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빌렘(Nicolas Wilhelm, 1860~ 1938) 신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가톨릭 사제이자 선교사로, 한국 이름은 홍석구(洪錫九)다. 한국 역사에서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영적 아버지이자, 순국 직전 그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집전한 인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1. 안중근 의사 가족과의 인연
빌렘 신부는 1896년 황해도 지역 담당 선교사로 파견되면서 황해도 청계동에 살던 안중근 의사 가문과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이듬해인 1897년 안중근에게 직접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주었으며, 안 의사 일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 뤼순 감옥에서의 마지막 고해성사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뤼순 감옥에 갇히자, 빌렘 신부는 안 의사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뤼순으로 향했다.
징계를 무릅쓴 방문: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일제와의 마찰을 우려해 방문을 불허했으나, 빌렘 신부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감옥을 찾았다. 이 일로 인해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로부터 성무 집행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 미사와 유언: 1910년 3월 9일과 10일에 걸쳐 안 의사의 마지막 고해성사와 영성체(미사)를 집전했다. 이때 안 의사는 빌렘 신부에게 감사를 표하며 "아들(안분도)을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896년 황해도 담당으로 파견되면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친해져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선교생활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인종차별을 하며 이들을 상당히 깔보았다. 친일 행적으로 유명했던 제8대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와 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인 신자들을 무시하는 모습에 안중근이 잘못된 것이라며 지적하자, 격분한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구타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이 뮈텔의 구타에도 물러서지 않고 사례까지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자, 화를 풀고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빌렘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서양인 신자들과 동등하게 대했다. 그 후 빌렘 신부는 친일 성향이 강했던 당시 한국 천주교의 입장과 다르게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특히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빌렘은 안중근을 수차례 면회하였고, 사형집행 직전에는 직접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 주고 미사까지 교도소 면회실에서 집전하며 그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종교의식이 끝나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천주께서 늘 너의 곁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라는 마지막 위로를 건넸고, 안중근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아들인 안분도를 꼭 신부로 키워달라는 개인적인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3. 미공개 서한을 통해 드러난 기록
연세대 안중근 사료연구센터 등이 발굴한 빌렘 신부의 미공개 편지들에 따르면, 그는 안 의사의 옥중 생활과 거사 전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안 의사가 감옥 안에서도 금식과 기도를 이어가며 교도관들에게조차 귀감이 되었고, 일본인들마저 그의 처형을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안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했으며, 빌렘 신부가 뤼순에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예수 수난일인 '성 금요일'에 순국하기를 희망했다는 일화도 편지에 담겨 있다.
4. 조선을 떠난 말년
이후 뮈텔 주교와의 갈등 및 일제의 압박 속에서 1914년 고향인 알자스 로렌 지방으로 돌아갔다. 3·1 운동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펼치고자 탄원서를 냈으나 서울대목구의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38년 고향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뮈텔 주교의 일지 등에 따르면 유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김규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막후에서 지원한 정황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