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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창세기 15:1-7 “ 아브람의 상급 ”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바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상급은 우리의 행함으로 받는다고 배워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강조점은 상급과 행함에 있었습니다. 구원은 따 놓은 것이고 이제는 행함으로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천국에서도 상도 받아 보자는 이중적인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혜가 있어야 할 곳이 은혜는 간곳이 없고 상받기 경연대회가 열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 경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되는 예화들은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지을 때 자기의 재산을 바쳤는데 몇 년이 안가서 더 좋은 집을 가졌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전국의 그러한 사례를 수집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아마 기성 부흥사의 이야기를 두 번만 들어보면 얼마나 그러한 이야기가 재탕이 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높이고 그런 사람을 본 받아서 나도 한번 그렇게 되어 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람잽이가 돈을 따가는 것처럼 보이고서는 사람이 걸려들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흥사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러한 사람들의 예를 보편화시켜서 나도 교회 충성하고 목사에게 잘하면 그런 복을 받을 거야라는 헛된 욕망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람의 본을 받아 우리도 복을 받자 그런 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마치 복인 양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 얼마나 무지한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비할 것도 없이 그런 것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못미치는 것입니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해설하는데 이러합니다. 훌륭한 사람을 표창하여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도록 떠받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힘쓸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정부나 기관에서는 이런 통념에 따라 표창장이니 훈장이니 하는 것을 적격자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널리 공표합니다. 노자는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을 인용합니까? 세상의 성과급이라든가 상이라든가 표창이 사람들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게 된다고 예수도 안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어떻게 은혜를 말해야 하고 시기 질투가 죄라고 말해야 하는 교회에서 상따기 위한 경쟁을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람의 상급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시고 이러한 상급이 얼마나 소종하며 귀한지를 제대로 아시고 바른 상급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여 온 전쟁이 하나님의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기긴 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세력을 정비하여 아브람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두려워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큰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이기에 방패가 무엇인지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붙여주신 전쟁을 경함한 아브람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이겠습니까?
군대를 더하여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의 최신식 무기를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방탄유리가 둘러 있는 것처럼 적이 달려오다가 앞에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심을 실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방패가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 아브람의 복입니다. 이러한 복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의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상급은 어떠한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의 상급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신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되실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잘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슨 재벌회사 사장님처럼 생각하여 회장님께 잘 보여서 무엇을 받아내려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그 회장을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회장에게 잘보임으로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세상에서나 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고전 16;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상급이 되어 주신다는 것 자체가 복임을 모르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온통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분만을 사랑해야 되는지 부모 형제 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제대로 우리에게 이해가 되고 깨달아져야 아브람의 상급은 하나님이다 라는 말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심을 성경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고서 아브람이 저는 자식이 없는데요 저의 집에서 길리운 엘리에셀이 나의 후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때에 아들이 없으면 종을 양자삼아 상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는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이러한 아들의 약속이 4절에서 5절입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이 아브람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신 것입니까? 애굽의 바로왕과의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실력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돌라 오멜의 동맹군을 격파하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서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그러면 단지 아브람이 이삭 낳게 된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나중에 희생제물이 됩니다. 물론 죽기 직전에 대속하는 희생제물이 있었지만 이삭 같이 희생당할 후손이 나올 것을 믿었다는 사실이 함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앞뒤로 생각하여서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네가 나이가 오십도 안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하니 아브람함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치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자기를 중심으로 풀고 계시는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예수는 아니다 라고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작전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 내려는 것이 사단의 일이기에 유대인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로 사단의 배후를 드러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었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너무 비약적인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예수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한 영적인 눈으로 아브람이 예수님을 보았다기 보다는 이삭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대속의 의미를 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함의 자손을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는데 이 자손의 약속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은 이삭 외에도 사래가 죽고 나서 재혼하여 6명의 자녀를 더 두었으며 이스마엘도 아브람에게서 난 자손입니다. 그런 자손은 빼고서라도 이삭의 후손으로 에서와 야곱 야곱의 열두 아들 그 후로 수없이 많은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최고 정점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미 눈치 채고 계시지요? 예수님이라고. 그런데 성경에서 어디에서 그런 근거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많은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꼭 집어서 단수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의롭다 합을 받는 것은 아브람의 수많은 후손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보고서 아브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는 것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상급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1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복이 믿음으로 주어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아지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떠한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10절에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람함의 후손으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상급을 받았습니까? 이 상급이 너무나 좋고 너무나 귀하기에 이 상급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은 세상이 갑자기 배설물 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이 상급을 능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나은 상을 받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라면 경쟁이 되겠지만 이 상급은 그러한 비교를 용납하지를 아니할 만큼 엄청난 상급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말씀합니다(창 15:7).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과 땅의 약속입니다. 일차적인 약속은 이삭이고 일차적인 땅은 가나안땅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궁극적인 땅은 아들의 피로 세워진 아들의 나라입니다(골 1:13). 그러므로 이 땅을 기업이라고 하고 유업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 29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예수를 믿는 것과 그 유업을 잇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상급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 상급을 받은 자라면 세상의 상이라든가 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겠습니까?
오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급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상급으로 평생토록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겠습니까? 그 아들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으로 인하여 다른 세상의 어떠한 복이라는 것도 시시하게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23. 창세기 15:1-21 “ 언약체결 ”
아브람의 상급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시는 그 내용은 후손과 땅입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약속한 아브람의 후손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이 부분은 끝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13-16절까지 보시면 네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있다가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4백년 동안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결과를 출애굽기에서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6:2-8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출애굽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는데 이제 백성은 만들어 졌습니다만 땅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가나안정복과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시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영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창세기 15:18절에서 애굽강에서부터 유브라데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제대로 성취된 때가 다윗시대입니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향이 솔로몬까지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애굽과 광야, 사사시대를 거쳐 약 1,000년 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만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언약의 말씀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알고 그 뜻에 맞추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누가 더 고집이 세겠습니까? 100년도 제대로 못사는 우리이겠습니까? 1,000년이 걸려도 자기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 이기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두손 바짝 드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집도 만만찮아서 항복을 잘 안하지요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하나님의 후손과 땅이 주어졌습니다. 거기에 왕까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이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영원한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커다란 징검다리가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를 통하여 때로는 숲을 때로는 나무를 보고자 합니다만 아직은 숲을 보고자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권사님은 설교에 뼈는 있는데 살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뼈라도 있다고 하시니 다행이긴 합니다. 살은 여러분이 부치시기 바랍니다. 집을 지을 때 살을 먼저 붙입니까? 뼈대를 먼저 세웁니까? 뼈대를 세워야 하지요 그런 식으로 우선은 좀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살만 보아왔기에 성경의 흐름과 상관없이 나의 필요한 부문만 편식을 해온 것입니다. 그러니 병에 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끊어 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한 왕위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7:8-16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여기서의 특징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 같은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땅, 하나님이 세우신 왕 이것이 다윗에게 언약을 하시면서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위가 지금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하다는 왕위가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이 후손과 땅입니다. 그런데 다윗시대에 후손과 땅과 무엇이 더 추가됩니까? 왕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다윗시대에 좀더 구체화 되고 확대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면 성경의 커다란 흐름의 줄기를 잡게 됩니다. 30분 만에 성경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무리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줄기이기에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놓으시고, 뼈대를 세우시고 그 사이에 여러 족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족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을 잡는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다윗과 언약하신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자를 예수님이 살려 내셔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땅은 어떻게 됩니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13절에서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땅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을 유업이라 기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큰 흐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우리가 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인하여 참여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일에 무슨 보탬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그리고 그 택한 자를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 내시는 일에 우리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인류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자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피로 마련된 유업을 우리는 선물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는데요 그렇지요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받은바 그 선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것,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심이 너무 좋아서 자랑할 뿐입니다. 그렇게 자랑을 하다 보니 어느날 곁에서 꼭 같이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참으로 귀하고 더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주님의 이 은혜가 없다면 나는 교회 아닌 것 아닌가 하고 자신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단지 교회 등록한 것으로 하늘나라까지 간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선물이 좋습니까? 이것이 너무 좋아서 전세방에서 평생 살아도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 아닙니까? 세상의 좋다는 것 없어도 이러한 선물에 감사하는 자가 예수믿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것의 감사와 가치를 모르면 평생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면 아예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그냥 세상 재미를 ?아서 사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세상을 사랑하시다가, 그래도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좋아지시면 그때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 믿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못살겠다고 말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도 없으면서 있는 척 위장하지 말고 그냥 나가서 놀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유업으로 받는다는 이 사실을 인하여 평-생 감사하고 사시겠습니까? 그러면 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기분에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약속도 거창하게 하고 파기도 손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하시는 약속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선물을 주시기까지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언약 체결입니다. 창세기 15:8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그 약속을 무엇으로 이루어 내실 줄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이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데 솔개가 그 위에 덮치려니까 아브람이 그 솔개를 ?는 일만 합니다. 그리고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이 드는데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언약의 내용은 아시지요. 타는 햇불이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는 18절에 아브람으로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짐승을 쪼개어 마주 놓고서 언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 당시의 언약체결 방식이랍니다. 우리는 인감도장을 찍는 것처럼 언약을 맺을 때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면서 우리가 서로 언약을 어기면 언약을 어기는 자가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언약 체결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만 지나갑니까? 하나님은 불의 형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라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햇불의 형상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지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 아닌가 할지라도 높고 강하신 분이 언약 맺었다 그러면 언약이 체결되는 것입니다. 약소국이 강대국과 약조를 맺을 때 원하지 않아도 약조를 맺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일방적인 언약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시는데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담보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왕이 희생됨으로 우리에게는 언약의 선한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처럼 언약의 희생물로 쪼개어 졌습니까? 바로 십자가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의 언약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 내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부끄럽고 놀라서 입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보혈 흘리신 주님의 사랑에 겨워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눈뜬 사람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나오기 까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얼만 큰 구원의 은혜를 입었는지 날마다 더 풍성히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