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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남쪽의 왕이 북쪽 왕의 왕국으로 왔다가 자기 왕국으로 돌아가리라.
다니엘서에는 계속해서 남쪽의 왕과 북쪽의 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남쪽의 왕은 이집트를 말하는 것이고 북쪽의 왕은 지금의 시리아로 불리는 메데 페르시아(이란)을 시리아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위치입니다. 당시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북쪽왕 시리아와 남쪽의 왕 이집트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북쪽인 바빌론 근방을 남쪽의 이집트왕이 갔다가 이집트로 돌아오는 것은 약탈된 예루살렘의 금은 기명들을 다시 북쪽의 왕으로 부터 탈취하여 이집트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이 있으니 끊임없이 시달리는 일들의 반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개역과 킹제임스의 번역이 많이 다릅니다.
So the king of the south shall come into his kingdom, and shall return into his own land.
KJV 다니엘 11장 9절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그대로 직역을 한 느낌이 듭니다.
북방 왕이 남방 왕의 나라로 쳐 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
한글 개역 다니엘 11장 9절
그래서 남쪽의 왕은 그의 왕국으로 들어와서, 그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번역기 직역]
한글 개역개정은 거꾸로 읽힙니다. 이러한 번역에 대해서 저도 알기가 어렵네요ㅠ
그러나 남쪽왕인 이집트 프톨레미왕조와 북쪽 왕인 시리아 셀루코스왕조의 전쟁으 흐름으로 보면 남방 왕이 북방 왕을 계속 공격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한글 킹제임스의 직역대로 이집트의 시리아공격이 잦아드는 모습으로 읽히는 것이 맞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부추김을 받아 많은 군대들의 무리를 모을 것이며 한 사람이 반드시 와서 홍수처럼 휩쓸며 진군하리라. 그후에 그가 돌아와 선동되어 그의 성채에 이르리라.
'실루커스 칼리니커스의 아들들'은 셀루쿠스 3세인 '소테르'와 안티오쿠스 3세인 '마그누스'를 가리킨다. 이들이 남쪽을 대항하여 싸웠으나 또 실패한다. 고로 남쪽 애굽은 심히 교만하게 되었다(오늘날로 보면 미소 냉전구도에서 사실상 승리한 미국의 교만에 비길 수 있다). '소테르'는 B.C. 227년경 왕위에 올랐다가 소아시아 전쟁에서 동료들에게 살해되었고, 그 동생 '마그누스'가 왕위를 이어 남방 왕에게 빼앗긴 영토와 재물을 되찾기 위해 원정을 나서게 된다. 초반에는 강성하여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치고 들어간다.
그러면 남쪽 왕은 화를 내고 나가서 그와 싸우리니 곧 북쪽 왕과 싸울 것이라. 북쪽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남쪽 왕의 손에 주어지리라.
이 예언과 같이 크게 노한 남방 왕 프돌레미 4세는 안티오쿠스 3세인 '마그누스' 군대를 반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남방 왕 프돌래미 4세(유엘게데스의 장남) '필로파트로'가 북방 왕 '마그누스'를 대패시켰다. 이것은 라피아(Raphia)란 땅에서 된 일이다(217년 폴리비어스 책에 기록).
남쪽 왕이 그 무리를 사로잡아갈 때에 그의 마음이 높아져서 수만명을 넘어뜨릴 것이나 그가 그 일로 힘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
이것은 남방 왕 프돌래미 필로파트로가 교만해질 것에 대한 예언인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굉장히 교만해지므로 수만 명의 시리아 포로군들을 사형에 처한다. 동시에 그 교만이 확장되어 유다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이르러 율법을 멸시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 죄로 인하여 그는 세력을 더하지 못하고 쇠패의 길로 접어든다.
이는 북쪽 왕이 돌아올 것이며 전보다 더 큰 무리를 일으키고 또 큰 군대와 많은 부를 거느리고 몇 년 후에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라.
남방 왕의 교만이 재기해서 힘을 모은 북방 왕의 침공으로 꺽이게 된다. 안티오쿠스 3세(마그누스)는 대군을 거느리고 남방 왕을 다시 공격해오므로 이 예언이 성취됐다(주전 205).
그 때 많은 사람이 남쪽 왕을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이며 네 백성의 강도들도 그 환상을 세우려고 스스로를 높일 것이나 그들은 넘어지리라.
곧 실루커스의 안티오쿠스 3세가 프돌래미 4세를 침략하러 가는 길에 유대인들 중 어떤 자들이 거기 합세할 것을 예언함이다.
네 백성의 강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네요. 유대인이지만 세상의 소망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집니다. 후에 이일로 인하여 이집트의 미움을 받아 예루살렘이 공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므로 다니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 전쟁이 일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속국처럼 되었던 터라 남-북간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집트 세력을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친 헬라파(실루커스) 유대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계획은 프돌레미 왕조의 '스코파스' 장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북쪽 왕이 와서 토루를 쌓고 가장 견고한 성읍들을 취하리라. 남쪽의 군대들과 그의 택한 백성도 저항하지 못할 것이며 저항할 어떤 힘도 없을 것이라.
안티오쿠스 3세 '마그누스'가 애굽을 쳐서 대승하고 교만하여 임의로 행동하였다.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폈기에 남방 왕 프돌래미 5세인 '에피파네스'는 북방 시리아 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대적하러 오는 자가 자신의 뜻대로 행할 것이며 아무도 그 사람 앞에 설 사람이 없을 것이라. 그가 영광스러운 땅에 설 것이요 그 땅은 그의 손에 의하여 진멸되리라.
유다 땅까지 들어와서 많은 유다인을 죽였는데, 이렇게 된 것은 그 당시 이집트군대가 이스라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유다는 많은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 영적 유다인 한반도의 현실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다시 예언함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과 경륜 속에서 신약종말의 한국은 구약종말의 유다와 동일한 사명으로 택정된 것이다.
이집트 군대가 북쪽왕을 치러 갔다가 그들의 방비가 견고하여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북쪽왕을 도왔던 예루살렘을 안식일에 침공함으로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BC 168년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침공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당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는 또한 그의 온 왕국의 힘으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사람들로 그와 더불어 관계를 정립시키면 그가 그렇게 하리라. 또 그가 여인들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녀를 부패시키려 할 것이나 그녀는 그의 편에 서지 못하고 그를 위하지도 못하리라.
다니엘 11장 9절 ~ 17절
'화친'한다 함은 팽팽한 남북간의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안티오쿠스 3세가 낸 꾀를 가리키는데, 당시 애굽은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상황이다. 당시의 로마라 하면 유럽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급부상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북방 왕은 전술을 바꿀 수밖에 없던 터였다. '화친'이란 곧 '궤휼'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미-소 관계를 살펴보면 '궤휼'이라는 단어의 진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클릭하라). 러시아에서 시작된 모든 '평화운동'은 전부가 가짜이며, 미국이 말하는 '동반자적 관계'도 모두 다 거짓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다니엘서 11장의 내용이 말해주는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은 참으로 대단한 거짓말이었다. 모든 궤휼이 이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방 왕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군이 시리아를 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딸(클레오파트라)을 애굽 왕(돌레미 에피파네스; 당시 7세)에게 준 것은 애굽을 지배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으나 열매맺지 못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자기 남편을 사랑하므로 오히려 애굽과의 동맹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부루투스에게 살해당하고 안토니우스를 이긴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안정을 위하여 삼두정치체제를 만들고 정적인 안토니우스를 동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로마에 통치하였습니다.
{기원전 32년 2차 삼두정치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옥타비아누스에게 대적했다. 안토니우스의 패인은 이것이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자식을 버렸고,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뒤 로마의 속주로 삼지 않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물려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정보를 로마 정계에 흘려 안토니우스를 깎아내렸다.
로마가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그의 유서가 미리 공개되면서부터다.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이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며, 자신과 아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리아의 호화로운 묘에 묻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적으로 규정하고 선전 포고를 했다.
기원전 31년 초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메토네를 점령해 선수를 쳤고, 그해 9월 두 세력은 그리스 북서부 악티움에서 격돌했다. 안토니우스는 패배하고 이집트로 달아났고,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했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천하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악티움 해전
후에 티투스의 예루살렘 2차 정복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포로들이 건설한 콜롯세움에서 이 해전을 재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콜롯세움은 물을 채울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두 개의 테아트룸’, 즉 ‘두 개의 반원형극장’을 마주보게 하여 붙인 원형극장을 만들고 이것을 암피테아트룸(amphitheatrum)이라고 불렀다. 네로의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헐어내고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 티투스 목욕장을 세웠으며, 도무스 아우레아의 인공호수 자리에는 배수시설을 하여 원형극장을 세웠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을 세우면서 그 옆에 있던 높이 35미터나 되는 네로 황제의 거대한 황금동상 콜로수스(Colossus)는 헐지 않고 얼굴을 태양신으로 바꾼 채 세워두었다. 이 ‘원형극장’은 중세에 ‘콜로세움(Colosseum)’으로 불려졌는데, 이 명칭은 ‘콜로수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콜롯세움이 건설되는 시기는 AD 70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가 AD 33년쯤 이므로 37년뒤에
지어진 것입니다. 티투스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주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서 로마의 네로황제는 티투스를 보내 제압하려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은 견고하고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싸워 매우 힘든 싸움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성의 서쪽벽 일부를 남겼는데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통곡의 벽입니다. 1948년에 아랍과 이스라엘의 6일 전쟁으로 회복한 그곳입니다. 티투스가 이벽을 남긴 이유는 자신들이 함락시킨 예루살렘이 이처럼 견고한 성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개선문에도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킨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었므로 그곳에는 금장식이 많았는데 불이나면서 금이 돌 사이로 녹아 흘러내렸고 그것을 꺼내기 위하여 로마 병사들은 건축물을 파헤쳐놓은 것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그 날이 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
누가복음 21장 6절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예언의 연속선 상에 있습니다. 즉 위의 누가복음 21장 6절은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이고 이 예언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 까지도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복되는 예언일 수도 있고 또는 반복되는 실행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사로잡혀갈 것이요,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누가복음 21장 24절
AD 64년에 로마황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유대인들의 방화라고 소문을 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고 AD66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 반란은 방화소문과 마찬가지로 조작된 것으로 보이고 일방적인 예루살렘 침공에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싸운 것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을 하는 자들이 행사를 위하여 각지에서 모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요.
그리고 티투스에 의해 진압되고 예루살렘은 약탈되고 노예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콜로세움 건축에 동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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