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원본 지키기, 스리랑카 싱할리문자에 가두어 지킨 빠알리삼장과 주석서
전세계적으로 불교는 크게 상좌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로 나눈다. 이 중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불교가 상좌불교이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한 글로벌화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망각된 불교가 있었는데
인터넷 시대에 접하는 새로운 불교는 사실 오랫동안 우리들의 망각 된 불교이었다. 그런 불교가 있었다는 것 조차 모르고 불교전래 이래 1600년 동안 살아 왔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오져 오던 불교가 최근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스리랑카’라는 조그마한 섬나라의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스리랑카에서 상좌불교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다면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스리랑카의 눈물겨운 감동적인 이야기를 ‘청정도론’ 해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싱할리문자에 가두어둔 불교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 된 때가 BC3세기라 한다. 그 때 당시 전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불교를 전세계에 전파 하기 위하여 10군데에 전법사를 파견 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이 스리랑카 이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에 파견된 전법사가 아소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장로이었다. 이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그 때 당시 3차결집을 통하여 ‘공인불교’인 상좌불교의 삼장과 주석서가 전해 진 것이다.
그런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는 이천년 이상 어떻게 전승 되었을까.
첫째로 주석서의 전승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때 당시에 주석서가 싱할리문자로 기록 되어 전승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왜 그들은 빠알리 주석서를 싱할리문자로 기록하였을까.
AD5세기에 붓다고사 스님에 의하여 싱할리문자에서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 되었지만, 싱할리문자로 기록 되어 전승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해제에서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소카대왕 시절에 3차결집이 있었는데 이때 공인된 불교가 테라와다(상좌불교)이다. 그 후 인도 대륙에서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마하야나와 같은 새로운 사조의 불교가 난립하게 된다. 그런 불교에서 공인된 불교를 지켜 내기 위하여 빠알리어 보다 ‘싱할리문자에 가두어’ 둔다면 새로운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 한 것이다.
그렇게 싱할리문자에 갇힌 불교는 AD5세기에 붓다고사 스님이 인도문자(데와나가리) 빠알리어로 번역 될 때 까지 무려 700년간 싱할리문자로 전승 되어 온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다시 빠일리어로 번역이 된 이유는 시절 인연이 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 새로운 사조의 퇴각과 맞물려 있다. 새로운 사조에 물든 것을 일종의 ‘불교의 타락’으로 보고, 3차 결집에서 공인된 불교에 대한 복고열풍이 불어서 인 것이다.
원본의 훼손 없이
둘째, 빠일리 삼장의 문자기록이다.
빨알리 삼장을 문자화 하게 된 동기는 스리랑카에서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스리랑카에서 왕조의 변화가 있게 된 것이다.
스리랑카의 왓따가마니(Vattagamani, BC.104-88) 왕 때에 바라문 띳사가 모반을 일으키고 거기다가 기근과 침략까지 뒤따라 왕은 망명을 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된다.
이에 따라 왕조의 후원을 받던 대사(Mahavihara)의 비구들도 스리랑카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14년후에 왕권이 회복 되어 왕이 수도로 되돌아 왔으나 문제는 왕이 ‘무외산사(無畏山寺)’를 세우고부터 시작 된 것이다.
무외산사는 정통 상좌부의 대를 고집스럽게 이어 내려온 대사파에서 탈퇴하여 분파한 종파로서 그 때 당시 신흥부파가 난립 하였던 인도와 긴밀한 관계 이었고 ‘친인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자 대사파는 졸지에 의지 할 곳을 잃게 되고 그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빠알리 삼장의 맥이 끊길 것을 염려 하였다.
그 결과 왕도 모르게 외딴 곳에서 빠알리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팔리어 문자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후 1세기 초반에 당시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던 팔리삼장을 싱할러 문자(현재의 스리랑카 문자)로 패다라수 나뭇잎에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패엽경입니다. 역사적으로 팔리삼장은 최초 싱할러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팔리삼장입니다.
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구전으로 전승된 빠알리 삼장의 맥이 끊길 것을 염려하여 문자화 하였는데 그것이 싱할리 문자로 기록된 ‘패엽경’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싱할리문자로 가두어 둔 주석서와 빠일리 삼장은 원본의 훼손 없이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졌다. 그리고 다시 빠일리어로 옮겨 져서 미얀마, 태국등지로 전파 되었고, 근대 영국식민지 시절에 유럽에 전파 되어 자국어로 빠알리 삼장이 번역 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빠알리경전과 주석서 모두가 스리랑카 비구들의 눈물겨운 법에 대한 수호의 결과 이었다고 보면 틀림 없다.
이렇게 눈물겹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3차결집의 결과 공인된 불교가 교통과 정보통신이 발달된 시대에 글로벌화 된 것이다.
스리랑카는 어떤 나라
스리랑카는 어떤 나라일까. 위키피디아로 본 스리랑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다. 과거에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눈물'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국토의 생김새가 꼭 눈물 혹은 진주처럼 생겼는데 지리적으로도 인도의 꼬리 쪽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로, 남한의 약 2/3 정도 된다고 한다. 정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스리랑카의 인구는 2천만명으로 세계 52위이다. 종교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양의 눈물이라고 불리우는 스리랑카의 근대역사도 순탄치 않았다. 서세동점 시대에 있어서 유럽열강에 의한 제국주의의 희생국가이었기 때문이다. 차례로 스리랑카를 정복한 그 때 당시 제국주의 국가는 다음과 같다.
세개의 나라에 걸쳐서 외세가 식민통치한 기간이 무려 443년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스리랑카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불교국가로 다시 부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 공인불교를 지켜 낸 힘이 크게 작용 하였을 것이다.
승리한 나라, 스리랑카
그런 면에 있어서 스리랑카는 ‘승리한 나라’이다. 불교에 있어서 부처님의 승리에 관한 노래가 있다. 자야망갈라가타이다. 왜 이 노래가 스리랑카에서 사랑 받고 있고, 또 독립기념일과도 같은 공식행사에 많이 불려 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 많은 자야망갈라가타의 노래 중에 유튜브에 소개된 동영상이 있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행생활과 자랑스런 역사유적을 배경으로 한 자야망갈라가타는 스리랑카 소녀들이 부른다.
‘부처님의 승리’의 노래, 자야망갈라가타
노래를 부르는 스리랑카 소녀들
스리랑카 공식행사에서도 자야망갈라가타는 불려지는 듯하다.
스리랑카 불자의 결혼식
스리랑카 불자
스리랑카 민속축제
스리랑카 사찰의 일요불교학교1 출처 ; 수마나님의 스리랑카 유학일기에서
스리랑카 사찰의 일요불교학교2 출처 ; 수마나님의 스리랑카 유학일기에서
스리랑카 사찰의 일요불교학교3 출처 ; 수마나님의 스리랑카 유학일기에서
스리랑카 사찰의 일요불교학교4 출처 ; 수마나님의 스리랑카 유학일기(http://blog.daum.net/devamitta/348576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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