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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은 부서져도 빛은 멸하지 않도다
일러스트=서상균 기자 |
송상현 부사 동상 |
한데 담장 안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북적거리는 시장과는 사뭇 다르다.
깊은 정적감과 엄숙함이 깔려 있다.
외삼문 중앙에 걸린 현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송공단(宋公壇)'이란 세 글자가 눈에 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송상현 동래부사를 기리는 송공단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 부사와 관민(官民)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성한 제단이다.
경내로 들어가 내삼문을 통과하면 비석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중 높고 큰 비석이 '충렬공송상현순절비(忠烈公宋象賢殉節碑)'다.
이 순절비를 보면 누구나 숙연하고 경건한 마음이 든다.
그는 동래성에 쳐들어온 왜적들과 맞서 싸우다가 숨을 거둔
첫 번째 목민관이었다.
그의 생애는 부산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란이 끝난 뒤 그의 이름은 조선의 동래부사를 상징하는 것이자
동래의 역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훗날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들은 위국충절의 고장으로서 동래를 알리고자 송상현을 추모하는 여러 사업을 벌였다.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도 1742년 송공단을 세워 임진왜란 때 숨진 송 부사와 여러 선열을 추모하고
동래의 정신을 선양하려고 했다.
지금까지도 송공단은 우리 곁에 남아 임진왜란의 교훈과 살신성인의 역사를 되새김질 해주고 있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송상현의 글을 본 고시관은 "이는 수재라서 훗날에 반드시 세상에 큰 이름이 날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송 부사는 스무 살인 1570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다시 6년 뒤엔 문과에도 무난히 급제를 하였다.
그는 승문원(承文院,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처음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맏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차남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므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대부 가정을 꾸려나갔다.
송상현은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거두였던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친분이 깊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줬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이 송상현에게 배웠으므로 그 학통이 김집의 수제자인 송시열(宋時烈)까지 이어졌다.
비문을 지어달라고 송시열에게 여러 번 간청을 하자 이를 허락한 것이다.
부모님이 집안에 계시면 아무리 춥고 더워도 갓과 띠를 벗지 않았다고 한다. 형제들과 우애도 두터웠다.
큰 누님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송상현의 집에 들어와 의지하였다.
누님의 어린 조카들을 자식과 다름없이 살뜰히 키워내자 이웃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송상현의 이런 성품 탓에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절의를 지키고 죽음까지 택하였다.
송시열은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송상현 부사의 덕(德)에 교화되고 의(義)에 감동되어, 생사의 두려움을 버리고 의리를 지킨다고 하였다.
사간(司諫)이었을 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직언을 하다가 좌천을 당했다.
또 동인의 지도자였던 이발(李潑)에게 미움을 받아 한양과 지방을 자주 옮겨 다녔다.
송상현이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했다며 동래부사란 벼슬을 내렸지만 결코 이는 선의에서 나온
임명이 아니었다.
당시는 일본이 침입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누구나 동래부사는 꺼리는 관직이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동래가 왜적의 첫 번째 표적이 될 것은 쉬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방을 돌면서 경쟁자들의 시기를 피해왔던 송 부사는 오히려 담담했다.
송상현의 부친도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제수되자 위문을 하러 찾아온 지인들에게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직분이다. 죽음을 장차 어찌 피하겠는가."
■ 전망제단에서 송공단으로
동래시장 인근에 있는 송공단 입구(사진 위)와 내부.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순국선열을 모신 석단이다. 송 부사 시신을 수습한 관노 철수와 매동의 효충비도 한켠에 세워져 있다. |
동래성을 공격했다.
송상현 동래부사와 병사들은 힘써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달려드는
왜적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송 부사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을 쓴 뒤에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탈출하는 자가 있거든 나의 시신을 거두어라.
배꼽 밑에 콩알만한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이를 증거로 삼으라."
왜적이 곧 들이닥쳤다.
적과 격투를 벌이던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등이
죽었고, 송 부사도 숨을 거뒀다.
관노(官奴)인 철수(鐵壽)와 매동(邁仝)이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시신을 찾아내어 장사를 지냈는데, 과연 송 부사의 말대로
검은 사마귀가 배꼽 아래에 있었다.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매동은 절의를 지켜 송 부사의 기일을 챙기고, 어김없이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상절도사 김응서(金應瑞)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났다가 송 부사의 참담한 이야기를 듣고
조정에 소상히 알렸다.
선조는 김응서에게 송 부사의 유해를 적진에서 고향으로 옮겨올 것을 명하였다.
송 부사의 관이 옮겨지던 날, 수많은 백성이 통곡하면서 100리 밖까지 따라왔다.
왜적들도 말에서 내려 관을 피해주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송 부사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전망제단(戰亡祭壇)이었다.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4월 15일이 돌아오자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집집마다 백성들이 목을 놓아 곡을 하는 것이다.
늙은 향리로부터 임진왜란 때 피바다를 이뤘던 동래읍성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이 부사의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부사는 왜적으로부터 동래성을 지키다가 죽어간 송 부사를 비롯한 관민들을 추모하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현재 동래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구릉인 농주산(弄珠山)에 제단을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鄭撥),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盧蓋邦)을 추모했을 뿐만 아니라 왜적의 총칼에 죽은 이름없는 백성들의 혼도 달랬다.
1741년 동래부사로 부임을 한 김석일은 성 문밖에 있는 초라한 전망제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송상현 동래부사가 순절한 정원루(靖遠樓, 동래 동헌 객사에 딸린 누각) 옛터에 제단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 장소에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단을 쌓고 둘레에는 담을 쳤다.
남쪽에 문을 설치하였으며, 제단 이름도 송상현 부사를 상징하는 '송공단'으로 바꿨다.
송공단이 완성되자 농주산 전망제단에서 지내던 4명의 휘진제(諱辰祭, 기제사)를 옮겨와 매년 4월 15일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후 송공단은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들에게 동래의 역사를 각성시키는 성스런 공간이 됐다.
일례로 송공단을 찾아 선열들의 한을 느끼고 마음이 격동이 된 동래부사 엄인(嚴璘)은
"정원루의 옛터를 어느 곳에서 찾을고, 푸른 이끼와 붉은 피가 백년 동안 깊었도다"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송공단에 모시는 선열들이 많아졌으므로 강필리(姜必履) 동래부사는 단을 새로 짓고 확충했다.
선열의 신분에 따라 단의 높이도 달리 했다. 상단에는 송상현 부사와 정발 장군의 순절비를 세웠다.
또 동단(東壇)은 두 개의 단으로, 서단(西壇)은 세 개의 단으로 구분하여 신분에 따라 비를 세웠다.
그 뒤에 동래읍성에서 순절하지 않은 정발 부산첨사와 윤흥신(尹興信) 다대첨사는
정공단과 윤공단을 별도로 설치하여 옮겨가 모셨다.
현재의 송공단은 '충렬사지'의 기록에 따라 2005년 새로 복원한 제단이다.
송공단에는 일곱 개의 단 위에 총 16기의 비석을 모셔두었다.
비석 아래의 단을 잘 살펴보면 높이가 조금씩 다르다.
여성들은 별도의 단에 모셨고, 관노의 비석은 담장 아래 바닥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엄격했던 신분과 성의 질서가 단과 비석을 조성할 때에도 반영된 것이다.
송 부사 순절비의 동쪽에는 양산군수 조영규와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의 순절비가 나란히 있다.
왜적이 동래로 진격해 왔을 때 조영규나 노개방은 성 바깥에 있었으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보다 의리를 택했다.
조영규는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싸우기 위해 동래성으로 들어왔다.
동래성을 송 부사에게 맡기고 도망을 갔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의 비겁한 행동과는 대조된다.
노개방은 밀양에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동래로 급히 돌아왔다.
전쟁 상황에서 향교에 모시던 성인들의 위패를 정원루로 옮겼으므로 심히 걱정됐던 것이다.
그는 성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달라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 살 길만 찾는 현대인이 본을 받아야 할 정신이 아니겠는가.
김희수와 송봉수는 송 부사를 경호하다가 함께 순절했으며, 양조한과 문덕겸은 노개방과 같이 위패를 지키며
자리를 뜨지 않다가 숨졌다.
바로 옆의 하단에 세워진 비는 김상(金祥)과 송백(宋伯), 그리고 신여로(申汝櫓)의 순절비다.
김상은 동래에 살던 백성이다.
왜적이 성안으로 침입하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왓장을 내던지며 끝까지 항거하다 숨졌다.
신여로는 서얼 출신으로 송 부사를 따라 동래로 온 인물이다.
송 부사를 모시며 잡일을 도우는 하인이었다고 한다.
동래가 위급해지자 송 부사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신여로에게 일렀다.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신하이니 마땅히 죽음을 바쳐야 하므로 떠나지 못한다.
너는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헛되이 죽어서는 안 된다. 빨리 떠나거라."
송 부사의 말을 듣고 성을 나왔지만 신여로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도중에 동래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발길을 돌렸다.
"내가 송 부사에게 후한 은혜를 입었거늘 어려움에 직면해서 죽음을 아낄 수 있겠는가."
더 큰 의리를 위해 운명의 발길을 돌린 신여로는 끝내 숨졌다.
피바다를 이룬 동래성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이 적들의 총칼에 숨을 거두었던가.
단의 끝에 자리를 잡은 '동시사난민인위(同時死亂民人位)'
비석은 이처럼 무명씨로서 그 절절한 망자의 사연을 알 수 없는 백성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
이 단은 임진왜란 때 숨진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동래 여성들도 절개를 지키며 동래성 전투에서 한 몫을 하였다.
금섬은 함흥 출신 기녀로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송 부사를 따라 동래까지 왔다.
송 부사가 마지막으로 조복(朝服,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예복)을 갖고 오게 하자
금섬은 송 부사가 순절할 것을 짐작했다.
급히 담을 넘어 갔지만 송 부사는 이미 순절했고, 그녀도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금섬은 왜병들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사흘 간 적들을 꾸짖다가 그만 살해당하였다.
의녀 2명은 동래 여성들의 꿋꿋한 기상을 왜적들에게 보여줬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기와를 걷어 김상이 적들에게 던질 수 있도록 건네줬다.
제문을 지을 적에 그의 훌륭함을 가리켜 "구슬은 부서져도 고운 빛은 멸하지 않도다"라고 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송공단에선 여전히 위국충절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다.
송 부사의 훌륭한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은 물론이요, 함께 싸운 동래 관민의 의로운 빛도 밝게 빛난다.
이처럼 송공단이야말로 부산 역사의 빛깔이 온전히 살아있는 곳이다.
부산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곳에 와 멸하지 않는 구슬의 빛을 봐야 되지 않겠는가.
유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사
※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