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학림다방에서..... (한-덴 순환경제 포럼 다녀오면서)
2018. 9. 11 (화)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환경부에서 주최한 자원 재활용에 따른
‘한국-덴마크 순환(자원재활용) 경제 포럼’이 열렸다.
환경부 박천규 차관, 토마스 리만 주한 덴마크 대사와 플레밍 베센바처 칼스버그 그룹 회장 등과 함께
한국과 덴마크 양국의 환경분야 협력 방안과 자원 재활용에 대한 기술협력을 논의했다.
(뉴스에서 발췌함)
전년도에 우리회사가 자원재활용 선도기업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은바 있어서
환경부로부터 초청장이 와서 사장님 대신 제가 참석을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환경개선 ( 환경의 근본적 기능을 회복시키고 부흥하는 일 )을 위한
자원 재활용및 탄소배출 절감이 절실해진 작금에 이르러 민, 관, 학 등 관계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어 조금이나마 기여해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포럼을 갖게 된것이라 하겠다.
포럼 주최자및 발표자
취지 모두발언과 관련 연구 발표, 개선 사례, 질의응답으로 포럼을 마친후 리셉션을 끝으로 종료하다.
대학로(동숭동) 학림다방
오후 네시 , 포럼을 마치고 오는길에 혜화동 대학로에 들렸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니 주차 걱정이 없어 참 홀가분하다^^
시내에서 일(업무)를 보고서 집으로 가는길에 혜화동 대학로를 경유하므로 잠시 쉬었다 가는 맘으로.
대학로길을 잠시 걷다
"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
지금의 세대를 미리 꿰뚫어 보신듯.....
부디 이땅에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북돋워 지기를 입속으로 뇌아려본다.
구직을 하려는 청년들로 보여짐은 비단 나뿐이련가....
마로니에 공원 입구
대학로를 거닐어보고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서 좀 쉬다가
길 건너편의 학림다방으로 향하다.
학림다방은 옛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가 대학로에 있었을때 당시 문리대 축제인 학림제에서 따왔다고 한다
길건너편 2층이 학림다방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할
어떤것이 있노라고
학림다방
(좁은 계단 으로 올라가는 출입구에 붙어있는 문학평론가 황동일님의 글)
" 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와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쯤 어디에서간 서성거리고 있다.....
(중략)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할 어떤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홀로 고고한 섬속의 왕국처럼....
이 초현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
학림다방에 얽힌 이야기
학림 사건(學林事件) 에 대하여
81년 신군부가 학생운동 단체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전민학련이라는 대학생 단체가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의 학림다방이었기에 학림사건이라 하였다.
이태복등 24명이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결성한 혐의로 강제 연행된뒤 가족은 커녕 변호인도 못 만나게
차단후 온갖 고문 협박 등의 가혹행위로 자백을 받아내었고 (부림사건과 동일)
고문에 의한 자백이 법정에서 드러났으나 서울 검찰청과 배석판사 등은 이를 무시하고 징역형을 내렸다.
2012년 31 년만에 대법원에서 전원 무죄 판결이 났다.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공안조작사건인 ‘부림사건’은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한다.
1956년 문을연 학림다방은 낡은 나무색이 빛바랜체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오래된 세월속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공간이기에 나이 지긋하신분들과 젊은 새내기들이
자연스레 함께 할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LP판이 빼곡한 카운터.....
신청음악을 틀어주던 그시절의 추억을 곱씹게 하는 전축^^
2011년 어느날에 들렸을땐 2층에서 앉아
한개피 꼬나물고 낙서를 하였던.... (그때 사진 옮김)
(2011년 당시엔 금연이 아니었나보다)
학림다방과 전혜린
전혜린, 천상병, 이청준, 김지하, 황석영, 김민기, 전인권, 유홍준, 황지우,백기완 등 시대별 유명 인사가
모두 단골이었으며 송강호, 설경구,황정민등도 대학로 연극인시절 이곳을 곧잘 찾았다한다.
전혜린은 이곳에 오면 어쩐지 더 그리움에 취하곤 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스카프를 두른 채 앉아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 학림다방은 기억한다.
이곳의 분위기가 자신이 유학했던 독일 뮌헨의 슈바빙 거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녀에게 내재된 결핍을 채워준 환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내면은 광적이었으나
겉으로는 감정표현이 적었던 그녀의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곳이라고나 할까.
전혜린이 생의 마지막 날 찾았던 곳, 바로 학림다방이었다. 죽기 전 그녀가 학림다방에 남긴 메모지에는
“나는 두렵다. 그리고 죽고싶지 않다. 생은 귀중하고 단 하나다. 그리고 나는 실컷 살지 못했다”고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
1965년 1월 9일 토요일.
파란 하늘은 맑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후 들어 몇 시간째 며칠 전에 내린 잔설(殘雪)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이 모습이 학림다방에서의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다음날인 1965년 1월 10일 전혜린은 죽었다.
격정적으로 사는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생활하는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것은 그렇게
끔찍한일 어려운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삶에 집착한다 (전혜린 노트에서)
그만큼 집착한 그녀가 3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데 대해 애잔함이 번져난다.
31살이면....서른두해를 살다간.....이제 고작.....
저기 창가 어디쯤엔가 담배를 꼬나물고서 턱을괴어 우두커니 앉아 있었을 전혜린.....
방금 앉았다간 그녀의 다순온기와 여린숨소리를 상상하면서 짙은 페이소스를 느낀다.
스스로 타오르는 사모바르처럼 짧은 생애속에 찬란한 슬픔을 살다간 그녀이다......
학림다방은 60 여년의 세월속에 자리한 다방으로 사연이 묻어나는 시대적 명소가 되어져서
나이드신분들도, 젊은 학생들도 많이 찾는다. (옛맛이 좀 수그러든게 아쉽기도 하다만)
간혹 대학로에 들릴적마다 학림다방에 들렸지만 그때마다 비좁은 계단에 대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서 있어서 발길을 돌리곤 했는데 오늘은 평일 오후라서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잠시 쉬었다.
2018. 9. 13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