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꽃들 19권에서
철쭉 여인숙
현상연
황매산 골짜기
해마다 비릿한 사연은 꽃이 되고
꽃을 복사하기 위해 5월을 찢고 나온 상춘객들
능선은 이미 벌건 햇살로 달아올랐다
누군가
꽃의 화색에 취해 다가섰다
치명적인 독에 목이 꺾였다는
모산재 구릉마다 빼곡히 들어찬 붉은 여인숙
피고 진 흔적 없이
응고된 혈흔만 가득 찍힌 산자락
낭자한 치맛자락 풀어 놓았던 햇살이 돌아서고
골짜기 내려서던 바람 숨어들 때
노을에 상기된 젊은 한 쌍
끓는 피 식힌 듯
여인숙 빠져 나온다
꽃불에 데인 산은 열기 식히고
봉합이 덜된 틈새로
간간이 나비만 숙박비 묻고 가는 철쭉 여인숙
꽃무늬로 도배된 산모롱이 환하다
----현상연 시집, {울음, 태우다}에서
현상연 시인의 [철쭉 여인숙]은 ‘사랑의 시학’이며, 이 ‘사랑의 시학’은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향연이라고 할 수가 있다. “황매산 골짜기/ 해마다 비릿한 사연은 꽃이 되고” “꽃을 복사하기 위해 5월을 찢고 나온 상춘객들”은 이 철쭉꽃 향에 취해 이미 벌써 “벌건 햇살로 달아올랐”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쭉꽃들이 황매산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며 수많은 벌과 나비들을 불러모으면 제법 순수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성적 욕망을 억누르던 인간들도 남녀노소할 것 없이 자연의 성교, 즉, 철쭉의 향연을 보러 몰려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꽃을 피우는 것이고, 꽃을 피우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 또는 전통과 풍습을 알 리도 없는 철쭉은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우리 인간들은 이 철쭉꽃의 화색에 취해 목이 꺾인다. 철쭉꽃 화색, 그 치명적인 독에 목이 꺾였다는 것은 마치 이 날을 위해 살고 죽겠다는 듯이 “모산재 구릉마다 빼곡히 들어찬 붉은 여인숙”에서 그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사랑은 불꽃이고, 불꽃은 자기 자신과 그 모든 것을 다 불태우며 그 상처를 남긴다. “피고 진 흔적 없이/ 응고된 혈흔만 가득 찍힌 산자락”이 그것이고, “낭자한 치맛자락 풀어 놓았던 햇살이 돌아서고/ 골짜기 내려서던 바람 숨어들 때/ 노을에 상기된 젊은 한 쌍/ 끓는 피 식힌 듯/ 여인숙 빠져 나온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꽃을 복사하기 위해 5월을 찢고 나온 상춘객들, 누군가 꽃의 화색에 취해 목이 꺾였다는 황매산 골짜기, 피고 진 흔적 없이 응고된 혈흔만 가득 찍힌 산자락, 낭자한 치맛자락 풀어놓았던 햇살, 끓는 피 식힌 듯 상기된 얼굴로 여인숙을 빠져나온 젊은이 한 쌍, 이제 꽃불에 데인 산은 열기 식히고 봉합이 덜된 틈새로 간간이 나비만 숙박비 묻고 가는 [철쭉 여인숙]----. 현상연 시인은 능수능란하고 요염한 호색가이며, ‘에로스의 향연’, 즉, [철쭉 여인숙]의 연출자라고 할 수가 있다.
도덕도 윤리도 다 불태우고, 스승도 아버지도 다 불태운다. 친구도 선배도 다 불태우고, 적과 동지도 다 불태운다. 고통과 절망도 다 불태우고, 슬픔과 우울도 다 불태운다. 무력함과 비겁함도 다 불태우고, 노쇠와 죽음도 다 불태우며, 이 에너지의 힘으로 사랑의 씨앗을 심는다.
사랑은 언제, 어느 때나 정직하고 솔직하며, 그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랑은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의 열정밖에 모르며 그 최종 목적은 자기 자신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모든 시인은 자연의 학교의 선생이고, 그 교과목은 사랑의 시학이다. 사랑은 종족의 명령이고, 이 종족의 명령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모든 학문과 예술의 토대는 사랑이며, 이 ‘사랑의 시학’이 없는 그 어떤 학문과 예술도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랑은 생명의 불꽃이고, 종족의 불꽃이고, 이 세상의 영원성의 불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철쭉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호텔은 [철쭉 여인숙]이다. [철쭉 여인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짝짓기가 좋은 곳이고,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고향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