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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3월 25일 금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 고을의 처녀 마리아에게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임을 예고한 날이다. 성경 말씀처럼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명을 받은 천사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인사를 받으셨고, 이에 마리아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신다. 이러한 순명으로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셨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루카 1,26-38)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말씀의 초대
이방 민족에게 침공을 받고 다윗 왕실이 불안해할 때,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한다. ‘임마누엘’이란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몸소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시어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하셨다(제2독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 사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전한다. 마리아는 이제 하느님께 선택받은 여인으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본당을 돌아보면 매일매일 교리실마다 레지오 단원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탁자 위에 조그만 성모상 하나, 꽃 한 송이 마련해 놓고 묵주를 손에 잡고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봐 주지도 않는 후미진 작은 교리실에서 이들이 바치는 기도 소리가 참 아름답게 들립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가난한 시골 처녀, 그저 흔한 이름에 불과했던 마리아. 하느님께 기도하며 풀꽃처럼 살던 보잘것없는 이. 이 작은 이 안에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잉태되십니다. 보일 듯 말 듯, 여리고 가난한 작은 이의 소박한 기도 속에서 세상 구원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성모님의 영성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모님처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풀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처럼, ‘사막 어디엔가에서 사막을 아름답게 해 줄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산을 생기 있게 해 줄 ‘이름 모를 풀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들의 기도는 교회의 ‘영적 우물’이 되고, 교회 영성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와 구원은 영웅호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묵주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넘기며 기도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일구어 내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모님의 모범을 배운다면, 우리가 모두 작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입니다. 기쁨의 이유를 ‘은총’이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면 기쁨도 가득하다는 암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물질이 넘치고, 건강이 받쳐 주면 ‘자동적’으로 기쁘게 되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근본’은 은총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은총이 있어야 함을 천사는 알려 주고 있습니다. ☆☆☆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십자가도 받아들이려 합니다. 오히려 그런 희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은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에 힘쓰는 이들은 삶의 불가능을 차츰 ‘가능한 일’로 바라봅니다. 할 수 없다고 제쳐 두었던 일을 극복해 나갑니다. 하늘의 힘이 끌어 주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체험 자체’가 은총입니다. 사업이든, 인간관계든 그렇게 해서 ‘생각도 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감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났기에 삶이 바뀌십니다. 평소의 신앙생활이 어떠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천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높으신 분의 힘’이 하시는 일이라고만 답합니다. 그러고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기를 가진 ‘엘리사벳’ 이야기를 합니다.
둘러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께서는 순순히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움직여 나가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담긴 ‘높으신 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자식의 십자가를 안고 가면서도 그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 어머니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자녀는 힘들고 괴로울 때 어머니를 먼저 떠올립니다. 자신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길’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만 답합니다. 그러고는 노년에 아기를 가진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끄심과 깨달음이 답일 뿐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분의 이끄심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께서도 선뜻 답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다르게 움직이는 것들 앞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의 평화를 만납니다.
우리 각자가 펼쳐진 성경이 된다면
- 구인회-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탄생과 역할 또한 계획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분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 이곳에서 이루도록 그분께서 내게 주신 일을 성심성의를 다해 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시 틈을 보이면 어느새 내 맘속에 욕심과 유혹 등이 비집고 들어와 내 삶의 주인이 된다.
우리 각자한테는 하느님께서 뜻하신 역할이 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직무거나 가정,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일 수도 있다. 비록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하찮고 비천하다 할지라도 그 일을 나에게 맡기신 분, 나에게 그 자리에 있도록 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각자의 몫에 충실하고 그 일을 통해 주님 말씀을 실천하며, 일자리를 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부모로, 교회 봉사자로, 가게 주인이나 점원으로, 선생님으로, 회사원으로 어떤 일을 맡고 있더라도, 그 일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우리 각자가 펼쳐진 성경이 된다면 천국이 따로 있겠는가. 비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더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통해 당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하고 뜻하신 바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말자.
사람들은 이 농부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괜찮다며 웃으니까요. 이 농부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가 10%나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습니다.
남은 사과들이 강력한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데 착안을 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합격사과’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브랜드화해서 일반 사과의 10배에 가까운 가격으로 수험생들에게 판매를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0배나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아오모리 현은 전국적인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 한 명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농부 덕분에 절망의 상황을 희망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겨우 10%만 남은 사과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우리의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인류 모두에게는 기쁨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아직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지요. 더군다나 15~16세의 나이에 엄마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성모님께서 너무나 어리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모님에게는 분명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앞서 한 농부의 긍정적인 생각이 그 지역 모든 농부를 부유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순명하신 성모님 덕분에 온 인류가 구원의 은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쉽게 좌절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황이지 결코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거울 같은 성모님>
절친한 친구의 생일을 맞아 진심이 담긴, 그리고 꽤 값나가는 선물을 준비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드디어 생일날입니다. 찻집에 마주 앉아 준비한 선물을 꺼내 친구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애써 선물을 준비한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기 예수 잉태는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선물이었습니다. 선물도 그냥 선물이 아닌 ‘대박’ 선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초대박 선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위로부터 오는 선물(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구세주의 잉태)에 자신을 100% 개방하였고,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결국 그 선물로 인해 팔자를 고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참으로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믿음이 계속 성장해나갔다는 것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믿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있는 희미한 상태에서도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성덕으로 온전한 믿음으로 충만하셨으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통스런 신앙 여정을 걸어가시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계속 성장해 나가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순종하는 믿음의 덕은 또 얼마나 영웅적인지요?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봤을 때 도저히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대 사건, 아기 예수의 잉태 사건 앞에서 보여준 성모님의 지성과 의지의 통한 완전한 순종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참 신앙인의 모델을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순례 길에 서 있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는 응답은 마리아의 온전한 개방성을 증명합니다. 이 응답은 마리아의 하느님 인류구원사업에 대한 전적인 개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개방성은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 예고 때뿐만 아니라 한평생에 걸쳐 지속됩니다. 탄생 예고 때부터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응답과 개방을 통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최대한의 모성적 협력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업이었던 ‘구세주의 탄생’, ‘말씀의 강생’ 사업의 성공을 위해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게 ‘예’하고 응답한 마리아의 모범이 오늘 우리 삶 안에서 되풀이되면 좋겠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당부가 오늘 하루 우리 생활 안에 계속 메아리쳤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을 찬송하는 마리아의 영혼이 깃들고, 또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 안에서 마음 기뻐 뛰노는 마리아의 영혼이 깃들었으면 합니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두렵습니다 - 오민환- 유다인들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은총이 대단하고 은총이 앞선다 -김찬선신부- 우리 가톨릭은 마리아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공경합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하나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에 있어 구약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운명이 구약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하느님의 의지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를 신이라 한다면, 하느님이 보내신 분,
그분을 드러내시는 계시자는 그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본다면 하느님과 당신이 서로
하나임을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유다인들을 설득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증언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큽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증언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요한 5,33 이하 참조).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더 확실히 알아갈수록 그들의 살기는 더 커집니다. 오랫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진리를 아는 경건한
종교인이었으나 율법의 힘으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키워놓았을 뿐입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전에는 거부감도 많았지만
지금은 일부 잘못된 마리아 공경에 대해서만 거부감이 있습니다.
오늘의 축일도 잘못된 공경의 차원이 보이면 거부감이 있습니다.
주님 수태를 마리아의 수락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거부감이 있습니다.
왜냐면 마리아의 수락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다 대단하지 않고
하느님의 그 사랑의 뜻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수락을 거부했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좌절되었을까요?
그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을까요?
좌우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좌우되어서는 아니 되지요.
마리아가 수락을 거부하지 않았겠지만
거부했더라도 구원의 역사는 좌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것을 수락할 수 있도록
엄청난 은총을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위해 예비하시고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대단한 것입니다.
교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저도 마리아와 같은 은총을 받았다면 마리아처럼 했을 것입니다.
은총의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요?
예, 차이가 있습니다.
인류 구원의 특별한 역사를 위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을 더 많이 받고 적게 받는 차이가 아니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은총과 그렇지 않은 은총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고 가득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어떤 것이든 한 방울로도 충분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은총을 가득히 받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은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지만
은총을 받는 것은 나입니다.
평양 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이 은총이 은총이 아니라 성가심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만 되는 것이 싫은 사람은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어니가 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누구든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당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이 말씀에 기초해 마리아처럼
“거룩하고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가 됩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말씀으로 오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내쫒지 않고 모시들이기만 하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복이
덩굴째 들어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전삼용신부-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예비신학생 복사들에게 수고했다고 오만 원을 주며 출출할 테니 집에 들어가기 전에 뭘 좀 사먹고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중고등학교 학생이기에 그 정도는 되어야 떡볶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아이들이 저를 다시 찾아와서는 그 돈을 다시 내밀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액수라 신부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받는 것도 사랑이고 받지 못하면 주지도 못하게 된다고 다시 가져가 함께 무엇을 좀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받는 연습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아이들의 마음이 착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제가 주는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하는 것은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체험하고는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청을 드립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시려고 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면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목숨까지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주는 것도 자신을 잊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받는 것도 사실은 자신을 버려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자신들이 준 선물을 신부님이 사용해 주기를 원합니다. 저도 누구에게 준 선물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구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잘 사용하고 싶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선물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그저 물건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하시고 싶었던 것은 당신 자신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아셨다면 어떻게 그 분을 세상에 주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적어도 한 사람만이라도 그 분을 온전히 받아들일 사람이 있어야 그 분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려운 신학 강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듣고 싶어서 앉아있는 사람들이 유치원생이라면 그 강의는 하나마나이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명, 그것을 알아들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신학강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주실 때 바로 단 한 명 온전히 자신을 비운 성모님 한 분을 보셨던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 부르는데 사실 ‘예고’라는 말은 오늘의 신비를 충분히 표현해주지는 못합니다. 예고는 그렇게 일어나리라고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 성모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탄생은 예고대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당신 자신을 세상에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준다는 뜻은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은 사랑의 정점인 ‘혼인’의 신비를 의미합니다. 혼인은 서로가 자신의 전부를 줄 만큼 사랑하고 상대의 전부를 받을 만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인 성자를 세상에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성자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한 몸이 되어서 그가 받을 고통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 앞으로 구세주의 수난이 어때야 하는지는 감추어져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는 마치 혼인 서약처럼 한 번 “예!” 함으로써 평생 일어날 모든 일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지금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 또 부활의 영광을 넘어 당신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지속될 서약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하란으로 보내며 아들인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납니다.
우물가는 혼인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아내를 만난 곳도 우물가이고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과 참 남편에 대해 이야기 한 곳도 우물가입니다. 우물은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성모님을 통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결국 레베카로부터 이사악의 아내가 되겠다는 동의를 받아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성모님께서 천사에게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는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렇게 이 내용을 오늘 축일을 지내고 있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과 비유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듯이 당신 아들의 신부의 동의를 받도록 천사를 보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와도 혼인하기 위해 당신 자신, 즉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신비입니다. 그것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우리 신랑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분과 한 몸이 되어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성모님처럼 온전히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또 온전히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오늘 있었던 “혼인서약”의 완전한 모델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온전한 혼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모님처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운 승낙을 매 순간마다 그 분께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모든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을 매 순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 분이 삽니다.
오늘 성모영보 축일은 이런 의미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모든 영성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온전히 버린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그리스도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와 함께 우리 영성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단순함과 소박함에서 오는 기쁨>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쑥쓰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왠만해서는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붙임성이 많고 또 인사성이 밝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또 그분들과 몇 마디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얼마나 순수하고 또 단순하신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게들 사시는지... 솔직히 그분들의 삶은 저보다 훨씬 영적이고 또 하느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며 그렇게들 살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은 이미 이 세상의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멸시, 소외에도 이미 깊이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왠만한 십자가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을 수용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데 완전히 이력이 나신 분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살아가시는 분들, 그분들의 장점은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또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왠만한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시련들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 길에 상당히 동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상상은 무참히도 깨어질 것입니다. 자신이 잘 났다고 여기는 사람들, 큰 소리 떵떵 치는 사람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 하느님 앞에 큰 코 다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와 같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정 견디기 힘든 십자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려니 하고 기쁘게 지고 가는 사람들, 언제나 어디서나 기쁘게 "예" 하고 응답한 사람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둔해 보이는 사람들,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상급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들 안에는 교만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순하고 소박함에서 오는 감사함과 기쁨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기쁘고 기꺼운 응답(피앗)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음과 가난함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늘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만심이나 이기심이 극에 달했기에, 우리 자신으로 가득 차있기에 하느님께사 개입하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비참하게 되면 비참하게 될수록, 깨지면 깨질수록, 천대받고 모욕당하면 당할수록 우리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시련의 때, 고통의 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은총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Ave Maria)!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던진 첫 인사말입니다. 우리의 인사말과 별 차이도 없는 평범한 인사말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리아.”
그러나 이 평범한 인사말을 기점으로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조용한 인사말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우리 인간의 비참을 관통합니다. 이 간단한 인사말을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도로서의 새 삶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가브리엘 천사는 매일 아침 우리 집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외칩니다.
“아베, 스테파노!”
“아베, 베드로!”
“아베, 데레사!”
다시 한 번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텐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다고, 그 표시로 오늘 새로운 하루를 선택하셨다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라고, “아베, 스테파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한 거룩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사제관 문을 두드릴 때 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베!”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을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귀찮게 할 때 마다, 그는 “아베!”하고 외치며 천사의 부르심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아베 마리아!”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Fiat!(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으로 응답한 마리아의 신앙을 큰 목소리로 찬미하는 하루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나라,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인류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완수를 위해서는 미약하지만 우리 각자의 기여도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의 협조도 필요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 대한 충실, 이웃들 안에 들어있는 나와 다름을 기꺼이 참아내기, 매일 다가오는 십자가들을 당연히 끌어안기, 이웃들의 작은 요청들을 기쁘게 들어주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미세한 몸짓들...
정체성과 사명 -정명숙 수녀-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았다는 라베르나 산에 있는 성당에
서약과 책임 -전삼용신부- 혼인서약은 혼인하는 당사자들이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이런 식으로 서약을 합니다. “나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를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아내만을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며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서약합니다.” 물론 신부의 서약도 이와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이미 혼인서약을 하면서 두 사람은 그들이 함께 걸어가야 할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가 오더라도 사랑엔 변함이 없을 것임을 미리 서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서약은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의 의무 안에서 살기를 결심하는 것이지 혼인식과 함께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하느님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수도자들은 순명, 정결, 가난 서약을 하고, 수도자가 아닌 성직자들은 가난 서약은 하지 않습니다. 이 서약은 혼인 서약과 마찬가지로 죽기까지 지켜야 할 의무로 남습니다. 부부가 부부로 남기 위해서는 이 서약을 서로 존중하며 지켜야하는 것처럼 성직자나 수도자도 그렇게 남기 위해서는 본인들이 한 서약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서약을 다 잘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는 이혼하기도 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옷을 벗기도 합니다. 이혼하거나 옷을 벗지 않는다고 해서 그 서약들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우리는 서약했던 것들을 어긴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서약들이 지켜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묻습니다. 오늘 축일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 부르는데 사실 ‘예고’라는 말에는 그저 주님 탄생을 미리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이 순간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순간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천사의 말에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온전한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마치 사제가 혼인하는 신부에게 ‘아무개를 남편으로 맞아들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없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이 순간은 인류 역사 안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님의 힘이 성모님을 덮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5절 이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은 세상에 오시며, “당신은 나를 위해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 예! 제가 당신의 뜻을 이루러 갑니다.” 이는 성자께서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모님의 육체를 아들을 위해 마련하시고 아들에게도 그 육체를 받을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아들은 성모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꺼이 선언합니다. 이렇게 성자의 ‘예!’와 마리아님의 ‘예!’가 결합되면서 두 분이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한 육체 안에 두 개의 심장이 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성모님께서 시메온에게 “당신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기 이전에도 구원자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어떠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물론 성자께서도 육체를 취하시기 이전에 육체를 취하는 것이 결국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잘 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며 아들인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그 종은 우물가에서 만난 레베카를 이사악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청하고 결국 승낙을 얻어냅니다. 교부들은 이 내용을 오늘 축일을 지내고 있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과 비유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듯이 당신 아들의 신부가 될 사람의 동의를 받도록 천사를 보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오늘은 성자와 마리아와의 혼인서약일입니다. 두 분은 당신들이 하신 혼인의 서약을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혼인의 계약은 이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분과 한 몸이 되는 것은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밭과 십자가도 동시에 주어집니다. 우리의 혼인 서약은 세례 때 하였습니다. 세례 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서약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처럼 우리는 그 서약을 잘 지키며 살지는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성모님께서 영혼을 관통하는 고통까지도 감수하며 온전히 그 약속을 지키셨듯이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을 결심을 하고 매일 성모님의 모습을 목표로 새롭게 변화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창조의 "Fiat" -김찬선신부- 어제 저에게도 기쁜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기억력이 좀 부족한 사람에게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지요.
새로운 시작
-조성풍 신부- 우리는 오늘 부활시기를 보내면서 동시에 주님 탄생 예고를 듣고 있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 이동훈 신부- 교황 요한 23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평범한 시골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신부가 교황이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분의 겸손한 품성이 잘 표현된 감동적인 영화였다.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성모영보대축일 -오상선신부- 오늘 하느님께서는 대 프로젝트를 구상하시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설레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삶이란 것, 때로 불공평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한 평생, 아무런 아쉬움 없이, 건강하게, 고생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모르고, 귀공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 전체가 십자가 투성이인 사람이 있습니다. 한 고개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십자가의 틈바구니에 끼여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얼굴 표정은 어찌 그리 환한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한 형제, 하는 말도 얼마나 어여쁜지 모릅니다. “하도 겪어봐서 그런지 이젠 십자가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젠 십자가가 다가오면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번 십자가는 나를 어떤 길로 이끌 것인가, 기대하면서 그렇게 십자가를 기다립니다.” 매일 져야만 하는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형태의 십자가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십자가가 있는데, 한 ‘존재’ 자체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십자가가 다른 십자가에 비해 더 무거운 이유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칠 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입니다. 어차피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면 기쁘게 지고가야겠습니다.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면 그 십자가는 더욱 크게 다가오겠지요. 오히려 호기심과 더불어 기대감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이번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번 십자가는 어떻게 다루면 쉬운가, 어떻게 해야 극복이 가능한가, 흥미를 지니고, 연구하면서, 실험해가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요, 인내요, 도전정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여유입니다. 유머입니다. 큰마음입니다. 이왕 다가온 것,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너무나 가혹한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 물론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엄청난 부담과 희생, 고통이 예견되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는 성장한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언젠가 그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도 목격해야 합니다. 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무기력하게 그냥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모님께서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전체를 위해 삼십년간 고이 키워온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낸 것, 결국 아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더 큰 사랑을 위해 아쉽지만 그를 놓아주신 것...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 어떤 상처든,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든, 그 뭐든 떠나보냄, 그 고통스런 순간을 잘 극복한 성모님이셨기에,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는 영광을 입게 된 것입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너무나 가혹한 십자가 앞에 성모님은 호들갑을 떨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니 기쁘게 수용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고이 끌어안으셨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축일-Fiat -김찬선신부- 3월에 요셉 축일과 성모님 축일이 같이 있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마리아의 고백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교회의 모습 -허찬란 신부-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상지의 옥좌 -정복례 수녀- 마리아의 응답은 모든 부르심에 응하리라는 준비성을 보여주며, 여기서 바로 마리아의 ‘Fiat’이 선언되었다. 마리아의 대답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에 이미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마리아의 ‘예’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마리아의 이런 완전한 맡김은 그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완전한 믿음’을 나타내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완전한 순명을 읽을 수 있다. 믿음과 순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가 진행되도록 그 문을 열어준 분이 바로 마리아다. 인류의 멸망이 하와의 불순명 때문에 왔지만 마리아의 ‘예’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순명 -김훈일 신부-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일로 하느님을 섬기려고 애쓰는 것보다
<산소 같은 남자> -양승국신부- 요즘 저 같은 열렬한 축구팬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이고 있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축구선수가 한 명 있습니다. 유럽 3대 빅 리그 중에 하나인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명문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당당한 주전 공격수 박지성 선수입니다. 그는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유럽 빅리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다 축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평발’의 소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 말리는 주전경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청년입니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는 많은 이들의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기 위해 많은 축구팬들은 새벽녘까지 TV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심야에 생중계되는 박지성 선수의 축구시합 때문에 수도생활에 ‘큰 지장’을 받고 있는 몇몇 신부님, 수사님들도 계신다는 후문입니다.
박지성 선수가 팬들을 매료시키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게는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산소탱크’입니다. 전 후반 내내 쉴 틈 없이 그라운드 구석구석을 누비기 때문에 붙은 애칭입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강철체력과 놀라운 심폐기능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또 다른 면에는 그는 ‘산소탱크’입니다. 그는 언제나 팀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줍니다. 그는 여간해서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습니다. 득점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공격수들이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거나, 골에 집착하는 반면 그는 늘 팀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는 공을 잡으면 절대로 오래 끄는 법이 없습니다. 부드러운 원터치 패스로 동료들에게 결정적인 골 찬스를 만들어줍니다. 그런가 하면 공격수로서 수비가담도 뛰어납니다. 그러다보니 감독은 물론 동료선수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맨체스터 팬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산소탱크’가 많이 필요합니다. 고달픈 삶의 청량제 역할을 담당할 ‘박지성 선수’가 보다 많아져야 합니다.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공동체 분위기를 깔끔히 환기시켜주는 ‘산소 같은’ 분들의 현존이 요구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궂은일을 마다않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가장 큰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을 위해 많은 조력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 성왕들, 예언자들, 사제들, 신앙과 율법의 전수자들...그리고 더 가까이 내려와서는 안나와 요아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 마리아는 구세주 강생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큰 조력자, 가장 직접적인 조력자였습니다. 메시아 탄생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마리아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지만,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예’하고 순명하신 마리아의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이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큰 인물’ ‘저명인사’ 존경받는 유명인사의 어머니로 처신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어떤 분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유명세로 인한 기쁨도 큰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스트레스들, 말 못할 어려움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차에 만 원짜리 돈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그 운전자에게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차는 제가 가는 길로만 앞서서 갔기 때문에 굳이 다른 길로 갈 필요는 없었지만, 단 한 번도 서는 경우가 없어서 말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드디어 신호등 때문에 서게 되었고, 저는 그 틈을 이용해서 앞차의 뒷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만 원짜리를 손으로 잡고서 그 차의 주인에게 갖다 주려는 순간, 그 만 원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폐치고는 너무 맨질맨질 한 것입니다.
어떤 돈이었을까요? 저는 분명히 만 원짜리 지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만 원짜리 지폐를 흉내 낸 광고 전단지였던 것입니다. 결국 차 주인에게 주지도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멋쩍은 웃음만 짓고는 제 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종이가 만 원짜리 지폐라고 확신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봐도 만 원짜리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직접 보고, 직접 만진 것이라 해도 사실과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에 조금이라도 반대되면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지요. 내 자신의 체험을 뛰어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데도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받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으셨을 때 성모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일차적으로 천사가 자기 앞에 나와서 소명을 전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여기에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리라는 잉태 소식까지 들었을 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씀을 듣고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시지요.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되십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성모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판단으로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굳은 믿음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굳은 믿음으로써 다가서는 우리들에게도 성모님과 같은 커다란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들어가면 예수 탄생 예고의 순간을 표현한 벽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리는데
하늘에서는 하느님과 천사들이 초조하게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초조한 기다림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전적인
응답에 순간 기쁨으로 변합니다.
한 인간이 자기 죽음을 넘어선 믿음의 응답은 세상에 생명을 선사합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자발적이고도 믿음에 찬 이 응답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예수님
잉태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성령강림에 이르기까지 책임 있게
살아 있는 “예”를 충실히 살아가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줍니다.
이 세상은 지금 책임 없는 말과 행동이 난무합니다. 자기 정체성의
부재로 방황합니다. 무책임한 결혼생활에서 이어지는 가족
해체의 증가와 개인주의, 생명경시 사상의 팽배 앞에서 진정한 신앙인은
누구이며, 그 신앙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마리아를 통해 바라봅니다.
아이가 안 생겨 온 집안이 걱정하며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입니다.
안 생기다 생기니까 쌍둥이라고 더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도해주어 아이가 생겼다고 저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저도 기도를 하였지만 제 기도로 그 아이가 생겼겠습니까?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아마,
그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 될 분들의 기도가 가장 간절했겠지요.
그런데 한 번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이 아이의 탄생이 우리 기도의 결과일까요?
이 아이의 탄생 계획이 없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일까요?
계획은 있었지만 더 있다가 주실 계획이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앞당겨 주신 것일까요?
하나만 주실 계획이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쌍둥이를 주신 것일까요?
신비이기에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순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탄생이 우리 기도의 결과인가?
아아,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생각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어느 인간의 그 무엇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소망에 의해 시작되지도 않았고
인간의 기도에 의해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받드는 마리아조차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고,
그러니 기도를 드리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인간의 그 무엇이 먼저 있을 수 없는
100% 하느님의 Initiative(主導하심)입니다.
마리아가 기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님은 물론
마이아가 예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계획이고
완전히 하느님의 Initiative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아들의 어머니 마리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그 계획과 주도하심에 순응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느닷없는 것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라고 얘기하는데 바로 그 꼴입니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움에도 마리아는 ‘Fiat' 하셨습니다.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것임에도 마리아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셨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아 보였어도 마리아는 ‘Fiat' 하셨습니다.
어쩌자고 이러시는지 그 뜻을 몰라도 마리아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의 이 “Fiat"은 창조입니다.
이 “Fiat"이 하느님의 뜻의 성취임은 물론
태초에 “생겨라!”는 말씀 한 마디에 만물이 생겨났듯이
“Fiat"이라는 말씀 한 마디에 주님이 생겨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대로,
그대로 저에게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소서.”하고 우리가 순응하여 말할 때
우리도 순종하는 것이요 창조하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이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이렇게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건망증에 걸린다는 말을 믿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국밥 장사를 하는데, 많은 손님이 드나들어도 자기 물건을 가게에 두고 가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자기 물건을 깜빡 잊고 두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손님의 국밥 속에 까마귀 고기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즉, 손님들이 두고 가는 물건을 통해서 부수입을 얻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과연 까마귀 고기를 넣은 것이 효과는 있었습니다. 분명히 손님들이 잊어버리는 것이 있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물건을 잊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돈 내는 것만 잊고 가더랍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면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급급하면 말 그대로 ‘쫀쫀한’ 모습을 간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면서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성모님이니까 그럴 수 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성모님의 처지나 입장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한테 이러한 일이 닥치면,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평소에 나의 작은 이익에만 급급하였던 ‘쫀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과 같이 큰마음,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뜻에 맞춰서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눈앞의 이익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명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최고라는 마음으로 매 순간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맙시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믿음이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했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살아왔음을,
그리고 살아왔다는 것은 탄생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탄생 예고를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준비요, 새로운 시작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 탄생의 예고를 들은 성모님께서는 탄생 소식과 더불어
주님이 함께하심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은 우리도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부활의 기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며 당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도 “저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당신 안에서 영원한 삶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동의를 구하고, 인간을 통해 당신의 일을 수행하려 하신다. 인간을 하느님의 일을 함께하는 협력자로 삼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무릇 신앙생활이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깨달아 아는 것이며, 그 깨달은 바를 온 몸과 마음으로 응답하는 삶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이 그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가 알려준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분의 도구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이다.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37절)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분의 뜻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필요가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그런 신앙 행위로 복자품에 오르셨고, 시골 처녀 마리아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요 세상의 어머니가 되셨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그분의 뜻이 우리의 삶으로 육화된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는 것이다. ●
인선 작업에 나서신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상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도
위대하고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사업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경부대운하 프로젝트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대한 사업이다.
온 인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도 데려가는 구원 계획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게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가?>
당신의 구상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그 구상은 당신 독생성자로 하여금
사람이 되어 직접 사람의 처지에까지 내려가서
그들을 다시 이끌어 올린다는 회심에 찬 계획이다.
거의 완벽한 계획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가 모자란다.
그 독생성자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구원사업의 시작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했다.
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우선, 여자여야 한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어떤 여자여야 하는가?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스 중에서 택해야 할까?
서울대나 하버드 대학에서 제일 똑똑한 여자를 택해야 할까?
삼성이나 현대, 아니면 다른 갑부의 딸이어야 할까?
아니면 연예인, 탈렌트나 영화배우 중에서
잘 나가는 여자를 택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류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다시한번 따져보았다.
첫번째 조건은 순수성이다.
처녀요 맑고 순수한 영혼이어야 한다.
속된 여자여서는 안된다.
두번째 조건은 순응성이다.
이 구원 프로젝트를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예하고
응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세번째 조건은 인내심있는 수용성이다.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예상치도 못했던 가슴아픈 일들을
많이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심 있게
그러한 고통과 몰이해를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사부장 가브리엘을 시켜 합당한 사람을 찾아보게 하셨다.
가브리엘은 위의 조건을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도시가 아닌 시골로 갔다.
왜냐하면 시골여인이야말로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다윗가문과 관련이 있는 여인을 하나 찾았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잘 아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윗가문 여자 중에는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다윗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택하게 되었다.
지켜서 살펴보니 순수성과 수용성에 있어서는 합격이었다.
이제 문제는 순응성이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직접 접근한다.
순응성 테스트의 시간이다.
마리아는 힘들어 한다.
하지만 결국 순수성과 수용성이 있었기에
기꺼이 순응한다.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바로 이것이었다.
하느님이 바라신 선택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느님의 인선방식은 참으로 기묘하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정말 옳았다.
마리아의 선택은 인류 구원의 시작이었다.
......
나라의 일꾼들을 선택하기 위한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또 우리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서로 자기가 적격자라고 자처한다.
어떤 인물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떠한가?
과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불림받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마리아처럼 순수한 영혼인가?
나는 마리아처럼 인내심을 갖춘 수용적인 사람인가?
나는 마리아처럼 <예> 할줄 아는 순응적인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사도임을 자처해서는 안되리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자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파견하는 것이 되고 말리라.
선택된 이들의 모델이신 성모님,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 또한 당신처럼 순수하고
수용적이고 순응적인 영혼이 되도록...
아멘.
이렇게 얘기하면 새로운 전례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새로운 전례는 과거 성모 영보 축일을
주님 탄생 예고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성모 취결례를 주님 봉헌 축일로 바꾼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매우 타당한 전례 정신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전례 정신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는 그래도 주님의 축일이자 성모님의 축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축일 이름도 바꾸고 싶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이 아니라
그리고 성모 영보 축일도 아닌,
성모 마리아의 주님 잉태 축일, 또는
성모 마리아의 주님 임신 축일이라고 말입니다.
될 대로 되라!
되어져야 하는 대로 되라!
둘 다 나의 뜻대로 하지 않음에서 같습니다.
그럼에도 될 대로 되라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정결을 빼앗긴 처녀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며 아무에게나 자기 몸을 내주고
그래서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배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욕보이고
애비 될 사람도 욕보이며
태어날 아기는 더더욱 욕되고 버림받고 빌어먹을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자기 뜻을 포기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의 자기 포기는 자기와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되어져야 하는 대로 되라는 것은
더 높은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자신이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자기 뜻을 포기함은 물론
도구가 되겠다고 적극적으로 자기 의지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고
복음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그 말씀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었고,
성모 마리아께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말씀께서 마리아의 자궁에 머무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엠마누엘 주님은
성모 마리아의 그 “Fiat(이루어지소서)"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뜻이라고 아뢰고
주님을 잉태하기 위해 마리아처럼 말합시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인류구원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인류가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 안에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때로는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의 축복을 내리시고, 때로는 그들을 사랑의 매로 벌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계획을 따르도록 인도하셨다. 또한 그들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약속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기다리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려주신 대로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셨다. 이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메시아의 강생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류 역사 안에서 오직 한 사람 마리아만을 택하시어 그녀에게만 천사를 보내셨을까? 꼭 그렇다고 답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마리아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보았고, 마리아만이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했다고 묵상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즉,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부터 장구한 세월동안 티 없이 순수하고 의로우신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기워 갚도록 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천사를 사람들에게 보내셨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설령 하느님의 천사를 알아보았을지라도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묵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먼저, 수많은 이스라엘 처녀 가운데 마리아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알아보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마태 13,14)는 말씀처럼 많은 이들이 천사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한다. 눈과 귀는 있지만 신앙의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느님의 천사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즉 신앙의 눈과 귀를 지니고 있었다.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 어렵다.
마리아가 천사를 맞이한 상태는 몽롱하고 흐릿한 정신 상태나 꿈을 꾸던 가운데에서가 아니다. 그녀는 아주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천사를 맞이하였다. 그녀는 천사의 방문을 받고 천사의 말을 들으며 당황하긴 했지만,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할 정도로 맑은 의식 중에서, 뚜렷한 자의식을 지닌 상태에서 천사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녀는 천사에게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천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벌벌 떨다가 아무 말도 못하기 십상이며, 자칫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질문을 서슴지 않고 했다. 이처럼 천사를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신앙의 눈과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처녀가 마리아였기 때문에, 그녀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처녀였다. 천사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즉각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주(主)가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 그래서 종은 주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사는 신앙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주가 되기를 원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이 주가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살았으며, 종으로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사는 신앙인이었다.
비록 그 길이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루가 2,35) 수밖에 없는 수난과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주님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살아가는 신앙인이었다.
그 어떤 모욕과 박해, 죽음까지도 각오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신앙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 요한은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요한 2,17)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나가버리고 없어져버릴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영원히 사는 신앙인,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자.............◆
- 김두유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12월 25일부터 아홉 달을 앞으로 역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무언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는 위대한 사실을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주님 말고는 내가 어느 날에 태어나겠다고 예정된 사건은 한번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을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이 친절하게도 우리 곁에 오실 것이라고 예고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축복을 가져다주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 오셔서, 다시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셨는데, 우리 인간도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일에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동정으로써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하느님의 뜻을 용감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만약 마리아의 응답이 “예”가 아니라 “아니오”였다면 우리는 아직도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마리아의 응답만이 하느님을 우리 인간사에 개입하는 위대한 사건이 되었으므로, 마리아의 태도는 우리 인간에게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번 잘하면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 때문에 우리는 천냥 빚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뜻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태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충실한 삶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해줍니다. 마리아도 일상적인 삶 안에서 드러난 충실함 때문에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늘 준비된 하느님의 체험이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축복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부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절도 잘 준비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삶만이 주님의 탄생도, 부활도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내 자신이 조금 흐트러지거나 게으르게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체험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내 작은 일에서부터 충실하고 준비된 사람만이 큰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 안에서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도 늘 준비된 삶을 살아갑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대목에 시선을 멈추어봅니다.
이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 예고 안에 삼위일체 신비가 나오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어떤 영감을 받고 이런 천사의 알림을 넣었을까요?
주님 탄생 예고 자체가 삼위일체 신앙고백 안에서 생각되어야 할 부분인 것은
이 예고 자체가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여종 마리아의 응답을 들으셨습니다. 성령, 성부, 성자의 소식을
전한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 조용히 응답한
마리아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교회의 모습,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일입니다. 머리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지만
겸손하면 우리 마음에 하느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축일의 핵심은 하느님의 육화에 있으며 성모영보는 강생에 대한 신심을 일깨운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를 경축하는 특별한 신심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도로 된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은 구원 역사의 실현을 위하여 일정 기간 마리아의 태중에 계셨다. 강생의 신비는 이처럼 예수님의 첫째가는 신비이며 가장 숨겨진 신비이고, 또한 가장 높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기도 하다. 이 신비 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신비를 이룩하셨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모든 신비의 요약이며 그 의지와 은총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비의 산실이 된 것이 바로 마리아다.
성모호칭기도에 ‘상지의 옥좌’라는 칭호가 나온다. 여기서 상지는 최고의 지혜를 뜻하며 최고의 지혜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 말씀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상지의 옥좌’란 말씀이 임하신 마리아를 뜻한다. 최고의 지혜께서 당신이 육화하실 장소로 택하신 곳이 바로 마리아의 몸이다. 거룩한 장소, 하느님의 말씀이 거하실 지성소로 마리아는 선택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지의 옥좌란 거룩한 말씀이 머무신 장소로서 마리아를 따르는 우리는 그분처럼 말씀이 머무실 수 있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제2의 마리아로 상지의 옥좌가 되어야 한다.
극히 작은 순명과 복종을 더 좋아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순명이란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수도자가 되겠다고 어떤 사람 두 명이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 뿌리를 하늘로, 줄기를 땅으로 하여 심으라고 하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 사람은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말도 안 된다”라며 제대로 심었습니다.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원에 받아들여졌고, 제대로 심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합니다. “농사꾼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농사를 아느냐를
물어 보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여부를
확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관건은 순종입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순종은 우리 신앙의 귀한 모범이 됩니다.
성모님의 순종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승리했습니다.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순종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