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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 ; Esperanto
■ opening date ; March 14th, 2015
■ e-mail ; esperanto.ms@hanmail.net
04
알렌 브로이드 / 거주지 런던 세인트존스 우드 가 3번지 브릴리언스.
알렌은 출입 허가증이 담긴 가죽 케이스를 힘껏 움켜쥐었다. 뒤틀린 입술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나이에 관련된 숫자놀이는 몇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날카로운 검으로 벼려낸 독가시였다. 의미를 두어봤자 살을 파고들어 뇌를 마비시키는 독가시.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모습, 그 나이로 살아가겠지만 그 암울한 중력을 떨쳐낼 수 없는 이유는 인간과의 공존을 위한 극수적인 대의명분 중에 하나였으므로 거부할 수 없었다.
알렌이 몇 시간 전부터 자리 잡고 앉아있던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창을 통해 오색 빛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영광의 빛, 희망의 끈과도 같은 새벽 동은 은빛 물결의 찬란함을 만들어서 칠흑 같은 밤을 점령했다. 그 숨 막히는 정적 앞에 몇 번씩이나 그림자를 묶어 머물렀지만 알렌에겐 그 어떤 구원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사들의 노래는커녕 양지의 따스함이 살갗에 전해지지도 않았다. 고요와 적막만이 소리 없는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어쩌면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에겐 사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벌써 기도가 끝나신 겁니까.”
노쇠하여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듬성듬성 볼품없이 솟은 희끗한 머리칼을 제법 말끔하게 손질하고 가슴께에 복음서를 품고 있던 바벨신부가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첫인사를 건네자 알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도라는 게 과연 우리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묻고 싶었던 알렌이었다.
“그대가 친애하는 ‘당신들의 아버지’는 오늘도 내게 무언의 침묵으로 일관하셨네.”
신부는 주름 가득한 얼굴근육을 당겨 웃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이 길을 잃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껏 기다린 시간을 버릴 수 없으니 좀 더 여유를 가져보세요.”
“흥. 말은 쉽지.”
“허허, 당신이 투정부리는 모습도 보고. 이젠 이 늙은이 그만 눈 감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알렌은 글래스고우 성당을 찾을 때마다 변해가는 바벨신부의 모습이 낯설었다. 오랜 시간동안 인간을 포용한 적은 지극히 드물지만 바벨신부는 좀 특별한 존재랄까.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이며, 지독히도 뱀파이어의 독설을 즐기는 자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65년 전쯤의 일인데, 뱀파이어의 당주 사울팽의 자리에 오른 ‘메리 리플론’의 직권 문제로 원로원들이 집회를 열 당시였다. 교황청에서 보내 온 밀교를 가지고 회의실로 뛰어 들어온 자가 바벨신부였는데 그 밀교에는 메리 리플론이 사울팽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네 가지의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바벨신부는 얼굴에 젖살도 빠지지 않은 열여덟의 청년이었다. 아무리 교황청의 명령이었다지만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의 소굴을 찾아 온 그의 용기는 무모함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알렌 브로이드는 그 후 바벨신부의 도움을 받아 대성당 출입이 가능해졌다. 뱀파이어인 그에게 모진 질책을 하거나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금껏 유대관계를 쌓아왔다. 그랬던 그가 어느새 여든이 훌쩍 넘어버렸고, 시간을 거스르지 못해 구부정한 허리와 건조하게 주름진 얼굴이 무척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파수꾼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바벨이 신부복 안쪽 깊숙이 찔러두었던 것을 꺼냈다. 낡은 리넨 옷감에 둘둘 말려있던 내용물은 회색빛의 양피지였는데 일종의 명부였다. 파수꾼으로 활동 중인 자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재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알렌은 그들을 선동하는 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헤롯. 비나 웨인?”
알렌이 눈썹을 꿈틀대며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본명은 비나 웨인인데, 자칭 헤롯(헤롯. 기원전 4세기 경,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갓난아기를 모조리 죽여 유아대학살 일으킨 로마의 왕)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어이없군.”
비나 웨인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파렴치한인지 알 것 같았다. 알렌은 양피지에 적힌 명단 중 헤롯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빠르게 기억해두고는 다시 신부에게 건네주었다.
“수도자들이 올 시간이니 이만 돌아가겠다.”
바벨신부는 소중하게 품고 있던 복음서를 내려놓으며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한 두 해 출입한 것도 아닌데 서두를 필요 있습니까. 저와 좀 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아, 그렇지. 전투 견을 새로 들이셨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히죽거리면서 너스레를 떠는 바벨신부의 말이 귓등에 닿질 않았다. 알렌은 투철한 신앙심으로 무장된 종교인들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성당 출입이 금지됐던 것은 교황청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협정을 통해 만들어진 조약 때문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뱀파이어의 수가 늘어가던 1500년대.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고 무차별적인 인간 사냥을 하지 않는 다는 조건하에 뱀파이어는 교황청으로부터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 중 가장 파격적인 조건이 인간 틈에 섞여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교황청은, 무자비한 인간 살육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터라 그들을 믿어보기로 하고 그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미 몇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알렌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교황청의 대표자로 나온 자가 자신을 혐오스러운 듯 바라보던 그 눈빛을.
“골치 아픈 일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럼 잘 있게, 바벨.”
의자 옆에 세워두었던 지팡이를 들고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신부는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알렌은 못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주웠던 그 ‘판도라’말입니다.”
잠시 멈춘 알렌이 대답 대신 모자를 눌러 쓰고 짧은 목례를 전하며 대성당의 문을 힘껏 밀었다.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한데 그는 더 이상 미련 두지 않았다.
인간은 1세기도 살지 못한다. 오래 살아봤자 수 십 년이 고작인 지극히 짧고 안타까운 삶. 그러니 바벨신부도 곧 죽음을 경험하겠지. 엄연히 따지면 오늘은 구원의 기도가 아니라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혹은 조만간 찾아올 바벨신부의 마지막을 위해 알렌은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 뒤 마차에 몸을 실었다. 지팡이로 천장을 두 번 정도 올려치자 신호를 받은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고 이내 마차가 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글래스고우 성당을 벗어나려면 아치형 구조로 된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10년 전 이곳에서 그녀를 주웠을 때 알렌은 그녀의 몸속에 흐르던 피의 향기를 맡고 아주 광대한 꿈을 키웠었다. 메리 리플론의 유혹에 넘어가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던 꿈. 원로원의 명령으로 근신 중이던 에반 카멜에게 그녀를 맡긴 것도 완벽한 계획을 세우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를 진심으로 마음에 담은 것이 문제였지만…….
안주머니에 있던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안에는 각기 다른 두 개의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마차가 잠시 덜컹거렸지만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오롯하게 그 것을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것을 조심스럽게 펴자 흘겨 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맨 처음 카멜을 만났을 때 그녀가 마치 목숨이라도 되는 냥 자그마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개엔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알렌은 한 동안 그것을 두고 고민했었다. ‘주웠다.’와 ‘구했다’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내버렸다.
“무모한 짓일까…….”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에 도착한 알렌은 시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 풍경을 보며 잠시 서있었다. 각박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노점상들이나 과일을 파는 어린아이, 한 무리의 남자들이 어깨를 붙여 모아 아편을 태우고 있는 모습들. 친숙하다 못해 그런 광경들을 보지 못한다면 서운하기까지 한 익숙함이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플랫폼에 들어서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몇 분의 여유가 있어서 조간신문 한 개를 샀다.
1면을 장식한 Police notice. (폴리스노티스 : 사건을 알리는 신문 기사)
약 두 달 전 국고(국가금고) 사정이 어렵다면서 기부 요청을 위해 브릴을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던 아이센트리거 백작이 독약에 살해당했다는 기사였다. 독의 종류는 남미산 식물 큐라레에서 추출한 알카로이드계의 성분으로서 소량이라도 치명적인 독이다. 알렌의 기억으론 아이센트리거 백작은 상당히 경솔하고 야만적인 남자였다. 사욕으로 손을 댄 국고를 채워 넣기엔 자신이 기부금 명목으로 던져 준 돈주머니론 어림없었을 테니 여기 저기 손을 빌렸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꽤 많은 뱀파이어를 만나고 다녔을 터.
알렌은 뱀파이어의 고위 귀족들이 독특한 식물 수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담보로 섣불리 행동했다면 뱀파이어의 한 끼 식사거리로도 대접받지 못하고 버려졌을 터. 어쩌다 뱀파이어와 거래를 해서는……. 쯧쯧.
소호에 있는 아이젤 호텔에서 자선 파티가 열릴 거란 심심한 기사를 비롯해 런던의 작은 예배당 지하에서 캐터코움(중세기 때 가톨릭교도가 외부의 박해를 피해 사용하던 지하 성당의 일종)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에반 카멜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던 중이니 지난 십여 년 동안 비밀리에 움직였던 그의 행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까 싶었다. 시간이 나면 파울로를 앞세워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장. 전 날의 사건사고를 일축시켜 정리한 면을 빠르게 읽어 내리다가 50대 신원미상의 남자가 패딩 턴 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인은 발을 헛디뎌 플랫폼에서 추락사 했다고 되어 있었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사건이었다.
곧 플랫폼 위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몇 번 접은 신문을 팔꿈치 사이에 끼운 뒤 코트 목깃을 세워 바람을 막았다. 런던에 도착하려면 최소 반나절이 걸릴 테니 인간들 사이에 파묻혀서 자는 척이라도 할 심산이었다.
“파울로. 혹시 약초를 피웠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흠. 그럼 내가 또 착각한 모양이군.”
저택에 돌아온 알렌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환각적인 취기를 가져다 줄 정도로 독한 압생트(술)를 연거푸 마셔댄 것처럼,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면서 조금 전까지 카멜이 자신 옆에 머물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참으로 좋은 향기다. 신기하게도 이 향기는 자신의 몸 안에 살아 숨 쉬면서 어느 때고 살갗을 찢고 나오는 난폭함을 지배한다. 그러면 그 난폭함은 순식간에 무기력해지고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얼른 무릎에 뛰어 올라와 쓰다듬어 주길 바란다.
“카멜 양이 와 계십니다.”
그녀의 체취가 묻어있는 공기가 절대 착각이 아니라고 확인사살해준 파울로의 말에 스카프타이를 풀어 내리던 알렌의 손이 멈칫했다. 어젯밤 그레이엄 대공의 개들을 따돌리느라 베라 루이가 데려왔다는 보고를 받자, 알렌의 기분이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잠들었나?”
“예. 피곤하셨던 모양인지 아주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귀찮아서 약을 먹여 재운 건 아니고? 알렌이 떫은 표정으로 파울로를 노려보았다. 가볍게 위스키 한 잔을 걸치고 곧장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대공의 인내심이 드디어 폭발했군. 개떼를 보낼 정도면.”
“그동안 루이 공작님이 어지간하셨어야죠.”
“흥미로워. 그레이엄 대공이 근래에 들어 아들 사랑에 여념 없는 이유가 뭘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입니다. 루이님이 공작 칭호를 얻은 지 이백년이 넘었으니 차기 군주 후보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 거라 확신합니다.”
“정작 루이는 원치 않아.”
“루이 공작님 본인의 생각만 그렇다는 것 뿐, 그레이엄 대공은 원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이루고 마는 집념이 강한 분이니 아마도…….”
“됐어, 그 얘긴 그만해.”
알렌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파울로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사냥을 가셨던 게 아닙니까?”
아니다. 성의 없이 대답한 알렌이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레이엄 대공의 개들 중엔 간혹 유별나게 후각이 예민한 녀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들 중에서도 벨로시 콜튼이 카멜의 향기를 맡았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알렌은 쏜살같이 침대를 찾아들었다.
* * * *
저녁 시간 내내 알렌은 몇 번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부탁이에요. 웃지 마세요.”
“아아, 미안. 참아보도록 할게.”
그녀가 화난 모습도 예뻐 보이던 그는 미안하다는 말도 벌써 다섯 번째다.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질 않자 카멜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알렌이 이렇게 실없이 웃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난 카멜은 이불속에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알렌에게 안겨왔다. 몇 번이나 그 작고 순결한 육체를 범하는 상상을 하던 알렌은 그녀의 손톱이 자기 등에 상처를 내며 어떤 신음소리를 낼까, 라는 망상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 상황에, 하얀 백합 같은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 괘씸해서 젖무덤 사이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갈취하기도 했고 입술을 탐하기도 했다.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난폭함이 카멜의 향기에 점령당해 힘을 잃는 다면, 반대로 추악하고 끈적거리는 욕정은 태풍처럼 일어났다.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몇 번씩 침대를 박차고 나갔지만 카멜과 떨어져 있는 건 더 괴로웠다.
약기운이 떨어지면서 잠에서 깨어난 카멜은 몇 초간 침묵했다. 곧 알렌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고막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면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진 건 그야말로 광대 공연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카멜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표정은 새침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꽃 같아서 보기 좋았다.
“화이트 홀에 하인을 보냈어. 다들 무사하다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카멜이 급 화색하면서 의자에서 껑충 뛰었다. 그 바람에 어깨 위로 늘어트린 갈색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알렌은 카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도, 찻잔을 들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도, 찻물을 머금은 분홍빛 입술도. 모두가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알렌에겐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집에 루이를 초대했다지?”
순간 카멜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번만이야. 앞으로 두 번 다시 나 이외의 뱀파이어를 집에 초대해선 안 돼.”
“아 참. 루이씨는 괜찮은 건가요!”
알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질문이 틀렸어.”
“네……?”
“네 안위부터 걱정해야 되잖아.”
물론 카멜도 알고 있었다. 베라 루이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그녀가 얕게 심호흡을 하는 동시에 갈색 머리카락이 늘어진 앞가슴이 잠시 부풀어 올랐다.
“도너가 필요하세요?”
아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알렌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 벌려 놓은 베라 루이의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분노했다.
“절 찾으신 목적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구해주신 이유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갑자기 자리가 불편해진 알렌은 빈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몇 번쯤 입에 털어 넣는 동안에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 했다. 뱀파이어의 당주 사울팽의 자리를 놓고 부친을 죽게 만든 메리 리플론에게 복수하기 위해 판도라의 피를 마셔서 강해져야 했다, 라고? 그 정도의 명목이면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알렌은 자신의 존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말하기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사실은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웠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이 원하던 목적 달성을 위해 내가 필요했다면. 그래서 날 구한 거라면, 내겐 이유를 물을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판초…….”
“당신 같은 분이 왜 나처럼 평범한 인간을 기다렸을까……. 정말 꿈같은 일이잖아요.”
만약.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브릴로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루이를 만나 쓸데없는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레이엄 대공의 개들에게 쫓기지도 않았을 것이며, 잠든 사이 자신에게 유린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은 담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곁에 두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너가 되어 달라고 하면, 들어주긴 할 건가?”
“정말 그게 목적이었나요?”
“나 때문에 일생을 통째로 겁탈당한 사실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내가 놓아버리면 나 아닌 다른 어둠에 짓밟혀 생을 마감하게 되겠지. 그럴 바엔 내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라고 내 멋대로 결정했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원망한다고 해도 카멜을 소유하고든 욕망은 이미 끝을 모르는 질주 본능을 시작했다. 알렌은 말없이 일어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하드커버로 덮인 책 모서리를 살짝 누르자 책장이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났다. 네모반듯한 철체 문에 달려있는 다이얼을 돌려 문을 열고 낡은 고서 한 권을 꺼내 자리로 돌아오자 카멜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알렌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백 년 전, 에반 카멜이 내게 상납한 신록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벼락을 맞은 표정으로 알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맞아. 너를 키워준 그 자는 뱀파이어야. 그리고 아직 멀쩡히 살아 있지.”
“사, 살아 계신다구요?!”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야. 사울팽의 눈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사울팽…….”
사울팽. 카멜은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되새겨 보았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팔걸이에 옮긴 알렌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에겐 우리 나름대로의 계보가 있어. 그 점은 인간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등은 법보다 더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는 관습이잖아? 왕족이라든가 귀족, 혹은 평민 같은 신분이 주워지는 것처럼. 현재 우리는 당주와 원로원. 그리고 고위 귀족과 팬텀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어. 당주의 자리를 사울팽, 순 혈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은 고위 귀족, 고위 귀족 중에도 공작이나 대공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원로원. 그리고 팬텀은……. 먹이로 전락했다가 변이된 잡종이야. 참고로 내 저택에 고용된 자들은 모두 팬텀인데 그 안에서도 서열은 분명히 존재해.”
꿀꺽. 카멜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그의 뒷말을 앞당겼다.
“네가 궁금해 하는 에반 카멜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칠백 년을 넘게 살아 온 원로원 일원이었어.”
카멜은 혼란스러웠다. 에반 카멜이 기차 사고로 불에 타 죽고 유해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도록 한 연극 무대를 연출하기까지 알렌은 반년이란 시간을 투자했었다. 그녀가 판도라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울팽의 졸개들은 완벽한 무대의 엔딩을 장식하던 카멜의 절망이 한 몫 톡톡히 했으므로 에반 카멜이 완전히 죽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배신, 원망, 슬픔의 고뇌로 뒤섞인 카멜의 시선을 모른 척 무시하던 알렌이 손에 들고 있던 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이 신록은 우리들의 시조가 수천 년 동안 가톨릭 교황청으로부터 지켜온 거야. 그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우린 인간들과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하거든. 순혈종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 중에서도 지극히 일부만 읽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데 현재 사울팽의 자리에 앉은 메리 리플론에게서 목숨을 걸고 빼앗아 내게 전한 것이 바로 에반 카멜이다.”
“어째서……?”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공석이 된 권좌를 놓고 원로원이 지목한 상대는 바로 나였어.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데로 사울팽이 되려고 했지. 원로원들 중에서 가장 결정권이 높았던 자가 바로 나의 부친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메리 리플론이 아버지를 유혹한 거야. 아버지는 사울팽의 권좌에 오를 수 있는 권한으로 신록을 그녀에게 주었어. 난 닭 쫓던 개 신세로 남겨졌고. 거기서 모든 일이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메리 리플론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아버지를 배신했다.”
카멜은 알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자신처럼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마치 오래된 고통에 길들여져 아픔이 무뎌진 것처럼.
“네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 있는 동안엔 에반 카멜을 만날 수 없어. 괜히 움직였다간 은신처가 들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자도 나의 부친처럼 처형당할 거다. 되도 않는 죄 몫으로 발이 묶여 갈기갈기 찢겨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에반 카멜은 그만 잊어.”
카멜은 누군가를 위로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칠 새 없이 얼굴을 적셨다. 알렌이 안쓰러웠고, 자신의 처지가 불쌍했다.
에반 카멜이 한동안 알렌에게 밀교를 전하며 비밀스러운 왕래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메리 리플론이 절대 사울팽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논했던 자다. 언젠가 카멜의 생일을 기념하여 에반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었다. 그리고 그것을 편지에 동봉하여 루마니아에 있던 알렌에게 보냈었다.
‘아샤가 판도라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뒤엔 반드시 당주가 되셔야 합니다.’라고.
그렇다는 건 아샤 카멜을 먹이로서 키웠다는 말밖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에게 보여줬던 자애로운 모습 따위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 알렌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런 자를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카멜의 어깨를 감싸고 위로해 줄 자격이 있는가?
알렌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검은 장미에 둘러싸인 벌거벗은 여자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림 아래엔 ‘판도라’ 라고 적혀 있었다. 인간이 상상하는 순결한 처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신록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카멜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어리둥절했다.
“듣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에도 알렌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접고는 가만히 움켜쥐었다.
“안 돼. 궁금해도 참아.”
카멜은 약이 올랐다. 아버지라 믿고 있던 자가 뱀파이어였다는 사실도 충격인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책을 보여주면서 내용을 궁금해 하지 말라니. 갑자기 눈물이 뚝 그쳤다.
“왜 궁금해 하면 안 되죠?!”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자, 알렌은 건조해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힘겹게 대답했다.
“판초. 이 세상엔 직접 목격해도 믿지 못할 일들이 많아. 내가 뱀파이어라고 떠들어 댄 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기하학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난 그런 세상을 이미 육백 년이 넘도록 살아왔고, 앞으로 그보다 더 오래 살아갈 거야. 내 목숨이 허락하는 한, 네가 이 미쳐버린 세상 때문에 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당신한테 내 피를 제공하라는 말인가요?”
알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싫어! 너의 가녀린 몸에 이 무자비한 송곳니를 쑤셔 넣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흥분한 목소리로 카멜의 주위를 배회하던 알렌이 상처 받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렇지 않으면 넌……. 인간들 손에 죽게 되니까.”
“!”
알렌은 도저히 신록에 적힌 글귀를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없었다.
신의 은총을 받고 태어난 판도라.
판도라를 점령하면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는 그들만의 고착되어 버린 진실.
그리고 그것을 막고자 판도라를 학살하고 다닌 다는 ‘인간이자 인간을 저주하는 파수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때, 알렌은 인간을 먹이 취급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차례 나라를 이동하며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갔지만 그래도 그는 영국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영국은 자신이 태어났던 곳이며, 부친이 사형당한 곳으로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매년 5월이 되면 영국은 사교계 시즌이 시작됐는데 장소를 옮겨 다니며 남녀가 한데 어울려 말을 섞고, 몸을 섞어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고귀한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처럼 보였지만 겉모습만 화려할 뿐 뿌리는 이미 퇴폐적인 오염덩어리로 썩어 문드러진 족속이었던 인간들. 한적한 곳에서 그들의 육체적 쾌락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정사로 달아오른 몸뚱이에 송곳니를 쑤셔 넣고 갈증을 채우고 허기를 달랬다. 그것은 생존경쟁에 따른 필수불가결의 행위였으므로 일말의 후회도, 망설임도 없었다.
광적인 피의 향연을 즐기는 동안 몇 번쯤 마음에 드는 이성을 곁에 두기도 했다. 단순히 유희를 목적으로 한 상대도 있었고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던 여자도 있었다. 시몬, 크리스티나, 엘버른, 로즈……. 그러나 그녀들과의 관계는 길어야 몇 년 뿐이었다. 그녀들이 자신을 떠나 다른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시간에 길들여져 늙고 병이 들어 죽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알렌은 항상 보루를 만들어 놓았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괴로움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진심’ 따위 없는 육체적 사랑만 갈구하겠다는 보루 말이다. 그런데 이젠 카멜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만 같았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숨이 더 이상 펄떡거리지 않고 그대로 암흑 속에 잠식하여 꺼질 것 같았다.
지나친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카멜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일어서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카멜은 고난이 닥쳐 올 때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이겨내 왔다. 양부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가만히 누르면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고통 속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새까맣게 타 버릴 것 같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배게 밑에…… 죽은 쥐를 넣어 놨었죠. 툭하면 다락방에 가두고 조롱 섞인 노래를 불러댔어요. 이유 없이 매질을 해댔고 죽어버리라는 폭언을 뱉으면서 하루 종일 굶기기도 했어요.”
“카멜.”
“새어머니, 그리고 새어머니가 데려온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없을 때마다 그렇게 날 학대했어요. 차라리 버려진 게 잘 된 일인 거죠. 탄광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맞아가며 구걸을 배우는 게 훨씬 인간다운 삶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을 만큼……. 그때 내가 제일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요?”
“판초.”
“살인적인 추위도, 배고픔도 아닌 ‘사람’이 제일 무서웠어요! 겨우 열 살이었던 어린애였는데 말이죠! 그때 생사의 고비에서 극적으로 만난 게 바로 당신이에요. 기다리던 아버지도 아니고, 주님도 아닌 바로 당신. 난 당신에게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카멜은 솔직하지 못했던 알렌을 비난했다. 태생이 그러하니 번거롭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주기적으로 피를 상납해야 하는 먹이에 불과하다고 말해줬더라면 카멜은 지금껏 알렌에 대한 환상과 꿈으로 희망고문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멜의 눈동자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당신이 좋았어요.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내 손을 잡아 준 사람이니까. 꼭 다시 만나서 당신을 위해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바람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 질 줄은…….”
아아, 가여운 나의 판초.
알렌이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야무진 손이 알렌의 옷깃을 움켜쥐고 한없이 떨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괜찮다고 수 없이 속삭여주었다. 물론 그것으로 위안이 되지 않겠지만 알렌은 그녀가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더욱 그러안았다.
“10년 동안 널 기다리면서, 우리들의 존재가 결코 고귀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엄연히 따지면 우리는 괴물이니까. 그렇다고 전혀 인간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니야. 누군가를 원하고, 또 사랑해서 육체를 취하고, 결국엔 떠나보내면서 그리워하기도 해. 비웃어도 좋고, 고지식한 순혈주의 적 발상이라고 비난해도 좋아.”
“비웃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상관없어. 하지만 내 진심만 알아줘. 난 너의…….”
카멜의 작은 어깨가 부서지도록 강하게 끌어안았다.
“난 너의 분신이 되고, 너의 생명을 지키는 자가 되고 싶어. 연인으로서.”
카멜은 대답 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렌은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척추를 따라 내려가던 손이 허리에서 멈췄고 그대로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pandora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책상 위에 놓인 편지들을 살펴보던 알렌의 곁에 파울로가 다가왔다.
“성급하셨습니다.”
“네 훈계 따윈 듣고 싶지 않아.”
금고 안에 신록을 넣어 둔 파울로는 흡사 와인처럼 생긴 병에 담겨있던 붉은 액체를 빈 잔에 가득 따랐다. 이미 보름이 넘도록 단식하고 있던 터라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달콤한 향기는 알렌을 자극시키는데 충분 했다. 하마터면 품에 안고 있던 카멜을 범할 번했던 아찔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구입한 것이라는 걸 강조하던 파울로는 알렌이 미련 없이 잔을 비우자 두 번째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알렌의 입술에 핏빛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제 생각엔…….”
“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파울로의 입술 끝에 조소가 맺혔다. 가끔 이성을 잃고 직권을 남용하는 주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인데 그는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 생각엔 그레이엄 대공을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베라 루이님을 차후 사울팽으로 추대한다고 하십시오.”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파울로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것을 알렌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날짜가 찍힌 석간신문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펼쳐들자 런던 화이트 홀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56세 아이로 베티가 패딩 턴 역에서 사고사를 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새벽녘, 신원미상의 남자가 플랫폼에서 추락사 했다는 기사의 연장 소식이었다. 아이로 베티라면 카멜에겐 가족과 다름없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조사해 본 바로, 카멜 양이 돌봐 준 헬렌 올가는 그레이엄 대공의 사택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여자였습니다. 헬렌 올가는 행방불명이며 그녀를 쫓던 대공의 개떼들이 사고사를 위장해 아이로 베티를 죽인 것이라면 카멜 양의 존재를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제기랄…….”
“주인님께서 가지고 계신 막강한 권력은 그레이엄 대공을 손에 쥐고 흔드셔도 될 만큼 가히 위협적입니다. 때문에 대공이 사울팽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온갖 지저분한 청소를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카멜 양을 온전히 주인님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결정하셨다면 현재로선 그레이엄 대공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공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라는 소린가?”
“아주 가끔은 채찍보다 당근을 쥐어주는 것이 특효약이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파울로가 한 번 더 빈 잔을 채웠다. 누군가가 혼란스럽고 불안한 돌덩이를 가슴 언저리에 툭 던져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판초, 대답해 줘. 단지 네 곁에 있고 싶었던 것뿐인데. 널 지키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건 역시 무모한 짓이었을까?
“언젠가는 닥칠 일들이었습니다. 벌써 지치신겁니까?”
자칫 버르장머리 없이 들릴 수도 있을 법한데, 알렌은 그것이 파울로의 진심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신문을 집어 던진 그가 가만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 그 아이는 요즘 들어 잠이 좀 줄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주변 환경이나 벗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예민하게 굴진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보기보다 속이 깊고 인내심이 많은 아이입니다. 으레 걱정하실까봐 알려드립니다만, 제가 연구한 바로는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로 자랄 것이 분명하다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뭐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알렌이 말했다.
“캐터코움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봤나?”
“예.”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에반이 내게 보낸 지난 십년간의 편지에서 단 한번 거론했던 그 ‘연구’라는 게 뭔지……. 뭔가 꺼림칙칙해. 캐터코움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세히 알아보도록…….”
지독히 낮은 탄식과 함께 말끝을 흐린 그가 다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며 파울로가 대답했다.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
음. 뭔가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는 것 같군요.
궁금하신 점 있으면 가차 없이 절 조지세요.
매 맞을 준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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