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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묵상글 ( 연중 제22주일. -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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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1 01:48
-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는 우리
직장 상사가 하라는 것은 군소리 없이 하지만
엄마에게는 함부로 말하면서 엄마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폭의 막말은 꼼짝못하고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은 가볍게 넘긴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왜 이럽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더 풀이하면 사랑으로 하는 말을 사랑으로 듣기보다
강압으로 하는 말을 두려움 때문에 듣기 때문입니다.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고 흔히 말하는데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법은 주먹보다 멀며,
사랑은 법보다 멀고 주먹보다는 더, 더 멉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렇다면 하느님은 다른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 하느님보다 주먹을 더 가까이 느끼고 법이 더 가까이 있는 것이며,
사랑의 말보다 주먹의 말을 더 잘 듣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이고 하느님이십니다.
조폭은 결코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고 우리에 관한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사실 관심이 없다면 관계도 없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제일 먼 것이지요.
이렇게 조폭은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멀리 있지만
우리는 되레 두려움 때문에 주먹을 가까이 느끼며,
그의 말을 듣는데 이것이 다 우리의 미성숙과 약함 때문입니다.
사실 미성숙하고 약한 사람이 사랑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요한의 서간은 충고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들은 얘기이기도 하고 저도 경험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본당 그래서 전통이 있고 뼈대가 있는 본당에 사제가 새로 가면
그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제보다도 본당 원로들 눈치를 더 본답니다.
그래서 신부가 새로운 사목을 펼쳐도 그리고 사목회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원로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이 달리하기에 신부들이 애를 먹고,
심지어 교무금을 더 내고 싶어도 원로가 적게 내면 그보다 적게 낸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만만히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는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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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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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강한 나무는 가장 유연한 나무이다(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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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 무덥던 찜통더위도 물러가고, 그 세찬 바람과 매섭게 퍼붓던 비도 그치고, 9월의 드높은 하늘의 가을입니다.
연중 2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율법의 올바른 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을 주면서 보여주신 사랑과 지혜를 생각하라는 모세의 따뜻한 권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 4,5-6)
모세는 이스라엘은 주님의 법을 지켜 다른 민족에게 하느님 사랑과 지혜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법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과 축복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실천이 참된 실천이 되기 위한 식별기준을 밝혀줍니다.
<첫째 기준>은 그것이 “위에서, 곧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 1,17)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인간애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둘째 기준>은 그것이 말씀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 곧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
왜냐하면, 바로 “그 말씀에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야고 1,21). 그러니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라고 말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정결법 논쟁을 통해 말해줍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나이 율법을 십계명의 성문율법 외에도 구두율법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613개로 확대하여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을 겉으로는 지키면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여기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 곧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을 “저주받은 사람들”(요한 7, 49)라고까지 하면서 족쇄를 씌워 짐 지우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면서 다른 이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마저 막았습니다(마태 23, 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그러고 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온다.”(마르 7, 14-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참된 실천은 법의 원칙에 대한 외면적 준수가 아니라, 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사는 내면적 삶과 추종입니다. 곧 마음과 행실의 상관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를 흔히 우리는 ‘수행’이란 말로 사용합니다. 행위를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닦는 일은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뿌리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입니다. 바로 그 나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 ‘겉이 아니라 속을 사랑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그렇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더라도 ‘참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아무 것이나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따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중요한 것은 실천하더라도 ‘빛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요, 사랑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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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다스려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언했던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또 그들의 영성을 살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으로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비춰지는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죄지은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손 버릇 나쁘다’,‘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고운 손입니다. 사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마음 관리를 잘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6,7)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 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알고 있었으며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져 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아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 탓을 때 회복하기 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민수기5장.9장.19장).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외적인 형식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아니 방치합니다.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든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고,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주님 앞에서 마음속을 환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있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 위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한다.”“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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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 목수회가 발족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커피 머신 water line 교체, 변기 flush diaphram 교체, 친교실 문 Adjustment, 성전 바닥 타일 수리, 잔디밭: 흙 파인 곳 흙 채우기, 여자 화장실 천정 라이트 교체, 부엌 후드 라이트 교체, 부엌 천정 형광등 교체, 여자 화장실 누수 수리, 농구장 보수” 예정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Blower & Power Washer Tune-Up, 성전 문 Adjustment, 성전 십자가의 길 라이트 교체, 성전 천정 라이트 교체, Asian Jasmine 구매 및 설치, 죽은 나무 또는 관목 교체, Top Soil Spreading, 남쪽 주차장 누수 - Water Leak Testing, 놀이터 Boundary – Concrete, 놀이터 Rubber Mulch 교체, 제대 Handicap Ramp, 성전 바닥 Vacuum Purchase, 제구실 누수 수리, 성당 주위 보도 및 외벽 검은 곰팡이 제거, 성당 입구 처마 스테인 제거, 북쪽 주차장 물 고임: Parking Lot Striping, 부지 서쪽 경계선 주위 정리, 농구장 Shade Installation, 새 창고 주위 보도블록 설치” 저는 봐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형제님들은 세밀한 부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습니다. 해야 할 바를 알고, 묵묵히 실천하는 형제님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댈러스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창고 만드는 일, 벽화 그리는 일, 농구장 꾸미는 일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창고 공사에 함께 하면서 목수회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벽화 작업하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농구장 단장하면서 사도회 형제님들을 만났습니다. 댈러스 성당에 숨어있는 많은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역모임, 반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구역 미사, 반 미사를 함께 하면서 교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 교우들의 고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홀해진 구역모임이 다시 활기를 찾으니 좋았습니다. 이렇게 구역모임이 자리를 잡으면 쉬는 교우들을 방문할 수도 있고, 주일 점심 친교 봉사도 수월하게 할 수 있고, 9월 22일에 있는 본당의 날 행사에도 많은 구역이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26기 사목회가 임기를 마쳤고, 27기 사목회가 출범했습니다. 26기에는 공석인 자리가 더러 있었는데, 27기에는 모든 분과의 봉사자가 선임되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맡아 주신 27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열정과 신앙이 충만한 봉사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구역과 반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관도 수녀원도 성당 밖에 있습니다. 성전 신축할 당시에 비용이 부족했고, 당시는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성당 주변에 건물도 많이 생겼고, 지금의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용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모임에 참석하기도 수월합니다. 수녀님이 성당에서 기도하기도 좋습니다. 교우들과 소통하기도 좋습니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당을 보았습니다. ‘메이플 우드 성당, 퀸즈 성당, 워싱턴 DC 성당, 필라델피아 Holy Angels 성당’이 50주년 행사를 하였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영적인 준비, 친교의 준비, 전례의 준비, 문화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이나 고쳐라 .” 사제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겸손, 헌신, 희생, 나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덧 9월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지난 8개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남은 4개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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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태교 음악’이 뭔지 아시지요?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들려주는 음악입니다. 그 태교 음악 왜 들려줍니까? 아이의 정서가 안정되라고, 심성이 고우라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의 마음을 곱게 만들어서 그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고우라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태교 음악으로 성가보다 더 좋은 음악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과 기도로 가득 차 있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 들려주는 음악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항상 좋은 것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하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좋은 것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전통은 지키면서 그 안에 있는 나에 대한 의미는 잃어버렸다’라고 말입니다.
손을 닦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손을 닦는 행위에 치중한 나머지 그 안에서 가져야 하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손을 닦는 것이 하나의 법이 되었고, 그 법을 지키는지, 어기는지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음식을 먹으려 준비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을 우리는 주일 미사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알아듣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법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를 했다고 해서 참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한 주일을 살게 해 주신 감사함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냥 해치우는 식으로 미사를 봉헌했다면 우리는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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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나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생각이 만드는 것이다.
-이어령-
위의 문장을 읽었을 때 제 마음은 위의 말에 대한 무한한 동의를 표현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걷습니다.
걷는 시간은 제게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걷는 동안 기도합니다.
걷는 동안 생각합니다.
건강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특히 저는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걸으면서 즉, 움직이면서 생각을 하면 생각들은 조금더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다는 것을 저는 저 스스로 느낍니다.
생각에 희망이 담기고, 생각에 활기가 생깁니다.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생각이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늘 젊은 생각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걸으며 생각해 보세요. 머리 싸매고 누워 생각하지 말고 걸으며 생각해 보세요. 생각에 활력이 생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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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키엣 대주교님.
영혼이 깃든 진실된 의식
세상에는 외형적인 믿음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믿음은 곧 계율이고, 계율을 완벽히 지키는 것이 곧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나환자와 출산한 여성, 이교도들을 더럽다고 생각했기에 그들과 접촉한 사람은 더러워졌다고 믿었습니다. 더럽다는 의미는 곧 죄를 지었다는 것이기에 그들은 절대로 성물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손을 씻었습니다.
단지 겉만 닦고 내면을 닦지 않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무덤밖에 석회를 바르고 색을 칠해 아름답게 만들지라도 그 내부에 있는 사체는 여전히 썩고 악취를 풍긴다’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기록된 수 많은 규정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믿음이 사랑과 영혼이 없는 허울뿐인 믿음이 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의례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지만 기도하지 않고, 몸 속의 나쁜 것들을 없애기 위해 금식을 하지 않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기에 금식을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과시하기 위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진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외적인 의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가치를 지니려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동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사랑이고 그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형식만을 따르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충실히 따르는 태도입니다.
말은 진실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말이어야 하며 자선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금식은 내 몸 속의 나쁜 것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세례는 참회의 마음이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할 때 비로소 성경을 읽는 나의 입술과 마음이 진심이 되어 주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깃든 참된 의식만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미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믿음이 있을 때만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더욱 더 가까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손을 씻는 것과 영혼을 씻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신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3.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무엇 때문에 도와주고 있습니까?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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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참 좋은 사람들
“경청, 실천, 순수”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거룩한 당신 산에 살을 이 누구오리까
허물 없이 살아가며 의를 하는 이,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이외다.”(시편15,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주님 장막에 묵을 수 있을지, 주님 거룩한 산에서 지낼수 있을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합니다.
“왜 전부 일본만 가노,
제발 좀 오세요.
심지어 동해도 폭망, 거품이 빠져도 이정도까지!”
새벽 열어본 한 동영상 제목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일본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건 국수적인 사고가 아니라 애국심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관광지를 이용해 주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작금의 의료대란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호소도 절절합니다.
“어느 여당 인사의 말이다, 국가를 이루는 3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인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주권이 없었기에 나라가 없었으므로, 8월15일은 건국절이란다. 인용하기에도 민망한 말이라 잠시 주저해 보지만 그럼 지금은 국민이 있는가 묻고 싶다. 국민이 없는 의료정책을 펼치는 이 시국에 과연 나라가 존재하는가?”
오늘은 9월 첫날, 달력을 넘기는 순간 참 많은 과제를 부여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사람되어 사는 보람과 기쁨을 충만히 느끼는 9월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의 도래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어지는 대림시기, 참으로 풍요로운 영적수확을 위해 부지런히 성실히 치열히 살아야 할 날들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 103위와 순교 복자 124위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굳은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 달이요, 특히 순교 성지 순례를 권하고 싶습니다.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스런 의무이기도 합니다. 제 고향집 충남 예산의 구암리 카페 인근의 솔뫼성지, 해미성지, 신리성지, 그리고 수덕사와 윤봉길 의사 생가와 추사 김정희 생가가 볼만합니다.
교황님의 9월의 기도지향도 절박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구와 환경재해와 기후변화의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상의 보호를 위해 온갖 개인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도지향입니다. 또 오늘 9월1일 첫날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열정에 넘치는 교황님의 담화문 극히 일부만 소개합니다.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십시오. 피조물이 진통을 겪으며 탄식하는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리 지상의 삶만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우리의 미래, 지극히 복된 종말, 평화 가득한 낙원인 지구가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성부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삶을 삽시다.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에, 우리 삶은 하느님을 위한, 인류를 위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위한 사랑의 시가, 노래가 될 수 있고, 거룩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우리에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과제가 부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시로, 사랑의 노래로 사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랑하는 하느님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이 더욱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되고 빼서도 안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모세에 이어 야고보 사도의 거듭된 경청과 실천의 충고가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의 아버지께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은 진리의 말씀 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참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도 이런 신심의 은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오늘 몇 현자의 말씀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키라.”<다산>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이유를 살피고, 그가 만족하는 바를 관찰하라.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수 있겠는가? 어떻게 숨길수 있겠는가?”<논어>
“‘존재하는 것은 나타내는 것이다.’ 히브리 철학자이자 신비가 아브라함 헤쉘의 말이다. 한 인간의 존재는 본인이 알든 모르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그의 언행이 그대로 어김없는 자기증언인 것이다.”<어느현자>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만든 조상들의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이요 말씀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오물통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다음 어리석은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위선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을 참되이 섬기는 것은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심어진 진리의 말씀을 공손이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말씀을 통한 정화은총이, 성화은총이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주님의 오늘 복음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에 대해 번호도 달아봤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1.나쁜 생각들, 2.불륜, 3.도둑질, 4.살인, 5.간음, 6.탐욕, 7.악의, 8.사기, 9.방탕, 10.시기, 11.중상, 12.교만, 13.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물통같은 마음이요 이런 오물들이 배설될 때 세상은 악취 진동하는 오물통같은 세상이 됩니다. 이런 주님의 진리 말씀을 깨달아 실천해 가면서 날로 정화되어 순수해지는 마음에, 자유로워지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의 축소판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나를 탓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그만큼 변합니다. 참으로 부단한 하느님 중심의 말씀공부와 실천의 생활화가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물통 세상을 탓할게 아니라 오물통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이요,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마음의 정화와 성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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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그 누구도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없앨 수 없고
그 무엇도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빼앗을 수 없으나
오직 사람만이
스스로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우려 드니
하느님의 모습이
없어야
참으로 사람인 듯
그릇 생각함이요
하느님의 모습을
잃으면
사람이 아님을
깨닫지 못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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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순교성월을 맞는 9월의 첫 주일이자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온 규정,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인간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더러움을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을 사도 바오로는 2독서에서 제시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더러움을 없애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고 그 말씀의 영이 우리 영혼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비치는 대상 그대로 드러납니다. 거울이 더러우면 그 거울안에 비추어진 대상을 참되게 드러나게 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등으로 마음의 더럽혀져 있을 때 순수하고 거룩한 우리의 영혼은 이런 것들로 가리워져서 드러나지 못하게 됩니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인간이 어떠한 처리 행위를 하지 않아도 공기나 물에 포함되어 있는 오염 물질이 스스로 정화되는 자정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우리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등으로 더렵혀진다 할지라도 우리 영혼안에 심어진 하느님께로부터 온 이 말씀이 우리마음을 자정작용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히브리 4,13 참조) 영혼의 정화작용을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하느님의 말씀의 작용을 통해서 더러움의 체험과 거룩함의 체험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안에 감추어지고 포장되어진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게 하여 벌레만도 못한 더럽고 미천한 밑바닥을 보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런 비천한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더러워진 영혼을 정화시켜 거룩하고 순수하고 단순한 새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회개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힘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수해 질 때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드렸던 찬미의 노래가 매일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이시오며 자비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오며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오며 아름다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오며 즐거움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는 온갖 보화이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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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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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예수고난회 박테원 신부님.
[8월 31일]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예수님의 가난 나누기)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0&id=2101820&menu=4770
- 예수님의 가난 나누기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극도의 가난 속에 죽을 때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미리 정하셨고(로마 8,29-30),
또한 가난과 십자가로도 당신 아드님을 닮도록
미리 예정하셨습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처럼,
하늘에서는
지상에서와는 반대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를
십자가에 처형되고
영광스럽게 되신 당신 아드님의 모상으로
변모시키심을 믿습니다.
-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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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보여주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
박윤식 [big-llight] 2024-08-31 ㅣNo.175563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고유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물었다. “왜 선생님 제자들은 더러운 손으로 먹습니까?” 그분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 전통만을 지킨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는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러한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그 못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마치 범죄자로 여기며 따진다. 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폭탄선언을 하신다.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럽지 않다. 오히려 나오는 게 더럽힌다.” 이는 악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과연 죄의 뿌리는 과연 무얼까?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손 씻지 않고 음식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신 게 아니라,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하느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신다. 실천이 따른다는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도 일상을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낸다. 이 주고받는 말은 빈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방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계명과 같은 하느님 말씀은 그렇지 않다.
더 나아가 계명은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힘에 섣불리 꺾이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신비의 지혜와 보이지 않는 힘이란 게 분명 있다. 우리가 말씀을 변화시키는 게 아닌,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양육까지 하신다. 따라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디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사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거다.
사실 손을 씻지 않는다고 불결한 것이 결코 아닐 게다. 오히려 힘이 없는 약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요청을 마치 남의 일처럼 거부하는 것이 불결하다. 참 믿음이란 하느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거며, 참다운 순결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의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은 앎에서 끝나는 게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된다. 불쌍한 이를 보살피고 가난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때, 위선적 믿음에서 벗어나리라.
아무튼 유다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꼭 손을 씻어야만 했다.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의당 율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했기에. 이렇게 그들은 당연히 속죄 행위를 거쳐야 경건한 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은 단지 보이고자 지키려 했든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셨다. 손만 열심히 씻으면 뭐 하느냐?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이 아니냐면서. 이렇게 손 씻는 행위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닌, 매사에 자신을 엄히 되돌아보는 것이 신앙인의 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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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들음에 대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실천하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때보다, 하느님께서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을 따라갈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온갖 좋은 것은 위에서 온다고 하며, 공손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손함, 그것은 신명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더 좋고 더 옳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순응하는 것이 공손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느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은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열왕기 상권 3장에서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듣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이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더 지혜로움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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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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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을 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나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상 필요했습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된 것들이
어느 새 전통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필요해서 생긴 습관들이지만
이제는 지키지 않으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에 점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더 큰 어려움은
그것을 지키는 것과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연결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이
잘못을 넘어서서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은
단순한 궁금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면
병에 걸리지 쉽다는 염려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께 죄를 짓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필요 때문에 생긴 습관을
죄와 연결하다보니
하느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시고
그것을 판단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고
오히려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하지만 또 멀리하는 것이 죄가 될까 두려워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점점 행동은 부자연스러워지고, 불편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라는 것은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자녀가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나 스스로 세세한 습관들까지도
죄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만 해'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어떠한지
돌아볼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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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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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신명 4,1) 계명과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변질시키고 있다. 오늘 복음의 논쟁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조상들이 율법 해석으로 만든 규칙들이었다.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조상들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보다도 선악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은(21-23절) 무섭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현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이다.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가 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면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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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미안한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기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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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정결 예식’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행한 것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거룩하다.’ 라는 말과 ‘깨끗하다.’ 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깨끗이 씻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 그게 위선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고, ‘삶’을 깨끗이 해야 한다.”
몸을(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1장을 보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우리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긴 겉옷’을, 즉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온 삶으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3)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라는 말씀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일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세 3,6).”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16-17).
그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는 선악과 탓일까?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고 탐스럽게’ 보인 그 열매의 잘못일까?
만일에 정말로 맛없게 보이는 열매였다면, 하와가 안 따 먹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명령을 어기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명령을 하신 하느님 탓일까?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 자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 자신들이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은, 열매를 준 하와 탓을 하는 말이고, 또 하와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만 하고, ‘외부 탓’만 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삶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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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한 아리따운 처녀가 강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전날 많은 비가 내린 탓에 물이 불어서 아녀자 혼자 그 강을 건너다가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고가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대선사 경허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처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혹시 자기를 업고 그 강을 건너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젊은 스님은 정색을 하며 처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불가에서는 여색을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저희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허스님은 선뜻 그녀를 등에 업고 강 건너편에 내려주었고, 계속해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젊은 제자는 불가에서 금지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혹시 '땡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의구심은 길을 걷는 동안 점점 더 심해졌고, 젊은 제자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서 걷던 스승에게 따졌습니다.
“스승님, 수도생활 하시는 분이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젊은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젊은 제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경허스님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그 처자를 한참 전에 강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왜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두 스님 중 불가의 계율을 제대로 지킨 사람은 누구일까요? 외적인 형식에 얽매여 곤경에 처한 중생을 차갑게 외면했던, 그리고는 그런 자기 행동을 기준삼아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느라 정작 자기 마음 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차게 만들었던 젊은 제자일까요? 아니면 자비와 선, 그리고 중생 구제라는 불가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계율을 적용하는데에 융통성을 발휘했던, 그리하여 마음이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했던 경허선사일까요? 너무다 대조적인 두 스님의 모습을 통해,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떤 방식으로 지키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부를 때마다 언제라도 달려와 우리 곁에 계셔 주고 싶어하시는 사랑과 자비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의 가깝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계명’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주셨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법과 규정들을 충실하게 잘 지킨다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들을 마음껏 누리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된다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의 가까움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그 계명들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율법규정과 관습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켜야 할 규정들이 늘어나면서 그것들 하나 하나를 다 지키기가 너무나 버거워져버렸습니다. 그 규정들이 지키고자 했던 계명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린 채, 각각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데에만 급급해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따지기에 이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물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변질’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느님께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햇습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꾸만 우상숭배에 빠졌던 부정, 하느님께서 세우신 정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의 논리와 타협하려 했던 부정 등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그런 무시무시한 재앙을 겪게 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계명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자기들의 부정함을 씻으면 다시금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고 그분께 사랑받는 거룩한 백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율법을, 특히 정결법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곧 하느님”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율법 규정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의로움을 판단하고 평가했습니다. 나병 같은 중병에 걸린 환자나 하느님과 율법을 모르는 이교도들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더러워진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들과 접촉하면 자신들 역시 부정해진다고 여겨 철저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다 자칫 실수와 잘못으로 부정해지더라도 정결 예식을 통해 외적인 더러움을 씻으면 그런 부정함도 사라진다고 믿었기에 지나칠 정도로 손을 씻고 그릇도 열심히 닦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뜻에 비추어 자기 내면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깨끗함을 바탕으로 자신이 ‘거룩하다’고 포장하며,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하고 부정한 생각과 욕망들은 꽁꽁 감추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자기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율법을 무기 삼아 다른 이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열중했고, 그러는 사이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입술로만, 외적인 형식으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척’ 할 뿐, 정작 그 마음은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그들의 ‘위선’을 강도 높게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도구로 삼은 정결법이란 것도 계명이라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인간이 만든 전통에 불과할 뿐임을, 그들이 그 전통에 얽매여 외적인 깨끗함에 집착하는 사이, 정작 그 계명이 추구하는 목적인 하느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음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신앙생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섬김의 자세를 표현하는 양식인 ‘경신례’가 참된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이 나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담는 것입니다. 진심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없는 참된 마음’(眞心)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마음을 다함’(盡心)이라는 뜻입니다. 거짓 없이 참된 마음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랑을 통해 깊은 친교를 맺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해서 형식은 소홀히 하고 마음에만 신경쓰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속은 깨끗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깨끗한 척 하는 게 ‘위선’이라면, 나는 속이 깨끗하니까 겉으로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자기 편한대로 하는 건 ‘교만’에 해당합니다. 위선이나 교만이나 둘 다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이지요. 그러니 계명의 형식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을 ‘바리사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핑계 삼아 영적인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진정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계명에 대한 내적인 지향인 마음과 외적인 지향인 실천이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일치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코린코 1서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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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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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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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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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연중 제22주일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
<2024.9.1>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1~12절)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
❚ 말씀 그대로를 이루시며,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 어떠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이어야 합니까?
➲ 어려운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4절).
‘아합이 죽은 후...’ 아합은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지만, 성경에는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악한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북이스라엘 창건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던 오므리 왕조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급기야 모압의 독립을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아간 오므리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을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아하시야가 어느 날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에 듭니다. 그래서 그는 블레셋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이 병이 낫겠는지 물어 보라 명합니다(2절).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사자들을 만나 하나님의 사자에게서 받은 메시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묻느냐?...네가 반드시 죽으리라...’(3~4절). 하나님의 백성이 구하고 찾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묻는 것은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아하시야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했습니다. 왜? 바알세붑이 가장 큰 신이고 능력이 있는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게 당한 사고나, 내 능력으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그래서 감당하기 힘든 삶의 환경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열쇠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현재 처한 삶의 환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31:51절)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 너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목사라는 그럴싸한 이름만 가지고 있지 현실에 매여 한숨만 내쉬는 안타까운 자신을 봅니다. 맹수가 무서워 자신의 양떼는 뒤로한 채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비겁한 목자의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 다른 방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회복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심판의 말씀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5~8절).
아하시야가 보낸 사자들이 에그론을 다녀오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에 온 것을 보고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5절)묻습니다. 이에 사자들이 엘리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의 메시지를 왕에게 전합니다(6절). 이러한 메시지를 듣게 된 아하시야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메시지는 그냥 흘려 보내버린 채, 그 메시지를 누가 전했는지, 그 사람의 생김새나 특징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판단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7절). 왕은 신하들이 말한 사람의 특징을 듣자 그가 디셉 사람 엘리야임을 알아챕니다(8절). 왕은 신하들을 통해 전해들은 그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징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지라도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절).. 유대인들은 죄로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셨습니다. 징계의 메시지가 나에게 다가올 그 때가 바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심판의 말씀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고난의 현장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9~12절).
아하시야는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를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엘리야를 향하여 지휘관인 오십부장은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아하시야의 명령만을 그들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 왕의 완악함에 스스로 동참하는 죄악을 범함으로써 그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보낸 오십부장과 군사들은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하시야의 잘못된 판단과 영적 무지함 때문에 애꿎은 군사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현장으로 나를 이끌어 가시면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인간적인 방법만을 찾고 있기에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말씀하시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현장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계획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알량한 잔꾀나 나의 인간적인 방법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명심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완고한 마음으로 자신의 지식과 힘을 의지하며 간교한 계략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신앙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 건강한 영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삼하 1: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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