩(思恩帖), 지정14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券)과 규방문의문학인 규한록(閨恨錄), 종가음식 모조품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규한록(閨恨錄)
종가음식 모조품
해남 윤씨 가문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정신이 깃들어 있다. 중시조 어초은 윤효정은 관아에 찾아가 세금을 대납하고 풀어주는 일을 세 번이나 했던 <삼개옥문(三開獄門)>, 윤선도의 <근검적선(勤儉積善)>, 윤두서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이 적선지가(積善之家)의 가훈에 면면히 이어져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6.25전란에도 피해를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가훈(家訓)으로 실천한 명문가(名文家) 집안이다.
사랑채에 걸여 있었던 녹우당 현판
사랑채에 걸려 있었던 심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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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곳 다녀오셨군 덕택에 잘 보았스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