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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부자 청년
막 10:13-22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13-22 /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다;마19:13-15,눅18:15-17] 한번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복을 빌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선생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나무라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 하였다. 14) 예수께서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언짢아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복을 빌어 주셨다. 17) [부자 청년;마19:16-26,눅18:18-2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선하신 선생님, 제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만이 참으로 선하신 분이다. 19) 계명에 이르되 ㄱ)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 사람들에게 불리하도록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ㄱ. 출20:12-16) 20)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저는 그 계명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뒤에 와서 나를 따르라.' 22) 그 사람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교훈하시며, 부자 청년을 통해 영생에 관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천국의 주인공(13-16) 예수님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랍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 머리위에 손을 얹는 풍속이 있었습니다(창 48:14). 그러므로 예수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부모들의 자연스런 행동이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런 아이들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신 예수님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과민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의 행동에 노하시며,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들을 직접 안고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이나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나 하나님 앞에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천국은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과 조건 없이 섬기는 자들의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는 법(17-22)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이라 칭하며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마태는 부자였고 청년이었으며(마 19:22) 누가는 관원이라고 했습니다(눅 18:18).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이라 부른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생관은 이처럼 선한 일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선한 선생이라는 말을 금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려고 하신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율법 외에 선한 것이 없다’라는 말 때문에 부자 청년은 구원은 무엇을 행함으로(to do)얻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데(to be)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청년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은 율법 보다 물질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마 6:24)는 선택에 있어 재물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습니다.
적용: 인간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깊은 내면의 생각을 겉으로 표출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경우가 있었다면 어떤 경우였을까요?
어린이는 한 가정의 꽃일 뿐 아니라 나라의 꽃이며, 하나님 나라의 꽃이기도 합니다. 꽃의 특징은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어린이는 어디서나 아름답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어린 아이가 없는 가정은 무덤과 같다고 했습니다. 가정에 웃음을 선사하고 그 가정에 즐거움을 안겨 주며 삶의 힘을 주는 존재는 분명 어린 아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꽃이 필 때가 나무의 전성기가 되며 그 꽃이 열매를 맺음으로 그 나무를 번성하게 합니다. 우리 가정의 꽃인 어린 아이들을 잘 가꾸는 일은 나무를 가꾸는 일과 같아서 우리 가정을 번성케 하고 우리들의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나라 어린이 나라
마가복음 10:13-16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꿈과 희망을 안고 자라나는 이 땅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어린이는 미래 사회의 주역입니다.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흠과 티가 없고, 맑고 바르게, 그리고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소파 방정환선생은 색동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어린이를 높이고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려고 힘을 썼습니다. 색동회에서는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이 시작되었습니다.
1927년부터 5월의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계속하였으나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되었다가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선포하고 1970년부터는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린이날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일 년 365일이 다 어린이날이라고 할 정도로 어린이 천국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다 왕자와 공주가 되었습니다.
어린이주일이 되면 설교하는 목사는 사실 고민에 빠집니다.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고 부모님에게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린 아이를 기르시는 부모님은 거의 없고, 손자를 돌보아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시니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고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까? 유, 초등부 어린이를 가지신 부모님들이 많아야 좋은 교회인데,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를 등록하고 다니시는 어른들과 청년, 중고등부 청소년, 그리고 교회학교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 모든 교인들의 연령을 놓고 비교해보았습니다.
2010년 우리교회의 등록되고, 교회학교에 다니는 모든 교인이 1,016명입니다.
0-5세 : 27명 6-10세: 82명 11-15세 : 88명 16-20세 : 76명 21-25세 : 68명 26-30세 : 65명 31-35세 : 70명 36-40세 : 59명41-45세 : 59명 46-50세 : 64명 51-55세 : 64명 56-60세 : 62명 61-65세 : 63명 66-70세 : 41명 71-75세 : 42명 76-80세 : 40명 81-85세 : 29명 86세 이상 : 16명이었습니다. 이런 숫자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때문에 그래프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완만한 삼각형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0대-60대가 두텁고, 10세 -20세까지가 20%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0-5까지의 분포가 3%도 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저출산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20년간은 당분간 좋은 교회가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다음 세대는 정말 이 교회를 유지하고 지켜줄 젊은이들이 고갈될 것으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동리마다 공차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리를 북치면서 한 바퀴 돌면 수십 명 어린이들이 따라와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집안에서 컴퓨터하고, 게임기 가지고 놀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과외 선생을 만나야 하기에 동리에 나와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땅에 미래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있기에 어린이주일을 소중히 알고 보내야겠습니다. 어린이날과 어린이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어떻게 자식을 키우며, 자식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것인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10대의 두 아이가 그리스의 장터를 배회하고 있는 한 지혜로운 철학자를 골려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소년이 손에 작은 새를 쥐고 노인이 볼 수 없도록 뒤로 감췄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아테네의 현인이시여, 내 손에 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말해보시겠습니까?” 노인이 만일에 “죽었다”고 말하면 손을 펴고 새가 날아가게 하여 노인의 잘못을 증명해보일 것입니다. 한편 노인이 “살았다”고 말한다면 그 소년은 그 새를 꽉 쥐어 죽은 새를 보여줄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결을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노인은 소년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는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소. 그 생명은 당신의 손에 달렸소” 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무서운 책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살고 죽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에 달려 있고, 가정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찍부터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고 보니, 나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쁜 것을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었던 많은 주일학교의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여름 성경학교가 되면 땀 흘리면서 수고하셨던 선생님들, 아동부, 중고등부 담당전도사님들도 정말 귀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학교 선생님들도 모두다 좋은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정말 좋은 분들만 있었습니다. 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선생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로서 행동주의 이론을 제창한 B. F 스키너박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체벌은 사회의 원대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목적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데 그다지 이롭지 못한 방식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훈육하고 말로 나무라고, 때로는 체벌하는 그런 교육은 전근대적이고 ‘그다지 이롭지 못하다’는 말은 잘못된 교육방법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책망하지 말고, 격려하고 칭찬만하라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체벌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인생을 오래 살고 죽을 때가 되어서 수정하였습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려면 적당한 책망과 질책이 따라야 한다고 자기의 교육방법론을 수정하였습니다. 그저 칭찬해주고, 매를 들지 말라고 하였던 자기의 교육이론이 사람을 망쳤다고 잘못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격언에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이가 나이를 먹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른 살을 먹은 아이, 마흔 살을 먹은 아이, 예순 살을 먹은 아이, 조금은 어색한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나이를 먹은 것뿐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갑니다. 어렸을 때에 형성된 인격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됩니다. 어릴 때에 엄하게 길러야 합니다.
잠언1:7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9:10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은 파종의 시기입니다. 사랑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승리하기 원하면, 어린 아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어린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버지도 엄하고 엄마도 엄하지 말고, 한분은 엄하고 다른 한 분은 달래고 격려하여야 합니다. 둘 다 엄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약 1천5백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세계 제2차대전 때에 600만 명이 죽지 않았으면 현재 약 2000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현재 60억의 세계 인구에서 0.3%도 안 되는 유대인인데, 유대인은 노벨상 수상자의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이원설 박사가 쓰신 "아침을 준비하는 자는 늘 깨어 있다"는 책에는 "유대인은 왜 머리가 좋은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원설박사님이 이스라엘 대사와 이야기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대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두뇌가 뛰어난 백성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누설할 수 없는 국가적인 극비사항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박사는 이스라엘 대사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중에 유대인들이 좋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면서 그 뜻을 바로 알기 위하여 수없이 토론하는데, 우수한 민족이 된 가장 큰 이유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는데 있었다고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암기하는 것과, 각자 깊이 연구하는 것, 자유 토론하는 것이 사람을 성장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한 율법교육으로 인하여 세계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책을 읽음으로 인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슬기를 터득하고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어려서부터 명작을 읽어야 고귀한 인격의 사람이 되고 위대한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동화집도 많이 읽게 하고 위인전기도 많이 읽게 하여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글을 보니 “유태인은 미국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유태인들이 미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붙인 말입니다.
유명한 랍비의 글을 보았는데, 그가 탈무드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하여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질문을 받았습니다. “자네는 왜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하는가?” “저는 공부 잘하는 이 학교가 좋습니다. 그래서 입학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시험관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만일 자네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 학교란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시험관에게 반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학교란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그러자 시험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은 훌륭한 인간 앞에 앉기 위해서라네. 그것은 살아 있는 본보기로서 배워야 하네. 학생은 훌륭한 랍비나 스승을 지켜보므로 배우는 것이라네.”라고 했습니다.
훌륭한 인간, 훌륭한 랍비나 스승을 만나야 사람이 달라집니다. 다만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배우고, 인격을 배우고, 가치관과 인생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앞에서 좋은 스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부모이십니까? 유치원 선생님들은 어린 아이가 사용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의 부모님의 교육수준과 사는 행동양식을 파악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말투나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의 부모님을 만나보지 않아도 대략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부모 사이가 아주 좋은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가 되어 이야기합니다. “여보, 어서 와 식사하세요.” “아이구 맛이 참 좋아요.”, “여보 피곤하시죠.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아니 괜찮아요. 당신이 더 피곤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이 엉망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이 문 열어, 어서 문 열어”, “아니 못 살아, 나 못 살아, 또 술이야” 심지어는 아이들이 부부싸움 하는 것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부모는 어린이 교육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선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좋은 모습을 보이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성수주일, 헌금생활, 교회봉사, 목사님과 장로님을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복 받은 부모가 나옵니다. 그는 다윗 왕 시대에 살았던 오벧에돔이라는 레위인입니다. 그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버지가 하나님의 언약궤, 그 법궤를 자기 집에 3개월을 모시고 있었는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는지, 제사장이 받아야 하는 복은 레위 사람인 오벧에돔이 다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는 믿음의 결과였고, 열매였으며 상급이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자식들은 “다 능력이 있었고, 그 직무를 잘하는 자들이었고, 자기 족속을 다스리는 자요, 용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여 이렇게 한 집안이 다 잘되는 것입니까? 부모 된 이들이 잘하고 잘 못하는 것이 자식을 좋은 자식이 되게 하고, 못되게 하기도 합니다.
시인 타고르(R. Tagore)는 “어린이는 신이 아직도 인간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품고 탄생한다.”는 의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땅에 자라나는 어린이를 보면 희망이 솟아오르고 미래의 꿈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 뜰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라고 설교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만져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다는 말을 듣고,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을 따라 온 것입니다. 아이들이 와서 조용히 있으면 좋지만, 어디 그렇게 조용히 있지 않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 멀리 가서 놀라고 했든지, 조용히 하지 않으면 혼내준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이 그런 제자들을 보시면서 진노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4-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사실 부형들은 혹시라도 예수님이 자기 아이들을 만져 주실까 하고 데려왔는데,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셨고, 어린이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어린 아이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너무나 노엽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한 교훈의 말씀을 주시면서 아비들에게 권면하셨습니다. 엡6:4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잠언22:6절의 말씀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씀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가르침을 수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 시절입니다. 그 때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잘 배우려고 하고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을 주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여 다음세대가 더 복된 시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신앙 교육과 국가의 운명
김홍도 목사
오 헨리(O. Henry)의 작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한 남자가 아내를 잃고 어린 딸만 데리고 살았는데, 직장에 갔다오면 신문만 보고 딸아이가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보면 가르쳐 주지도 않고, 함께 놀자고 해도 놀아 주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대해 주니까, 그 소녀가 점점 자라서 불량한 짓을 하고 거리의 깡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 소녀가 죽어서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너 같은 사람은 여기에 못 들어 갈 것이라고 말하니까, 이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그 소녀를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너무 바쁘다고 해서 자기 자녀를 돌보지 않은 이 아버지 같은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라”고 말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자녀교육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고 불의와 불법이 가득 찬 이유는 자녀교육을 잘못시켰기 때문입니다. 밥 먹이고 옷만 입히면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귀중하기로 말하면 어린이들이 꽃이나 애완견이나 다이아몬드에 비하겠습니까? 그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걸핏하면 어린 학생들이 총을 난사해서 학생들과 선생들을 무참히 죽이고, 어린 학생들이 술, 담배, 마약을 복용하고, 중 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까지 임신하는 형편이니 얼마나 이 세상이 부패했습니까? 이 모든 원인이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미국의 예를 든다면 형식으로라도 학교마다 채플(Chapel) 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미국이 저렇게 타락하지 않았는데, 케네디 대통령 때 채플 시간을 없애고 성경 교육 시간을 없이한 다음부터 장발족이 생기고, 히피족이 생기고, 음주.흡연.마약 복용자가 늘어나고, 걸핏하면 총기를 난사하여 애꿎은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면 청소년들이 이렇게 타락하지 않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지혜와 명철의 근본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그 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엊그제 전국 여선교회 대회 때 김종문 감독께서 설교하시는 가운데 아주 속시원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 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찬송을 부르는 도중 윗방에 있던 그 집 딸이 문을 확 열더니 머리를 쑥 내밀고는 큰소리로 “내일 나 시험이란 말이예요”하고는 문을 확 닫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겁이 난 얼굴로 “목사님, 찬송 좀 조용히 부를 수 없을까요? 그 애가 전교에서 일등이예요” 그러더랍니다. 기가 막혀서 그 목사님이 윗방으로 올라가서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 학생 등에 손을 얹고, 예수님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쭉 설명을 해 주었더니 이번에는 울면서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해 준 일이 없어요” 그러더랍니다. 집사라도 엄마가 더 한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믿음 생활하는 것을 대학 입학보다 더 중요하고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믿음을 하나도 심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신명기 6장 4-9절은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인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철저히 가르쳤기 때문에 나라는 망해서 세계에 흩어져 살아도 그 신앙과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① 그 심령에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심어 주어 거듭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못 얻고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은 걱정하지 않고, 대학에 떨어질 것만 걱정하는 집사가, 집사입니까?
②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디 선생은 “성경이 죄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든지, 죄가 성경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든지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③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말하기 시작해서부터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또 부모가 날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이명박 장로님이 그 어머니의 기도 생활과 철저한 믿음의 생활을 가르쳐 준 데 대하여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부모의 자식이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④ 교회의 출석과 예배의 중요성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학교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침에 TV를 보느라고 교회에 안 가는데도 가만 두는 부모가 기독교인입니까? 때려서라도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전교생 앞에서 매를 맞고 퇴학을 당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2. 정직과 진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엊그제 어느 신문을 보니까, 한 예수 믿는 여자가 은행에 돈 100만원 맡겼는데, 와서 통장을 보니까 500만원으로 적혀 있더랍니다. 잠시 동안은 마음에 시험을 받았지만, 즉시 은행 담당직원한테 전화를 해서 사실을 말해 주었더니 반가워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400만원이 비어서 찾고있는 중이었는데 못 찾으면 제가 400만원을 물어내야 했었는데 참으로 감사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겼느냐?”고 해서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18살 때 점원을 하는 중에 어느 날 밤 문을 닫고 돈을 계산하는데 3센트가 남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낮에 왔던 아줌마 생각이 나서 그 밤중에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가 전해주었더니, 황금 같은 3센트라고 칭찬하며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더랍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의 세 아들, 조카까지 엄청난 부정, 비리에 쌓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않습니까? 정직과 진실을 잃어버렸으면, 일류 대학을 나와도 쓸데없고, 대통령이 되어도 무엇합니까?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권세를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죄를 더 짓고 세상을 그만큼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 시급한 일은 경제나 정치가 아니라 정직성과 진실성이 실종된 것입니다. 아무리 수지맞는 일이 있어도 “아니요”할 수 있고, 아무리 큰 고통이 따라와도 “예”할건 “예”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 심히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성공 못할 것 같고, 못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84편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했고, 역대상 29장 17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사오며...”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도 먼저 정직함,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엄청난 재물을 드렸지만, 정직하지 못하고 성령을 속이다가 큰 변을 당했습니다.
정직과 진실을 잃었으면 아무 데도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정직함과 진실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말쟁이요 잔인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직성과 진실성을 저버린 사람은 그 믿음도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에는 참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거나 더러워진 사람의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아서 그의 믿음도 파괴된 것과 같습니다.
이 나라 장래의 운명도 어린이들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달려 있습니다. 스위스나 덴마크,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국민이 몇 백 만 밖에 안 되지만, 그 국민의 정직함과 진실함을 믿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신뢰하고 사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미래의 운명도 이 국민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 학생들의 머리는 우수한데, 정직함과 성실함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자녀와 어린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과 정직함과 진실함을 심어 주면 이 나라의 장래는 밝고 소망이 있습니다.
거짓말하거나 속일 때에는 오래 기억에 남도록 따끔하게 벌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쓰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부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정직함과 진실함의 본을 보여야 따라 옵니다. 자식들 눈에 위선자로 보이면 믿음도 안 가지려고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거짓되고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던 일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3.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부모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커서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고,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압니다. 오늘날 세계가 왜 이렇게 어지럽고 혼탁해 지는가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자기 고집을 꺾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법을 어기거나 부모에게 불순종할 때에는 고통과 벌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정직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 철학이 잘못돼서 체벌을 절대로 주면 안 되고 자유방임주의로 교육해야 된다고 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하고 자라며, 또 산아제한 때문에 하나, 둘만 나아서 과잉보호와 과잉사랑을 베풀며 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술, 담배, 마약을 하고 조금만 꾸중을 하면 반항하고, 부모에게 덤벼들고, 스승을 구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화난다고 총기를 난사해서 수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죽이고 돈 몇 백만 원 얻자고 20대 젊은 여자들만 골라서 다섯 명, 여섯 명 죽여서 자동차에 싣고 다니는 끔찍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키워서 그렇습니다. 칭찬할 땐 칭찬하고 잘못할 때는 따끔하게 벌을 주어서 자기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13장 14절에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느니라”했고,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했고, 17절에는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호박순은 방향을 잡아주는 대로 뻗어 올라갑니다. 어려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소도 새끼가 젖을 먹다가 못되게 굴면 뒷발로 걷어찹니다.
4. 극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딜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유익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이 귀하다고 병역을 기피하게 만들고, 편한 자리에 있게 하려고 돈을 써 가며 운동하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군에 갈 때에는 가서 훈련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한국에 5대 명문 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등 그 다음에 해병대라고 합니다. 이 어렵고 힘든 해병대를 마친 사람은 고난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입니다. 군대만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고난, 실패의 고난, 핍박의 고난, 비판과 비난의 고난, 질병의 고난 등을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복음 5장 11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했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67절, 71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무익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로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함이라”,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왜 극기를 배워야 합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마귀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죄의 결과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고, 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 유익한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안수와 축복을 받는 비결
막 10:13-16 / 노경모 목사
인기있는 연예인의 손을 한번 잡아보려고 비행기를 타고 먼 곳까지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 취임식을 끝내고 걸어나가는 대통령과 악수하기 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TV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인기있고, 존경받고, 유명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보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램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머리에 안수를 받는 것은 더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안수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안수받기 위해서 긴 줄을 섭니다.
안수라는 것은 악수와 격이 다릅니다. 악수는 반갑다는 표시지만 안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저도 영적으로 존경받는 영성이 깊은 분들의 안수를 받은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그분들의 안수를 받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분들의 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감이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은총과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실천하셨던 우리의 영적이 스승이셨고, 예수원의 설립자이신 대천덕 신부님을 아시지요. 2002년 8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요. 그 분의 기도 중에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가 있지요.
"주님, 제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허락치 않으신다면, 저로 하여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어떤 분이 대천덕 신부님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만 만나고도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천덕 신부님이 그렇습니다. 나는 그 분을 단 한 번 만났습니다. 그것도 서른의 좀 늦은 나이에.. 예수원에서 아침 예배드리는 그 조용한 순간에 잠시 눈이 마주친 것이 그분과 나의 인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대천덕 신부님은 소천하셨습니다. 불과 몇 달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짧지만 긴 인연, 하나님의 축복, 아마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과의 눈길을 마주치는 것으로도 그분에게 인생의 교훈을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릴 정도로 대천덕 신부님은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셨지요.
그 분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저는 새해 초두에 대천덕 신부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수십명의 사랍들이 어느 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새해 초에 대천덕 신부님은 고령의 나이에 불편한 몸으로 그 곳에 있는 분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분은 안수기도를 잘 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집 주인과 잘 아시는 사이인지라 집 주인의 간곡한 부착으로 기도를 하신 것 같아요.
그 분은 가장 먼저 목사인 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모습으로 제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시면서 축복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많은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지만 1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기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까지 제 마음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기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리라" 아멘.
저는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 많은 분들을 위해서 어떤 때는 안수하면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기도 그대로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나가는 놀라운 은총을 그 분의 기도대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으로 훌륭한 분들의 안수를 받는 것도 좋지만,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로부터 직접 안수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은 우리가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서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터치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 안수를 받는 어린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린이가 부러워보이지 않습니까? 복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께 직접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안고 안수를 하셨으니...
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안수를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신데 왜 애들을 데리고 오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바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제자들에 대해 오히려 분히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바쁘신 예수님이 왜 어린이들을 반갑게 맞아 안으시고 손을 얹어 안수를 안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안고 안수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오직 어린이들외에는 말입니다. 물론 안수하여 병을 고치신 사람들은 많았지만 직접 안고 안수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에수님이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안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지요. 그러나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순진하고, 정직하고, 어른의 말에 순종하고, 교만하지 않다는 어린이들의 보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어린이들을 사랑하셔서 어린이들을 직접 안고 안수하신 이유를 15절에서 찾아야 합니다. 15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들이 자세에 대해서 예수님은 늘 감명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을 복을 주시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직접 안고 안수를 하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어린아이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먼저 여기서 '받든다'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받는다'라는 말은 '받아들인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 전파하시고 가르쳤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렇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이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천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인데 천국이 어디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따집니다. 히브리서 9:27을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15절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둘째, 천국을 환영합니다.
'받들다'라는 말은 '환영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천국을 환영합니다. 이 말은 천국에 내가 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습니다.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천국을 환영하고 천국에 대한 기대감과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멋진 파티를 준비했다고 초청을 했는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파티를 환영하고 기대감과 소망을 가져야 내가 보람이 있고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별로라는 표정을 짓고, 심지어는 귀찮다는 자세를 보이면 정말로 힘빠지고 기분이 상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초청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에 오도록 보낸 종들에게 안가겠다고 거절을 합니다. 임금이 베푼 잔치 초청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들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자기 일하러 갑니다. 바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임금의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이 너무나 화가 나서 그 사람들 진멸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잔치에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거절하는 이유가 많은지, 좀 더 돈 벌고 난 뒤에..., 좀 더 나이들고 난 뒤에....,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좀 한가해지고 난 뒤에..... 이렇게 초정에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하고 이유가 많은가 봅니다. 단순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린아이들처럼 천국을 환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환영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만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안으시고 안수하며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받아들인다'라는 말 속에는 '영접한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천국을 영접했습니다. 즉 천국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쉽게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을 보면, 보편적으로 제일 먼저 애들이 믿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믿고 나중에 아빠가 믿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장 먼저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으로 성으로 입성하실 때, 성전에서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분을 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15-16을 볼까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사람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영접하기를 원하시느냐 하면,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요한복음 1;12을 봅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가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예수님 나에게 오세요, 내 마음의 문을 엽시다. 이렇게 한 번 외쳐 보세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안고 안수하여 축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린이주일은 어린이만 선물받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을 받기를 바랍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안아주시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희 외로움과 고통과 아픔을 다 알고 있단다. 나에게 안겨라, 내가 너를 안수하고 축복해 주마. 이 선물을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들과 하나님 나라
이정선 목사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 집안에 또는 친척이나 이웃 가운데 병자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집 안에 계실 때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달아 내렸던 일도 있었지 않습니까? 어쨌든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누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부모들이 그랬을 가능성이 많겠지요.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어떤 경우에는 정말 부모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젊은 부모들이 왜 자녀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희생해야 하느냐고 항변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환경과 조건도 바뀌어 있기는 합니다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부모는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자식만은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도처럼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정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동물들도 새끼들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또 위해서 희생하던가요? 거미가 새끼들을 낳으면 이 새끼들이 어미의 몸뚱이를 먹습니다. 어미의 몸이 새끼들의 첫 번째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포유류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먹일 젖이 없는 개미는 새끼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주고 죽습니다. 거미가 새끼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자의적인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미는 새끼들을 온전하게 길러냄으로써 그 존재의의를 다한다는 자연의 법칙, 생명의 법칙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부모는 허리가 휘고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자식이 잘되고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자식사랑이 도가 지나치거나 방향이 잘못되어서 자식도 버리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수도 없지 않습니다. 부모의 과잉보호가 아이들을 의존적으로 만들고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망나니를 만들기도 합니다. 고액과외를 시킨다고 주부들이 몸을 파는 일까지 있었는데, 아무리 자식 공부시키겠다는 정성과 사랑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빗나간 사랑이고 사회적으로 큰 해악이 아닐 수 없지요. 어쨌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부모의 미덕, 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그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왔던 부모들이야말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만져주심과 축복하심을 받도록 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꾸중을 듣고 혼이 났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피곤하신 예수님에게 쓸데없이 아이들까지 데려온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른들 문제도 크고 중요한 것이 많은데 하찮은 아이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근대사회 이전의 세계에서는 아이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습니다. 특히 동양문화권에서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순종만 강요되었고 기존질서와 가치를 수용하고 습득하는 것만이 미덕으로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어른들의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사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방해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늘 하던 말은 ‘애들은 가서 놀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여기 나오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고 야단칩니다. 이 부모들로서는 커다란 장벽에 부닥친 것이지요. 이것은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고 인도하려는 부모의 의지와 노력이 때로는 장벽에 부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사건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려고 할 때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때로는 공부가 그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친구들이 예상치 못한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학교나 선생님이 신앙생활하는 것을 힘들게 할 때도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시겠습니까? 여기서도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이들 데려오는 것을 막고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분히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이야 물론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았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매우 못마땅히 여기셨단 말이지요. 제자들이 오버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행하는 일들이 이 제자들의 행위처럼 오버하는 행위, 오히려 하나님을 무척 속상하게 하고 하나님이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일들인 수가 많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닫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차고 넘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충성심이 많은 만큼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되고야 말테니까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지 말고 금하지 말라.” 어린 아이들이라도 주님을 만날 충분한 권리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와도 동일한 한 인격체이며, 그 아이와 하나님 사이의 일대일 관계로 인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독립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른 한 사람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이 어린 아이 한 사람을 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어른들이 막아야 할 이유와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와 자녀간의 올바른 관계설정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이들 데려오는 것을 막은 이유는 ‘아이들이 뭘 알겠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맑은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는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어요. 6.25 전쟁의 와중에 있었던 일인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로 공산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모조리 끌어내서 한쪽에 세워놓고는, 벽에 걸려 있던 예수님의 그림 액자를 떼어와서 누구든지 그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밟으면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와서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밟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나오더니 그 더러워진 예수님 그림을 집어들고는 자기 옷으로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 품에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겠다고 그 예수님께 침을 뱉고 발로 밟을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라서 뭘 몰라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믿음을 원하실까요?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거기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믿으면 그냥 믿습니다. 거기에 무슨 복잡한 계산이나 의심, 또는 자의적인 해석이 없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하고 얼마나 예수님을 실망시키는지 한번 볼까요?
바로 이 본문의 앞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 실례입니다. 앞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혼에 관한 논쟁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아내 버리는 일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악행을 금지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서 마치 이혼이 얼마든지 허용되는 것처럼 억지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좋고 율법에 충실하다는 어른들이 하고 있는 짓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것 못해요. 아이들은 그렇게 정교한 범죄를 꾸밀 만큼 인지능력이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그렇게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르고 재서 자기에게 편할 대로 만드는 어른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그저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른들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한 돈 많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영생, 즉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것까지는 칭찬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를 사랑하셔서 정말로 필요한 것, 그 사람이 영생을 얻는 데 진짜로 요구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생에 관심이 많던 이 사람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에는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게 바로 어른의 모습입니다.
이 어른은 세상의 가치에 깊이 몰입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원과 소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소망해서 모든 율법을 지켜온 사람이 세상의 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모순 되는 현상 아닙니까? 글쎄요,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마음껏 부를 누리라고 허락해 주셨다면 좋았겠군요.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고영역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인간의, 아니 어른이라는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의 아집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되고,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어른처럼 계산이 빠르고 욕망에 사로잡힌 아이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라도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사람은 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예뻐서도 그러셨겠지만, 어른들이 그 아이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고 그 머리에 안수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는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해 줄 수 가장 큰 선물이고 중요한 역할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데, 순수하고 거짓없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주일은 꼭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어른들의 믿음을 돌아보고 배워야 할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순수한 믿음을 배우고 가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One thing you lack)
막 10:17-22 / 이기복 목사
2014년 동계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중에는 한가지 부족한 것으로 메달을 놓친 선수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주 결정적인 한 가지 장점으로 인생을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한 가지 모자란 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고 참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장점과 단점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큰 배의 침몰이 폭격을 맞아서 침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만 구멍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물이 큰 배를 침몰시킵니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쏘아올린 우주선 가운데 hallenger호는 부품 하나의 결함으로 쏘아 올린 지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공위성을 발사하는데 완벽하게 준비했는데도 한 가지가 부족하여 실패하고 또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여 성공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필수 비타민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자연의 혜택을 통하여 생성이 되는 필수 비타민은 한 가지만 부족하여도 몸 전체에 이상이 옵니다. 비타민 A가 부족하면 간과 눈에 치명적입니다. 비타민 C가 부족하면 면역력이떨어져 각종 질병에 노출됩니다. 비타민 D나 E나 모든 비타민이 하나만 부족하여도 우리 몸에 큰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와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상담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그 젊은이에게 말씀했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공관복음인 마태복음19장, 누가복음18장에서도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주님을 찾아 온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으며 돈이 많은 부자였고 당시에 관원이었습니다. 즉 세상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 도덕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열심히 있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율법의 계명 들을 철저히 지킬까를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영적인 문제에도 심각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하는 문제로 번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2월 첫 주 부터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위한 30일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만약 30일 후에 세상을 떠나야 할 시한부 인생이라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재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수명이 길고 짧은 것뿐이지 누구나 시한부 인생입니다. 시한부인생을 영어로는 Time limited life라고 하는데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모두는 시한부(時限附)인생입니다.
2. 이 청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문제를 상담하면서 주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냐’하는 문제입니다. 17절을 보면“ 길에 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그는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영어로 Good teacher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스칼레”“ 디다스칼로스”라고 하였습니다. 즉 좋은 선생, 선한 교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4대성인 중의 하나로 믿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위대한 스승이나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신 위대한 사회사업가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은 못 고칠 질병이 없는 신비한 치유사로 생각도 합니다. 또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신통력이 있는 분으로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길 눅 5:32절과 마 9:13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 뵙고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를 가리켜 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2절에도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 라하는 유대인의 관원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라고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선생님이시지만 이 땅에 선생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본문 18절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대답하시길“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나 선생님들 중에 온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나는 선한 선생님의 차원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스승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3. 영생에 대한 오해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요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은 영생이 어떤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기 “무엇을 하여야”라는 헬라어는 “티 포이에소”인데 그 뜻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입니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이 어떤 행위나 업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영생이나 구원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느냐 즉 Doing이 아니고 먼저 어떤 존재가 되느냐 즉 Being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질문은 무엇(What)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고 어떻게(How)해야 하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청년은 구원과 영생의 근거를 행함을 가정하여 생각하고 믿은 것입니다.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의 생각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묻는 그에게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의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대답하길 그러한 율법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 있게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청년입니다. 아주 모범적인 젊은이요 관원이요 율법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1절에 “예수께서 그를 보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그를 보고”라는 말은 그냥 예사로 본 것이 아닙니다. “아주 주의 깊게 보시고” 또는 “주시하고”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가페션”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아주 관심을 가지고 아가페의 사랑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도 그 젊은이를 아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아주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다 하겠습니다.” 더 큰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가서 네게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영생을 얻고 내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이 어렵고 희생이 따르는 결단을 하라는 것 입니다. 과연 이러한 말씀 앞에“ 예”하고 순종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네 가지고 있는 “돈 좀 잠시 빌리자”
“네 부동산을 잠깐만 빌려 다오”해도 우리는 못한다고 하지않습니까? 저는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말 깊은 신앙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외적으로 믿는것과 내면의 신앙은 달랐습니다. 웨슬리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갑을 세례 받지 못한 사람은 온전히 세례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4.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찾읍시다.
본문의 젊은이에게는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의보화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최고의 영광과 축복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22절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생을 소원하는 사람이 가진 재물 때문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서의 보화”란 부자 청년이 소망하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의 아버지 안토니는 본문의 말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그 유명한 사막의 영성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독일의 거부였던 모라비안 부흥의 주역 진젠돌프 백작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살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는 성구를 보고 은혜를 받아 자기의 재산을 다 바쳐 독일의 경건주의운동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꺼져가던 족일 교회에 새로운 부흥운동과 세계 선교에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물질주의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성의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의 집에 모시고 자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9:8절에“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 눅 19:9-10절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여 함이니라” 얼마나 큰 변화이고 큰 축복입니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예수 믿고 따르는 성도들로서 과연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도합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일까요? 사랑일까요? 예배일까요? 기도생활일까요? 헌신일까요?
둘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의심입니까? 미움입니까? 비난입니까? 입만 열면 남 비난하는 것은 없습니까? 자식이 우상은 아닙니까?
셋째는 자기 자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입니까? 열등감입니까? 우월감입니까? 사치입니까? 필요없는 걱정입니까?
넷째는 물질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는 않았습니까? 물질이 우상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아직도 내 생명 내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가지 부족한 것
마가복음 10:17-31
예수님은 바위와 같습니다. 이 바위에 부딪히면 깨어지고 가루가 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20:17-18)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이 반석에 부딪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본질이 노출되면서 낱낱이 벌거벗겨 졌습니다. 이스라엘 인들과 자칭 의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부자 청년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한 부자 청년이 자신의 존재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22).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청년이었다고 밝힙니다(마19:22). 누가복음에서는 그가 관원이었다고 덧붙입니다(눅18:18). ‘관원’은 영어로 ‘rul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자라 불리는 높은 직책에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 ‘지도자’ 이 정도면 현대인들이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는 또한 영생에 대한 관심도 있고 율법도 잘 지켰습니다. 소위 신앙도 좋았다할 것입니다. 일등 신랑감이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지만 오늘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22절입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22). 복음서에서 기록된 여러 만남들 중에 가장 쓸쓸한 뒷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세기의 화가 와츠(G. F. Watts)는 이 청년을 주제로 《재물이 많은 까닭에》라는 제목의 유화를 그렸습니다. 그림 전면에 가득 차도록 이 청년을 그려 놓고 있는데 풍채가 매우 좋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가 입은 옷이 눈에 띄는데 윤기가 흐르는 가죽옷을 두르고 있으며, 목 주위를 감싸고 있는 털은 북슬북슬 서 있어 매우 부요해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뒤쪽으로 떨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람한 어깨는 힘없이 내려뜨리고 있어 그 처량함이 더합니다. 부유하지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 더 쓸쓸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이 청년을 사랑했습니다. 21절에 분명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위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처럼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17절입니다.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도 그는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청년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릅니다. 이런 호칭에는 예수님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몰차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선하십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청년으로 하여금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청년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기준이나 판단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학파마다 다르고 랍비마다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청년은 영생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며 십계명의 조항들을 언급을 하자 청년은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19)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실제 이 청년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서 말하는 조항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을 꿰뚫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1) 한 가지 부족하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마음 중심에는 재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서 부차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쉐마’라고 하여 금과옥조로 여겼던 말씀은 신명기 6장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청년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주님이 그것을 건드린 것입니다. 자기 본질이 드러나자 청년은 당황하였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22)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중심에 있던 것들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7-9)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것은 출신이요, 율법이요,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자리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인생은 자기만족적인 삶일 뿐이지 그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고 자기 기준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확신이 흔들릴 때가 많았고 결국 영생에 대한 확신까지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은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붙잡고 있으면 썩고 그것이 우리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우리들도 부자 청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아마 물질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이념이 될 수도 있고 명예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들을 내려놓기를 원하고 내려놓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상처를 꼭 끌어안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도무지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치유도 되고 진정한 구원의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당신이 감추고 있으며 은밀히 즐기고 있는 것을 다 내어놓을 것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압니다. 내려놓는다고 하여 다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대로 돌려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한 명예와 지식을 얻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에게는 잃어버린 재물보다 더한 것으로 주셨을 것입니다. 실제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을 믿었던 마가는 자기 다락방을 소유하였고, 자기 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삭개오는 절반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예수님의 관심은 이제 제자들을 향합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놀람이었습니다. 24절에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고 전하고 있으며 26절에서는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고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까닭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물질적 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생각했으며, 부를 소유한 권세 있는 자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심하게 말씀합니다. 24, 25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이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낙타’라는 헬라어 발음과 배에서 사용하는 ‘로프’의 헬라어 발음이 유사하다 하여 바늘귀에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이나마 남기려하였습니다. ‘바늘귀’를 예루살렘 성에 있는 ‘바늘귀’라 불리는 작은 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여 어떻게든 낙타를 밀어 넣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예수님의 단호함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입니다. 인간이 그만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 이런 삭개오를 향하여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교회사에서도 부자 청년과는 반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4세기에 이집트 사막에서 최초의 수도사 운동을 일으켰던 안토니입니다. 그는 오늘 부자 청년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안토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청년이었던 안토니는 물려준 유산만 가지고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고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옷 한 벌만 걸치고 사막으로 가서 은둔하며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는 자기 직업과 배와 가족까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1:18)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1:20)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7절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어떻게 가능해 하지만 하나님께서 결단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강한 확신을 주셔서 신앙의 결단과 모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이 땅에서 낙을 누리기보다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진리와 영생의 길이 더 좋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십니다. 그 길이 더 좋고 행복하기에 우리는 즐거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현세와 내세의 축복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의 것을 버림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계산해 보면 수지가 맞습니다. 30절입니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두 가지를 약속해 줍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버린 자는 그 백배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실제 실현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가족을 버린 대신 그들은 교회라는 큰 가족을 얻었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나눔으로 다 채워졌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전 세계가 그의 집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에 수많은 하늘가족들을 거느리는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것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더 풍성하게 되갚아주시고, 더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신앙인의 역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한 보상은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린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이 세상은 찰나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영원합니다. 계산이 됩니까? 우리들의 문제는 내세나 천국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물질과 권력과 헛된 안정에 매여 영원한 천국을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손해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작은 것을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계산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더 커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근심하며 돌아서는 슬픈 뒷모습을 보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