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7
4월24일[부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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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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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UvQDNkuNgQ
[서울대교구 강선훈 세례자요한 신부(신월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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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축제!>
우리나라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점이 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수시로 외침을 받아, 식민 통치를 받고 유배를 떠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축제를 즐겼습니다. 계절별로,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는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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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EPt2IyXH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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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13세 아들은 영재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 준비 중입니다. 대학도 안 다니고 대학원에 바로 진학하는 게 어머니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나치게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게임 중독을 고쳐 달라고 제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이는 공부가 어렵고 친구도 없다 보니 쉬는 시간 잠깐만 게임을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공부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요? 왜 어떤 명령은 사람을 살리는데, 어떤 명령은 사람을 죽일까요? 나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명령을 하며 착한 목자처럼 자녀나 가족을 이끌 수 있을까요? 좋은 명령이라고 강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으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자아가 죽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는 말은 자아의 말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포기한 적이 없는 자아의 명령은 상대를 죽입니다. 반면 나를 위한 명령이 피와 함께 온다면 그 명령은 생명이 됩니다.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령은 상대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살아있으면 그 속에서 상대의 피를 먹는 기생충처럼 됩니다. 반면 죽었으면 상대에게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김하얀 부부는 부모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들 정지웅은 서울대 22학번이 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했을까요? 아버지는 자녀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이미 높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이의 공부를 방해합니다.
키 크려면 일찍 자라고 하고 주말엔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서 고기 구워 먹자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자신들의 공부 시간을 챙기려고 따집니다. 엄마 김하얀 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가자고 그러면 가는 거지, 이것들이!” 이런 엄마의 명령은 자아가 빠진 명령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은 아이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느님 뜻인지 깊이 고민하고 그렇다는 느낌이나 확신이 있다면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명령이 상대 속으로 가서 기생충이 되거나 양식이 되거나는 나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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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 영화 중에 ‘삼체’가 있습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구는 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일출과 일몰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동지와 하지를 예측할 수 있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달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밀물과 썰물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보름달과 초승달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이 이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3개이거나, 달이 3개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삼체의 상황에서는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은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영화는 이체의 지구와 삼체의 외계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물리학이 삼체의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삼체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부활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이체의 세상이 추구하는 질서와 원칙이 있습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암호와 같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보호막을 가지려고 합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기 위해서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체의 질서와 원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풀 수 없던 문제에 대한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손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버릴 수 있었고, 고통을 넘어 부활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사명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보여주었는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배고픈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직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나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부제들이 나눔을 전담하였고, 사도들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방인의 문화와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각자의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행전, 요한행전, 데레사 행전, 마리아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께로 가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었던 ‘행전’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전에 비움, 십자가, 나눔,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행전에 용서, 겸손, 이해, 친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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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은 샘물의 본질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 하신다. 바로 당신이 바로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 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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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본문도 “나”라는 말이 절마다 등장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직접적으로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당신께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체’이신 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자 보내지셨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어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이라는 ‘대조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두 가지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우리가 어둠 속에 방치되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체’라는 주제로 돌아가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당신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언제나 진리이고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살아 있고 역동적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증언합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크라조’는 비명을 지르듯이 격하게 소리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없이 증거와 표징만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사명으로 오셨는지 격렬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에 있지 않게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가 여전히 소모적 의심으로 어둠을 붙잡고 있으면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단단하고 격렬한 어조로 경고하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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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4ㄴ-50)
1)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이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을 나타냅니다.(요한 1,1)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이 말에서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씀도,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외모’가 예수님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에(1요한 4,12), 하느님의 외모가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 한 인간일 뿐이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을 섬기다가 억울하게 죽은 어떤 순교자의 희생일 뿐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라는 ‘어떤 사람의 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이신 분이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 되고, 그 속죄의 효과는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메시아께서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일이 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이 됩니다.
3)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는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빛’은 구원과 생명을, ‘어둠’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왔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4) 47절의 말씀은, 앞의 3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라는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48절의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심판받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곧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받은 상태가 되는 것은,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 즉 ‘지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지금’ 구원이 시작되고, 반대로 ‘지금’ 거부하면, ‘지금’ 심판받은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내 말’, 즉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가리킵니다.
5) 49절은, ‘예수님 말씀’은 곧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인데, 당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50절의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과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는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는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말한다.”인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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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떠올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보고 있는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시선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 안에서 다른 것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품을 넓혀 가는 사람입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기에 앞서, 세상을 밝히셨고 그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요한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역할은 파견되신 분으로서 파견하신 분, 곧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밝혀 주시고 시야를 넓혀 주시는 데 당신의 삶을 온통 내어놓으셨던 것이지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모든 것을 보았다고 여기며, 다른 면을 본 이들을 향하여 서로 삿대질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아파하고 보듬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일, 저 세상의 장밋빛 인생만을 꿈꾼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다른 이의 이야기와 논리에 공감하기는커녕 거친 언사를 내뱉고 얕은 자기 신념을 고집하는 완고함의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라도 구원으로 초대받았다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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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때,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면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서두인 ‘로고스 찬가’에서부터 줄곧 계속되어 온 ‘빛의 자녀 찾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리고 그것은 “나는”으로 표현되는 네 번에 걸친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고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계시 선언에 앞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아버지의 권능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는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계시자이고.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시는 아들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빛이신 말씀으로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비춰 드러내주고, 아버지께로 향하여 이끌어 갑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의 엔진인 성령에 따라 힘차게 달려야 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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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림은 제게 믿음을 품으심입니다.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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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는가?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런 것들은 나의 힘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만일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 자신부터 살아 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까지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이 나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럼 단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단죄는 심판하는 것이다. 즉 처형하는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다. 심판을 받으면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 단죄 받은 대로 처벌받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단죄는 더 이상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벌을 받을 뿐이다. '단죄는 당신은 죄인이다.'라고 공포하는 것이다. 일단 죄인이라고 공표되면 다른 방도가 없다. 즉 단죄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요,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일이요, 마침내 죽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원은 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요,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단죄인가 구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는 단죄하는 일을 행하는가?
정치하는 사람들도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말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 폭로 등 단죄하는 말들만 한다. 이 세상에는 온통 단죄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아주 오랜 일들까지 들추어 내면서 단죄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그런 것이 잘하는 것 인양 되어버렸다.
성직자 수도자의 입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말보다는 단죄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온다. 하지 마라. 그것은 안돼. 저 사람은 안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은 가능성이 없어. 너는 성격이 나뻐, 네가 하는 일은 늘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등 구원의 말보다는 단죄의 말들이 너무나 성행하고 있다.
단죄하는 언어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말이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구원의 일을 해야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입에서조차 너무 쉽게 나오는 단죄하는 식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말로 바뀌어져야 한다.
구원의 언어란 사람을 용서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말이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내가 했으면 더 못 할 뻔 했는데 이 정도면 너 참 잘 했다. 야 그것 참 예쁜데, 아이구 참 멋있어요, 다시 해봐 너는 잘할 수 있을 꺼야 등 상대방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구원하는 일이요, 언어들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단죄의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살리는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단죄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구원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단죄가 성행하고 있는 사회에서 구원의 언어를 구사할 때 구원의 행위를 행할 때 바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는 오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단죄하던 사람이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죄하는 사람에게서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단죄하는 인생에서 구원하는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상처 주고 못된 일만 하던 삶에서 좀 더 보람있고 가치있고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 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왜 저런 나쁜 사람을 그냥 놔두시는가? 그리고 왜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가?라고 질문하고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사람을 살리려고 하신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악인을 단죄하지 않으시는 것은 끝까지 악인이라도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단죄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나 악인이 단죄받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살리기 위해 하신 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받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담배는 암의 원인이다. 라고 사람을 암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아무리 경고의 말을 하고 금연 운동을 해도 애연가들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담배를 피운다. 그 결과 나중에 암의 진단을 받고 죽는다.
고 이주일씨가 담배는 독입니다 라고 금연 광고에 나와서 아무리 이야기 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한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마라 고 한 그 말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 죽는 것이다. 결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그 사람을 단죄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암이라는 병으로 단죄 받지 않았을 터인데 결국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말씀만 하시지 단죄하는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하셨어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다면 결국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단죄한 말씀이 될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말씀이 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말대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결국 우리는 단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끝 날에 단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리기 위해 말씀해주신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말씀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탓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지 않은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즉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나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나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 스스로 단죄 받게 될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어둠 속으로 몰아갈 것이며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하신 그 말씀이 나를 단죄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단죄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구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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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2,49)
‘누구를 파견할까요?’ 어떤 조직체에서 어떤 곳으로 사람을 파견하는 기준은 철저히 조직의 비전과 사명에 적합한 인물을 우선적으로 선출해서 파견하리라 봅니다. 파견(갈래 派,보낼 遣)이란 ‘일정한 임무를 맡겨서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파견되신 분이시고, 파견되신 예수님은 자기의 뜻이나 계획보다는 자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고백하셨을 만큼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려고 분투노력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12,47~48 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는 말처럼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살고 빛이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10,46) 단지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빛이신 그분을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고, 그분의 명령이 곧 영원한 생명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12,49~50)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도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생명이시고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살려고 할 때, 그 살려고 하는 그 삶 자체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며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에,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입니다.’(12,44~45 참조)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2,49) 이처럼 예수님은 참된 파견된 존재의 원형이며 근본根本이 되신 것은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고”(12,50) 계셨기 때문이며, 또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당신이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하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 당신 이름으로 파견된 모든 선교사가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 곧 믿음과 순종의 태도입니다.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나를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12,44) 고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란 바로 철저하게 아버지와 한마음으로 사셨기에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12,46)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박해로 흩어졌던 교회는 차츰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사12,24)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에서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단식하며 기도한 뒤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워 안수하고 나서 그들을 떠나보냈습니다.”(사13,3)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전하도록 선택되고 파견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파견된 이는 파견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철저히 내어 맡기고 다만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는 우리이지만 혹여 이 세상 사람들과 별 다름없는 빛과 어둠을 왕래하면서 겨우 주일이나 지키는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면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묵3,15)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세상에 빛으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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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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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신 예수님>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 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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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삶을 향한 걸음>
요한 12,44-50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영원한 삶을 향한 걸음>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요한 12,50)
죽음을 향한
삶의 길 위에
삶의 걸음이 곧
죽음의 걸음일지라도
두렵기보다 설레고
주저하기보다 기꺼우니
언젠가 닿을 죽음
그 너머 비로소
영원한 삶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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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예수님-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 146,1-2)
봄(春)은 봄(觀)입니다.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지가 봄호 65권 표지를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65권이니 벌써 창간된지 16년째가 됩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봄철은 참 볼 것도 많으니 역시 봄은 봄입니다. 어제 4월23일은 세계 책의 날이었습니다. 작은 잡지 분도 계간지이지만 참 알찬 잡지로 책의 날 소개해드리고 싶은 교회잡지입니다. 특집의 초점란은 파견(선교)였고, 분도잡지 역시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려는 선교 목적으로 출판되는 잡지입니다.
어제 바티칸의 교황님을 찾은 어느 수도회 장상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이들의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의 얼굴을 반영하는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말씀에 이은 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충격을 받은 하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여기 로마에 왔을 때 일입니다. 이 아이들은 웃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웃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웃을수 있는 능력을 다시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주님의 얼굴이 되어갈 때,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4월24일, 옛 어른의 말씀처럼 배경이신 주님께서 환히 드러날수록 하는 일 모두가 이런 즐거움의 경지가 될 것이며,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이 될 것입니다.
“즐기는 것은 만 번을 반복하는 애정이며, 앞으로 만 번을 더 반복할 것이라는 긍지다.”-다산
삶은 반복입니다. 이런 반복의 삶이라면 반복의 기쁨, 반복의 행복, 반복의 새로움이라 부를수 있겠고, 바로 매일 평생 반복하여 부르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가 그러합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논어
정말 배경이신 주님만이 점차 드러나는 삶일수록 이런 즐거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참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받았던 “배경을 가리지 말라”는 시화(詩畫)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 이처럼 폭발적인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인 자작시는 드뭅니다.
“내
그 나무를, 집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하늘과 산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주님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날로
작고 낮아져
그 좋은 배경(背景)을 환히 드러내는
누구나 좋아하는
겸자(謙者)가
덕자(德者)가 될 일이다.”-2024.4.23
집은 자연입니다. 집은 삶입니다. 집이 좋아야 삶도 좋습니다. 집은 살아있습니다. 어머니 자연 배경과 잘 어울리는, 자연과 잘 조화된, 자연친화적인, 자연속에 숨겨진 옛 고향집같은 정다운 집이 정말 좋은 집, 살만한, 살아야할 집입니다. 사실 우리 옛 집들은 다 이러했습니다. 오늘날 병이 많은 것은 집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싫어함’이란 부정적 말마디를 썼다가 즉시 ‘좋아하지 않음’이란 긍정적 말마디로 바꿨습니다. 수도원 전경도 별내 신도시가 건설되고 고층의 아파트 숲들이 즐비하니 배경을 이루었던 그 좋던 하늘과 산, 들의 옛 전경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위 시 나눔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의 세 답글도 나눕니다.
1.“한없이 좋으신 분, 주님을 가려버리지 않게,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게
노력하는 삶의 자세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습니다.”
2.“이 시는 최고입니다. 주님 만날 때까지 간직하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
3.“주님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낮아지고 작아져 겸손하게 살아야 됨을 다시금 아름다운 시를 통해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배경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환히 드러나듯 우리를 통해 배경이신 예수님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는 삶이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이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니 예수님이 아니곤 하느님 아버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서, 마침내 비움과 겸손의 절정에서 나는 사라져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살았던 예수님이셨고,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에게서 일치의 완성에 도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다음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환히 계시됩니다. 나는 사라져 배경이신 아버지와 하나된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과 하나된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무지와 허무,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빛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세상의 빛, 인류의 빛, 영혼의 빛입니다. 세상 무슨 빛이 주님의 빛을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새삼 구원과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생명과 죽음도, 행복과 불행도, 희망과 불행도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배경한, 주님과 일치를 이룬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눈부시게 펼쳐집니다. 제자들을 통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활동입니다. 제자들은 사라지고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환히 드러납니다. 다음 짧은 대목이 이를 요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이어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후, 둘은 선교사로 파견되니 마침내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이 실현됩니다. 주님의 두 제자이자 사도인 바르나바와 사울의 선교사로서의 맹활약이 펼쳐집니다. 이들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이들의 영원한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배경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하시어 당신의 사도이자 선교사로, 당신의 빛으로 어둔 세상에 피견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6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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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관상에 매번 실패한다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며 하느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관상이고 관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관상한다고 하면 하느님 관상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을 자기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저희 프란치스칸에게 이런 관상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관상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보는 것이고, 인간과 피조물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봅니다.
관상이 이런 것이고 또 이럴 수 있는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만 보려 하고 인간은 시야에서 몰아내려고 합니까? 또 피조물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보려고 하고 보는데 왜 인간을 통해서는 보려 하지 않고 또 보지도 못합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인간은 꼴 보기 싫기 때문이거나 진정한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싫거나 미울 때 꼴 보기 싫다고 하잖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치워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사랑하기에 관상하겠다고 하면서 인간은 꼴 보기 싫으니 관상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상이 성공하겠습니까? 꼴 보기 싫은 인간 때문에 관상이 매번 실패할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기만 하면 그 인간이 떠올라 하느님께는 그 언저리에도 못 가고 끝이 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 없이 관상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 없이 관상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 없이 관상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삼라만상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우주와 인간을 그렇게 많이 연구하지만 무기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나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믿으면서 물질세계 이외의 다른 실재를 부정하는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초월적 실재인 하느님 관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고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라고 믿으며, 그래서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관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 보는 믿음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믿음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이고, 사랑과 믿음 없인 어떤 관상도 꿈꾸지 말아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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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12,47)
<예수님의 바람!>
오늘 복음(요한12,44-50)은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의 신원이 다시금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이요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6-47)
'하느님의 명령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애쓰십니다. 그러니 어둠 속을 헤매지 말고, 생명이며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참제자들이 됩시다!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간절한 바람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하게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용서와 자비를 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 내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려 봅시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 세상 안으로 널리 퍼져 나가게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시며 기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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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0Png7V-C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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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 46)
삶의 의미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뜨겁게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감출 수
없듯이
빛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향하는
빛이며
사랑을 나누는
나눔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비추어 주는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연결된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빛은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이 세상을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작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듯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마음을 밝히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빛은 어둠을
벗어나는
자유의 길입니다.
자유의 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을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빛의 발견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복음의 빛은
사랑의 실천이며
지혜의
원천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빛과 함께
오늘을 충만하게
하는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빛은 기쁨이며
빛은 놀라운
믿음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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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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