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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성령에 열린 입과 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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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2 03:53
- 성령에 열린 입과 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성령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성령의 도유받은 분이심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성령으로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도 그렇고 특히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듣지 않고 화가 잔뜩 나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알아듣지 않고 인간적으로만 알아들은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든 느낌은 ‘성령 단절’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탁 막히는구나! 하는 느낌 말입니다.
이번 달 저는 오래간만에 강의하러 미국에 가는데
제게 주어진 주제 가운데 하나가 ‘Listen, Discern, Go forth’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통하여, 형제들과 이웃을 통하여,
사건을 통하여, 이 시대의 징표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식별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식별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데 그 전에
Listen(경청)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옛날에 제가 중요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품받고 그해 본당에 가서 아주 열심히 강론을 준비하고,
주일은 물론 매일 강론하였고 그래서 평일 강론이 없던 그때
이웃 본당에서까지 신자들이 와서 미사 참석자가 늘었습니다.
한번은 주일 미사 때 정말 많이 준비해 제 생각에도 잘 강론하였고,
그래서 끝나고 돌아가며 많은 분이 강론 좋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신자에게 어떤 내용이 좋았냐고 물었을 때
이것이 당신 마음에 와닿았다고 그분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가 정작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아! 이것이 성령의 역사로구나!’ 하는 느낌이었지요.
성령께서 제 입을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 열어주셨고
그분은 그 말을 자기에게 하는 말로 경청케 하신 겁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성령 단절’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근본적으로 영적인 감수성이 없어서도 안 되고
영적 감수성이 열리긴 열렸는데 일시적으로 영적인 귀가 닫혀서도 안 되지요.
내 안의 욕망과 욕심과 주장들이 아우성쳐 영적인 귀가 일시적으로 닫힌다면
열심한 신자인 우리가 이때 해야 할 것은 그것들의 침묵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강론하는 저는 제가 성령의 힘으로 강론하는지,
저의 강론을 듣는 여러분은 영적 감수성으로 경청하는지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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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 세 벽돌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세 명의 벽돌공이 일하는 현장을 지나갑니다. 그는 세 명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각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벽돌공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인식해서 ‘벽돌 쌓기’라는 직업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벽돌공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관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이에 따른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와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성과는 어떨까요? 어떤 태도와 관심에 따라 성과에 분명히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 있고 큰 목표와 가치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 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로? 아니면 그저 자기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직업적 행위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힘차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그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려는 사람도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의미를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더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의미를 찾아야 우리가 되어야 분명 지금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에 머물면서 생존만을 또 직업적인 선택만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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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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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와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7-8).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혹 오늘 우리도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 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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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알면‘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방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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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전 건축 비용 마련이었다고 합니다.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교우들과 댈러스 교구 주교님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추기경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전 건축 비용 마련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매년 골프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합니다. 교우는 물론, 교우가 아닌 분들도 골프대회에 참여하였고,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제가 부임했을 때, 교우들은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주일에는 가능하지 않고, 평일에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려와 걱정과 달리 평일에 골프대회를 개회함에도 160명이 넘는 분이 신청했습니다. 댈러스, 휴스턴, 포트워스, 오스틴에서 신부님과 교우들이 신청하였고, 교우가 아닌 분들도 신청하였습니다. 운동을 통해서 교우들이 친선을 도모하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가톨릭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봉사해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2001년, 제가 적성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적성 본당은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이 군대에 있을 때 다니던 공소였습니다. 당시 오웅진 군인은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 공소 건물을 새로 신축하겠다고 하였고, 추기경님께서 후원금을 주셨다고 합니다. 오웅진 군인은 추기경님의 격려금을 바탕으로 땀과 눈물로 공소건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제가 1999년에 부임했을 때, 그 공소 건물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새로 성전을 지었고, 공소건물은 오웅진 신부님이 창설한 꽃동네 수녀님이 머무는 수녀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1년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과 미사를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은 2001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적성 성당이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었기에 기꺼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동네 입구에 현수막도 걸었습니다. 교우들은 장단의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었고, 임진강의 꽃게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였습니다. 본당 교우들 뿐 아니나, 인근 지역의 부대에서 군인들도 왔고, 지역의 주민들도 왔고, 문산과 법원리 신부님도 왔습니다. 23년 전에 대림특강을 해 주셨던 추기경님이 이제 ‘김수환 추기경 배’ 골프대회의 이름으로 저와 함께 해 주십니다. 천상에 계시는 추기경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 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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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나자렛에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담긴 두루마리를 읽으셨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카파르나움에서 했던 것을 여기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작은 집 문 앞에 주님이 서 계신 그림입니다. 아주 단순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서 있는 문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 문 앞에 하염없이 서 계십니다. 꼭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서 계신 것 같습니다.
문이 열려야 얼굴도 보고, 미소도 짓고, 대화도 할 것인데 주님은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문고리는 안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하신 복음의 내용도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같은 모양입니다.
이미 문을 닫아버린 마음으로 주님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셉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 이곳에서 자란 꼬마 아이라고 결정 지어버린 마음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 없으니, 대화도 은총도 기적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눠줄 수 없음에 주님은 답답해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문은 어떤가요? 주님을 향해 열려있을까요? 주님을 이런 혹은 저런 분으로 한정 짓지 마세요. 오히려 주님을 그저 우리 주님으로 열어놓으세요.
그 열린 마음으로 주님은 주님 모습 그대로 우리와 만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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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짐과 누림
세상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늘 더 가지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진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가짐과 못 가짐은 세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신분증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무엇을 누리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진 것이라 하더라도 하늘나라 갈 때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지지 못했더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가질 수 없지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없지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질 수 없지만 누릴 수 있습니다.
가짐보다 누림에 더 가치를 둬보세요.
지금보다 조금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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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나의 발견
“예수님의 얼굴, 참나의 얼굴”
“주님, 제가 당신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 가르침을 묵상하나이다.”(시편119,97)
순교자 성월 9월, 위 화답송 시편 고백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9월2일부터 9월13일까지 교황님은 45차 해외 사목 방문길에 오르니 참 대단한 열정입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동티모르, 그리고 싱가포르입니다. 어제 9월1일 순교자 성월 첫날, 선물받은 “거제도 가는 길”을 독료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받은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티노(1756-1801)의 딸 ‘유섬이(1793-1863)가 아홉 살에 완주 초남이에서 거제 송곡리에 이르기까지 320km 유배길을 따라 순례한 이야기를 적은 글입니다.
16세 이하 아이였기에 처형은 면하고 양반 신분에서 노비로 강등되어 살아 유배길에 올랐고 유배지에서 70세 동정녀로 생애를 마친 유섬이였습니다. 조선시대 신분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신분사회였고 천민에 속하는 노비는 30% 정도였다 합니다. 고종시 1886.2.6. 노비제가 폐지되지 까지 계속됐던 신분제도였습니다. 제가 아끼는 세권의 평전 인물에 관한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노비를 이용한 재태크의 달인으로 보여집니다. 360명이 훨씬 넘는 노비에 60만평이 넘는 전답을 가진 농업 경영인이었습니다. 노비 매매금지 상소를 했던 율곡 이이도 죽은 후 상속 재산 목록 분재기에 119명 노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일화도 소개합니다.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신유박해때 강진으로 유배갔습니다. 유섬이 처자가 거제도로 유배갔던 바로 그해, 나이로보면 정약용이 유섬이 부친 유항검보다 여섯 살 아래였습니다. 유섬이 처자는 거제도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배교했던 정약용은 18년후 해배되어 경기도 광주 마재로 돌아갔습니다. 정약용을 보살폈던 강진 여자 정씨와 딸 홍임이가 따라갔습니다.’
물론 이런 일화들이 세분의 위대함에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균형을 잃지 않고 깊은 연민과 이해와 수용의 마음으로 전체를 깊이 잘 들여다 봐야 함을 배웁니다. 제가 볼 때 다산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치열한 보속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공생애에 앞선 출사표와도 같은 대선언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인류의 해방자, 인류의 빛,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참나의 신원을 발견하고 확인한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늘 잊지 않고 실천하며 사셨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여기 오늘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의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 모두 모든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수님과 함께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또 참자유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자 모두가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합니다. 이어 선입견과 편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지한 고향 사람들에게 한말씀 하시니 이또한 예나 이제나 영원한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편적 무지의 인간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엘리야, 엘리사로, 즉 모두의 구원자로 자신의 신원을 알리는 예수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빛이 되시는 주님이심을 천명합니다.
“재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참으로 믿음으로 자신을 개방한 모든 이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시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해방자 예수님 자체가 바로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역시 화가 잔뜩 난 무지한 고향사람들의 적대적인 포위망을 뚫고 유유히 자기의 길을 가시는 대자유인 예수님의 마지막 묘사도 참 멋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제1독서에 사도 바오로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라는 사도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을 만나 참나의 사명을 발견한 바오로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바오로 사도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인간의 지혜’에 바탕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둔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어제 읽은 성철 스님의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출가하려고 자기를 찾아 온 딸(불필스님)에게 내렸다는 수도팔계(修道八戒)입니다. 희생(犧牲), 절속(絶俗), 고독(孤獨), 천대(賤待), 하심(下心), 전념(專念), 노력(努力), 고행(苦行)이며, 이중 천대와 하심은 바오로의 영성과 일치합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부처로 보는 천대와 스스로 자기 못난줄을 아는 하심은 마음속 서운함이나 미움을 몰아내는 비결입니다. 바로 천대와 하심은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완전히 비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천대와 하심속에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요 참나의 얼굴입니다. 순교자 성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비움과 겸손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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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루카 4,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대신 가야할 이를 찾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을 거두고
다부진 각오로
보잘것없는 나를 채워
힘차게 당당하게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부르심을 받아
떨리는 굳센 응답으로
내딛는 벅찬 첫걸음에
부르시어
보내시는 분의 뜻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니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가다가
이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가로막는 이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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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루카 4,20)
모든 회중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시하라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읽으신 다음,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면 여러분도 지금 이 회당, 아니 이 집회에서 주님을 주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지혜와 진리에 돌려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묵상할 때, 그대의 눈은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주시하였다”고 한 그들이야말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회중도 그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모든 사람(예비신자와 신자들, 여자와 남자와 아이들)의 눈(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바라보면, 그분 눈길에서 나오는 빛으로 여러분의 얼굴이 빛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시편 4,7)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먼저 엑카르트는 성서 말씀대로 기뻐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열광에 덩달아 기뼈 뛰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신하는 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라. 모든 천사는 물론이고 하늘과 땅의 모든 성인도 지극히 작은 선행이나 지극히 작은 호의나 지극히 작은 선한 바람에도 기뼈 뛴다... 성인이 저마다 높임을 받을수록, 저마다의 기쁨도 커지게 마련이다. 지상에서든 천상에서든, 기쁨은 모든 거룩한 삶의 결말이다. 쉬르만은 엑카르트의 영성을 일컬어 “한가로이 거니는 기쁨의 영성이라고 했다. 기쁨은 사랑의 열매다. 그리고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존재가 그러한 사랑에 푹 잠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조물의 기쁨이 크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기쁨은 더 크다. 이 모든 기쁨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눈동자만큼이나 작다. 엑카르트의 하느님은 기뻐하는 하느님, 곧 흐뭇해하고. 즐거워하고, 느끼고, 웃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선행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233)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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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 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19)
선거철이 되면 많은 후보자는 저마다 공약公約을 내세우지만, 그 공약이 막상 당선되고 나면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겪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마다 우리는 매번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선포는 공생활 동안 행하실 사목활동의 비전을 제시하고 출사표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후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을 기록한 모든 복음 말씀이 바로 오늘 선포한 말씀으로 규합되고 집약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空約을 남발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의 公約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의 활동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동이 처음부터 주님의 영 곧 자비의 영의 열매라고 전합니다. 자비의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4,18)은 예수님의 활동이 바로 이 자비의 영의 역사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9) 이를 통해 예수님의 주된 활동은 첫째, 잡힌 이들(=묶인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 대상은 바로 재물, 권력과 거짓된 사랑에 묶인 자들입니다. 둘째 활동은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게 눈뜸을 베푸시는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욕심, 자만심 그리고 편견으로 눈먼 존재들입니다. 셋째는 억압받는 이들(=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데,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억압받는 주된 요인들은 여러 질병과 악령(=마귀, 사탄)에 시달리고 특히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죄책감)에 억눌리고 억압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용서와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시려는 게 그분의 주된 구원 활동이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과거만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주님의 자비로운 영의 활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의 선포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인간의 어떤 상태나 처지와 관계없이 하느님의 공짜, 무상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며, 이렇게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상태의 모든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며, 예수님 당신 존재 자체가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4,22)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이 구절로부터 그림의 색조가 밝음에서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발단은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깊이 잠복해 있던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통해 그들의 속내가 확연히 드러나면서부터입니다. 이런 고향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3.24)하고 응대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놀라움 하지만 내면에는 편견과 선입견,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가득 찬 그들의 속내를 꿰뚫고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향 사람들의 이중성을 질타하십니다. 이런 고향 사람들의 환대와 적대, 놀람과 거부는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반응과 동일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
루카 사가는 한 마디로 예수님은 실패한 복음 선포자라는 점을 시작부터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대한 기대의 차이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란 다른 곳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 나자렛에서도 보여주기를 그리고 그 기적으로 파생할 떡고물(=사람들이 몰려옴으로 지역 경기 활성화)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원의는 도력道力을 통한 기적보다 도심道心 곧 이미 시작한 하늘나라와 아빠 하느님께로 인도하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며,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기대가 크면 그 실망과 분노는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와 배척으로 급격하게 돌변할 수 있는 게 집단적인 악의 실체입니다. 이는 고향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다.” (4,28) 그렇게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서 거부와 추방당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후에 모든 자기 백성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세상에서부터 추방과 십자가에 죽임당하심으로 절정을 이룰 것을 복음은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 이상 미련을 두시거나 연연하지 않으시고, 고향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4,30)라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로 인해 방해받지 않으시고 홀연히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왜 이리도 안타까운지 그러면서 그렇게 당당하심이 마냥 부럽습니다. 이것이 단지 나자렛의 하루만이 아닌 그분의 전 공생활 동안 드러나신 삶의 주선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주저하거나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하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걸어가시는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 또한 그분의 뒤를 따라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영으로, 영과 함께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이들의 묶임, 눈멂과 억눌림에서 참된 자유와 눈뜸, 해방의 삶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로운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 눈뜸 그리고 해방을 체험한 후 동일한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 향해 선포하면서도, 그로 인한 거부와 배척으로 주저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시9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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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
박윤식 [big-llight] 240901. 20:20 ㅣNo.175592
‘있는 나’라는 하느님 이름의 뜻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란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신다. 믿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결코 아니다. 과거는 이미 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 소관이 아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에서 머뭇거림이 없이 당장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랑하려면 지금 이 시각 여기서 다들 알게 해야 하고, 용서하려면 지금 이 시각 여기서 당장 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서의 내용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 부어 주시니, 그분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다시 돌려주시고는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봉독하신 뒤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당신사명을 시작하신다. 그분께서는 구원사명의 첫발을 내디디시는 장면을 하나의 장엄한 의식처럼 행사하고 계신다. 어쩌면 교회의 다양한 의식은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기억하고 살아 있게 해 주는 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참된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도와 전례일 게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명과 관련하여 지적하신 것에는 두 가지 사실이 돋보인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곧 당신 자신이 메시아시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분이시라는 거다. 둘째는 예수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사명을 많은 이 앞에서 선포하셨다. 그분의 이 사명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곧, 대희년(大禧年)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시키심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당당하게 일리셨다.
희년이란 칠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희년에는 빚을 진 이는 빚을 덜고, 땅을 빼앗긴 이는 땅을 돌려받으며, 노예생활을 하는 이는 그 신분에서 해방된다. 이처럼 희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이에게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단 한 번도 그 정신이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제 이 희년의 정신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는 일이 예수님께서 장차 가실 방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야만 할까? 어떻게 가는 게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일까? 이리하여 우리 모두는 그분께서 가신 그 길만을 따라 가야 한다. 물론 우리가 지녀야 할 이 사명은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기쁜 소식인 은혜로움을 만방에 선포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참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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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루카 복음서에서는 오늘 복음의 단락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부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루카 4,18)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만 따로 모으신 뒤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그러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리 자캐오나 니코데모,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같은 이들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지 않았던 이들도,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던 백인대장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전하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들에서 생명을 얻었지만, 예수님 없이도 부족할 것 없다고 여기던 이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은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요한 묵시록 3장 17절에서는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착각에 빠져 기쁜 소식에 귀를 막지 않도록 우리의 가난함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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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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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게 말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이야기의 끝에 가서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예수님께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말했다고 전하고
또 한 번은 모두가 예수님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을
전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놀랍게 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이 순식간에
그것도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것이 그들의 본래 마음이었을까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응의 일차적인 책임은
예수님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두 번 다 예언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는 예언자의 말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의 삶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역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 각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즉 앞부분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좋게 들리기 때문에
예수님을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자신들의 감추어진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하기가 편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느 것이 그들의 본래 마음이었을까 라기 보다
둘 다 그들의 마음은 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을 좋게 말하고
자신들에게 달콤하게 들리는 것만 듣고 싶지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어도
쓴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없애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기 보다는
내 방식대로 듣기가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온전히 객관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나에게 불편한 말이라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
그를 비판하고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왜 그 말을 불편하게 듣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상대방을 내 입맛에 따라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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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입니다!
안식일을 맞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 생활과 유배 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명료한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지를
180도 뒤바꿔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지상적 번영이나 물질적인 부, 강력한 정치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실 메시아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히 요구하신 것은 회개와 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간단한 예수님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그래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고 마는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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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 61,1을 읽으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사셔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사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도 우리의 처지에서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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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말씀을 듣고 화가 난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키웠기에 안다고 착각합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결국 거북한 말을 하는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여 성경을 먼지가 쌓이도록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거북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이 거슬려도 아이들은 잘도 배웁니다.
며칠 전 제가 아는 세실리아 자매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직속 상사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누가 들어봐도 직속 상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 명예가 깎이는 것처럼 느껴지자 세실리아 자매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며 야단을 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그건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거북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덮어버리고 기도도 끝내지 않은 채 잠을 자버렸습니다.
다음 날 주님께 그렇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말씀을 잡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데, 그 신부님은 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 잘못이 보이면 그게 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의 탓도 있다고 인정이 되니까 나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사에게 전화하여 차나 한잔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듣기 거북하다고 예수님을 절벽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세실리아 자매는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총이 왔습니다.
말씀을 주시는 분은 그것을 실현할 힘도 주십니다.
힘을 받기 위해서는 거북한 말씀과 오래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은 은총과 결합할 때 진리가 됩니다. 진실해라. 누구나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했을 때는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니까 말씀도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다고 하셨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계속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거북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기다리면 언젠가 옵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말씀의 전례는 가볍게 여기고 성찬의 전례만 중요하게 여기면 성찬의 전례에서도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김범석 교수에게 찾아온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어본 바로는 거창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또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번 의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6개월이란 시간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6개월이 은총의 시간이었고 말씀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6개월이 불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가 먼저 있고 성찬의 전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거북합니다.
강론이 길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잡고 살려고 하면 은총을 주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려는 말씀을 잡으니 “다 주었다!”라는 은총으로 힘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킬 결심을 합시다. 그러면 은총도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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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가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1)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레위기에 규정되어 있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메시아 시대’를 뜻합니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희년 선포’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희년’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구약시대 때에,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원래의 주인들에게로 되돌아갔고, 모든 빚이 탕감되었고,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메시아 시대’는 그런 희년처럼 ‘모든 사람’이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는 시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시대 선포’는 곧 ‘기쁜 소식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선포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선포하신 순간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희년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었을까?
실제 현실을 보면, 희년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돈을 꾸려고 해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희년이 다가올수록 이자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러다가 희년이 바로 코앞에 닥치면 아예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탕감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희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어떻게 하면 손해를 덜 보게 될까를 따졌습니다.
그러니 그 좋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인데도 ‘죽은 규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인데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권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기득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메시아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는 말은 곧 그 나라에는 특권층과 기득권층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작은 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권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복음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4)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되려면, 우선 먼저 사람들 쪽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회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희년’이라는 제도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없어진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과 손해만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그런 식으로 대합니다.
그 모습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갖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지고 있습니다.
“세속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라고 아무리 말해도, 비웃기만 하고,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회개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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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시어 그곳에서 진행되는 유다교 전례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 예식은 보통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지요. 예식이 시작되면 회중이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뒤 율법서를 봉독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신앙 고백인 ‘쉐마 이스라엘!’을 낭송한 뒤 시편과 ‘18조 기도문’을 바칩니다. 이어서 첫번째 독서자가 율법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해 설교한 다음, 두번째 독서자가 예언서를 읽고 그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의 축복문 낭송을 끝으로 전례가 마무리 되지요. 오늘날 가톨릭 미사에서 성찬의 전례만 빠진 형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독서자의 역할을 맡으셔서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셨는데, 그 안에는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임명된 ‘그리스도’의 소명, 즉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지요. 그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쉽고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안겨주었던 겁니다.
그러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에 전해지는 강한 울림과 감동을 느끼면서도, 번지르르한 말만 앞세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담겨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가난하고 무식한 목수의 아들에게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왔음을 놀랍게 여길 뿐, 그것을 ‘복음’으로써 즉 자기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기쁜 소식으로써 마음 안에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머리와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게 그런 지혜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 일종의 ‘인지 부조화’가 생겼고, 그것이 그 말씀을 제대로 귀기울여 듣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지요. 사막을 헤매던 것을 오아시스 앞에 데려다주었는데도 물 마시기를 거부하는 고집 센 낙타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니 굳이 힘들게 복음 말씀 같은 걸 찾아서 듣고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자기들을 알아서 구원하실 거라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있던 수많은 과부들을 놔두고 이방인 과부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어 구원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던 유다인 나병환자들을 놔두고 이방인 장수 나아만에게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구원받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분께 선택받았다고 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면 선택된 사람답게 오히려 더 충실한 신앙생활과 계명의 실천으로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어야 했지요. 그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주일미사 참례라는 최소한의 의무만 겨우 지킨다고 해서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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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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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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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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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삶
<2024.9.2>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13~18절)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삶❞
❚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 상황과 사람을 통해 회개하고 회복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떤 삶입니까?
➲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13~14절).
아하시야왕은 세 번째로 오십부장과 군사들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엘리야를 찾아온 오십부장은 이전에 기세등등하게 찾아 온 오십부장들과는 달랐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여 완악하고 사악한 왕에 의해 보냄을 받았지만, 전임자들의 경우를 교훈 삼아 매우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엘리야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의 겸손한 태도는 본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군사들의 생명까지도 살리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음과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내려오라’고 명령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간청을 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해 자신의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아하시야 왕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서도 순종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교만함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 역시나 교만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잔꾀를 써서 현재의 상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이 역시 교만한 믿음입니다. 엘리야 앞에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어 굴복할 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욕망과 정욕을 내려 놓고 겸손하게 그리고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당당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15~16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하시야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것을 지시하십니다. 엘리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행동하였습니다. 두 번에 걸친 왕의 강압적인 명령에 의해 산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두려워 말로 함께 내려가라는 명령에 의해 엘리야는 산을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선 엘리야는 당당하게 왕의 잘못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의지하려 한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는 왕이 병들어 올라간 침상에서 결코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세상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왕의 군사들을 자기 앞에 무릎을 꿇도록 했고, 불순종한 왕의 죽음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당당함입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될 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왕 앞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하나님의 힘이 크십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왕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라는 사실을 믿을 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주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매너를 갖추어 지혜롭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17~18절).
하나님은 분명 아하시야 왕에게 두 번에 걸쳐 불 심판을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십부장의 경우를 통해 살 수 있는 방법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했던 왕은 결국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그의 형제였던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아하시야 왕의 보여준 이 행동 즉, 이방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뜻을 묻는 그의 행위는 열왕기서 전체 줄거리의 축소판과 다름이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죄에 대해 심판의 메시지를 주고 계심에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함 속에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시간이 지나면 심판하시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여러 상황과 사람들을 통해서 회개하고 회복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기회가 주어진 지금 회개하고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죄를 꾸짖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손한 믿음의 행동을 통해 생명을 얻는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1:13~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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