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의 저자 조선 명의 허준 묘
허준 묘 許浚 墓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민통선 안 해발 159m에 조선의 명의名醫로 소문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 부부묘가 있다.
허준묘가 세상에 알려지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재미 고문서연구가 이양재씨는 어느날 한 통의 옛날 간찰(편지)을 입수하였다.
"7월 17일 허준許浚 배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1991년 9월 30일 그는 허씨許氏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를 뒤적여 준浚자를 썼던 사람을 찾던 중,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 된 허준의 묘가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그는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일제시대 토지대장을 확인하던 중 하포리에서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 )의 이름을 찾았고,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허씨들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땅을 찾았다.
하지만 무덤이란 무덤은 이미 도굴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무덤이 유독 눈길을 끌었고, 무덤 주변을 발굴하던 중 두 쪽으로 동강난 비석을 발견하였다.
비석에 새겨진 명문 내용은 "陽平ㅇ ㅇ聖功臣 ㅇ浚" 이었는데, 바로 '양평군陽平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이었다.
☆ 구암 허준(1537~1615)
허준 선생은 조선 중기의 의관醫官으로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龜巖이다.
무관 출신으로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庶子로 선조 7년(1574년)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들어간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되어 왕실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선조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신 공로로 선조 37년(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을 받았으며, 선조 39년(1606년)에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으며, 정1품 문무관에게 주던 품계品階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나, 중인 출신 허준에게 과도한 예우라 하여 대간들의 반대 여론이 빗발치자 보류되었다.
선조 41년(1608년) 재위 41년 57세로 선조가 승하 하자 어의御醫로서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1년(1609년) 다시 복직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79세로 허준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살아 생전 보류되었던 정1품 문무관에게 주던 품계品階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추서되어 의관으로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 동의보감(국보319-1호)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선조 29년(1596년) 허준이 임금의 명을 받아 편집하기 시작한 한의학서漢醫學書로 임진왜란 후 어지러운 나라 사정으로 중단 되었다가, 6년간에 걸친 연구 끝에 광해군 2년 (1610년)에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은 총 5개 강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경편內景篇 6권, 외형편外形篇 4권, 잡병편雜病篇 11권, 탕액편湯液篇 3권, 침구편鍼灸篇 1권이다.
편집의 특징은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등 5대 강편 아래 , 질병에 따라 항목을 정하고, 그 항목에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히 열거하여 그 병중에 관한 증상을 중심으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의보감은 당시 조선 뿐만 아니라
청나라, 일본 등지에서도 영인본으로 발간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동양한의학의 성전聖典으로 활용되고 있다.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은 국보 제319-1호일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소설 허준 뒷이야기 / 東醫寶鑑 終話後談篇
<小說 許浚>
東醫寶鑑 終話後談篇
이 소설은 여러분께서 이미 읽은 바처럼,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몽진을 떠난 뒤, 허준이 그 환난중에도 "동의보감"의 자료묶음을 둘러메고 선조의 일행을 뒤쫓아가고,
기어이 동행을 자청한 의녀 미사가 그 참담한 고행길에 동참하며 둘만의 피난길에서 그간 사무친 사모의 정을 이슬처럼 애잔하게 내비치는 중에 중단되고 맙니다.
"일요건강"과 "주간부산"에 1984년 11월 11일부터 1988년 2월 14일까지 3년여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작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그리 된 것입니다.
李恩成氏는 自宅에서 緝筆中 지병인 心臟病으로 쓰러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 한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51세의 한창 나이로 1985년 1월 30일 오전 9시에 이승과 작별 합니다.
作家는 生前에 이 冊의 各券을 春夏秋冬으로 이름 붙이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동'편
한 권 분랑의 얘기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MBC TV의 일일연속극으로 방영되었던 "執念"을 소설화한 것인데 연속극으로서도 소설로서도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TV쪽에서는 비록 방영은 되지 못했으나 허준이 끝내 "동의보감" 을 완성시키기까지 10회 가까운 대본이 더 씌어졌고 그 대본에 잇따라 다시 야인으로 돌아간 허준이 펼치는 醫聖의 세계가 作家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작가가 못다 쓴 이후의 이야기를 대략 밝혀보면 이렇습니다.
허준과 미사는 천신만고 끝에 선조가 먼저 피난가 있던 開城에 무사히 당도하고 이후 의주까지 호종한다.
허준은 戰亂中에 임금을 至誠으로 받들고 傳㿕病 (전염병)을 구완한 功을 인정받아 마침내 정3품 통훈대부 어의의 자리에 까지 오른다.
그러나 새 어의로서 선조께 올리는 허준의 첫 시탕은 선조가 일찍이 먹어본 적이 없는 떫고 쓴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몇 해 뒤 정유재란이 터져 왜군이 다시 한양성 지척에까지 이르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허다한 고관대작들과 태의 양예수, 그리고 스승의 은혜를 못 잊어 허준이 특별히 자신의 보좌의관으로 지명한 유도지마저 체통을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그러나 허준은 몽진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고민하는 선조를 모시고 끝까지 도성을 지킵니다. 그리하여 허준은 왜적이 패퇴해서 물러간 뒤 한 번 더 두 단계를 승차, 정승 반열인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까지 이르고, 그 부인도 숙부인에서 정경부인의 칭호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대감'으로 불리는 허준의 누옥에는 여전히 가난한 병자만 득실거릴 뿐, 허준에겐 변변한 양반 갓 하나 가마 하나 없습니다.
이 무렵, 정유재란이 끝난 뒤 조정은 당쟁으로 더욱 살벌해지고 허준도 이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성대감이 위독하여 야밤중에 허준을 급히 부르는데, 성대감의 반대세력들이 먼저 허준의 집에 당도하여 그가 사병에 들었는가 알아낼 것과 절대 살리지 말 것을 엄중히 당부하고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허준은, 의원은 병만 고칠 뿐, 그가 누구인지는
알 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성대감이 보낸 가마를 탑니다.허준을 믿지 못한 성대감 식솔들이 탕제를 검수, 극약인 비상이 나오자, 허준을 죽여버릴 듯이 덤비지만, 성대감은 대인다운 신뢰로 그 비상을 마셨고 한때 혼절했던 성대감은 며칠 뒤 잠에서 깨어 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게 된다.
두 번의 전란을 겪었지만 조정의 당쟁은 끊일 줄을 모르고 마침내 다음 보위를 둘러싼 절대절명의 권력투쟁이 대궐 안에서부터 벌어지는데, 선조가 다시 새 왕비를 맞아들일 공론을 벌이는 듯하자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측에서는 광해군 자신이 그와의 오랫동안 말벗이요 지기였던 허준에게 마침 대비전의 시탕을 돌보는 미사를 시켜 돌아 가는 분위기를 염탐해줄 것을 세자빈과 함께 동궁 처소에서, 종내엔 허준의 집에까지 몸소 찾아와 간청한다.
허준은 의원과 의녀는 병 이외의 일은 알 수 없노라는 한마디로 거절한다. 이에 격노한 광해군은 허준에게 의절을 통고하지만 허준은 자신을 벌할 수 있는 것은 하늘뿐 임을 믿어 태산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허준은 다시 숭록대부가 면탈돼 종3품 으로 강등되고 의녀 미사를 혜민원으로 보내 거리를 두면서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시켜 그녀를 시집 보낼 궁리를 하지만 미사는 허준을 향한 일념으로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마침내 선조가 승하하고 모든 작록을 면탈당한 채 귀양길을 떠나게 된 허준은, 오직 허준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돕는 것을 생애의 보람으로 여기게 된 미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