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8
4월25일[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OBjIVaIYewY
[서울대교구 태철민 엘제아리오(경찰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
언젠가 동남아시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그야말로 극진히 챙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남국 특유의 향기 가득한 산해진미가 매 끼니마다 풍성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맛이 너무도 밋밋했고, 그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맛이 검증된 빵이나 음료, 야채, 과일 쪽으로만 손이 갔고, 제 머릿속에는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음식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치, 어리굴젓, 우럭매운탕, 부대찌개, 갈치조림…….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인데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선교사 형제들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기후, 환경이 180도 다른 이역만리 타국에서 가장 음식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수시로 떠오르는 향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가 예수님의 당부 말씀에 따라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이 가장 우선하여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만민들 한 형제, 한 동포로 바라보는 만민동포애, 인류 전체가 이웃이요 한 형제로 바라보는 큰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정과 기적을 이루는 힘을 선교사들에게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협력자인 성령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나 비유를 통해 성령께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령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람’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이 무엇입니까? 공기의 흐름입니다. 밀도 높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흘러가는 공기가 바람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 기쁨, 은총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령, 결국 고기압 자리에 있는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 질병과 상처, 좌절과 분노 상태에 놓인 우리, 결국 저기압 자리에 있는 우리 인간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뜨뜨미지근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나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폭발적이며 뜨거운 하느님 현존 체험도 요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이웃 선교나 능동적인 복음 선포는 뒷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협조자이신 성령과의 친교가 활발하지 못해서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노력의 결핍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과 함께, 그분의 인도에 따라 하겠다는 의지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도 낮추고 그분께 내어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각자가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
(2)
산책길에서 한 모녀를 만났습니다. 젊은 엄마는 갓난아기가 아닌 예닐곱 살 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보니 중복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애야! 저 꽃들 좀 봐. 정말 예쁘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 왔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제 눈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습니다.
엄마도 아이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까? 평생을 저렇게 살아야 할텐데, 그 세월을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오래오래 두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무상으로 우리에게 갖은 은혜를 베푸시고, 놀랍게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총으로 초대하실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물론 그런 이유도 해당하겠습니다만 …….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 결핍과 연약함으로 인한 주님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고, 구원과 영생으로 초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갖은 세파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너무 안쓰러워서, 고통과 시련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가련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구절 중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강조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게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 먹듯이 죄를 짓고, 똑같은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에 따르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언젠가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SzgfhO87vE
++++++++++++++++++
<더 좋은 꿈을 구별하는 법>
내가 살고 앞으로 살 세상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 산다고 같은 세상에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감옥에 삽니다. 세 번의 올스타, 여섯 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짐 선버그가 어느 날 감옥에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야!”라고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는 감옥에 갈 거야!’라고 해서 그 꿈을 이뤄드렸어요.”라고 했습니다.
꿈은 나를 무생물로도, 생물이나 동물로도, 인간이나 하느님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자해하던 군인은 자해하면 할 일이 있어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주 공간에 붕 떠 있는 먼지처럼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일이 다 나를 더 높은 행복이나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돈이나 명예만 좇다가 결국 파경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꿈은 하느님 나라의 지원을 받습니다.
단편 영화 ‘요나’(Jonah)가 있습니다. 움부나와는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의 친구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음부나와는 이 사진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물고기를 보러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친구는 떠났고 음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마을은 오염되었고 관광객이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노인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와 싸우다 이번엔 물고기에게 먹혀 생을 마감합니다.
물고기는 음부나와의 꿈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고 그렇게 할 의무도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늑대나 원숭이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저의 대학 친구는 아이 하나인데도 유학을 보내어 매년 1억씩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더 높은 곳에 살려면 더 높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 높은 지원이 옵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저도 사제로 살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많은 표징들을 보며 삽니다. 그 표징들을 보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뇌종양이 있는 아기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종양이 싹 사라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표징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어내리는 꿈은 그것을 준 놈이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능력도 없고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높은 꿈을 꿉시다. 더 큰 지원이 오는 꿈을 꿉시다. 그러면 더 완전하고 사랑 가득하고 영원한 능력의 나라에서 이 지상에서부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를 타면 좌석이 늘 신경 쓰입니다. 저는 주로 창가보다는 복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창가에 있으면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복도 쪽에 있는 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도 쪽에 있으면 원하는 때에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옆에 있는 분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도 복도를 원했습니다. 다행히 복도 쪽으로 좌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좌석을 찾았는데 제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그 사람도 저와 같은 좌석번호였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오더니 착오가 있었다면서 제게 새로운 좌석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좌석이 복도 자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제 옆으로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옆에 두 좌석이 비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1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주 편안하게 거의 비즈니스 좌석의 수준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부활 선물로 편안한 좌석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해서 ‘발현산’을 올랐습니다. 저는 뾰족한 바위산을 오르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올랐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들것으로 모셔 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해서 올라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환희의 신비 5단이 청동으로 있었습니다. 저와 순례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이 발현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는데 성모상이 그곳에 모셔진 사연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발현산을 올랐고, 그분들의 자녀 중에 아픈 아이가 있었는데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비행기 좌석이 좋은 곳으로 옮겨져서 감사했다면, 아픈 아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순례자들은 아이가 치유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성모상 주변에는 많은 순례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모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하늘에는 둥근 해무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저와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하늘도 순례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하신 산상 설교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하였고, 그 믿음이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그 믿음이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기도 후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복음 선포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 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우리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본디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나지만 오늘 복음이 포함된 9절에서 20절은 부활과 승천,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과 함께, 이를 구현하고자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너희”라는 주어와 “주님”이라는 주어가 상응하면서, 복음 선포가 우리 몫이라면 그 뒤 여정은 하느님께서 몸소 완성하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제시하고, “그분께서”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이나 설득 또는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일상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독서). 그러면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복음). 복음화를 완성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5-20ㄴ)
1)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새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새 계명’이라는 말은 ‘마지막 계명’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의 마지막 명령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계명을 합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2)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말고, 사람이신 예수님의 심정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6-38)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처지였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도, 승천하신 뒤에도, 여전히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처지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쓰러움’이었을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다.”로 해석되고,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타까움’입니다. <그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바로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입니다/(마태 18,12)> 그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못 믿어서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지만, 그들이 겪게 될 고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안쓰러워하신 것입니다.
3)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을 나타낸 말씀으로 해석하면,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는, ‘흐뭇함’으로,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는, ‘안타까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협이나 경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즉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또는 예수님의 심정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심정이 되실까? 흐뭇하실까? 안타까워하실까? 안쓰러워하실까?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또 내가 사랑하고 있는 주님께 얼마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4) 17절과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신다는 증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함께 일하시면서’입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반대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서 실망할 때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체험’과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외로운 처지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카이사리아에 있는 회당 앞에서 이교도들의 제사가 행하여지자, 이에 분노한 유다 최고 의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교도의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저항에 잔인하게 대응합니다. 성난 유다 군중이 안토니아 요새를 습격하였고, 로마군은 마침내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로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합니다.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결별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고, 로마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로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합니다. 마르코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온 베드로를 만나 그의 마지막 생애에 아들로서, 시종이며 통역관으로 함께하였습니다. 또한 사촌 바르나바의 소개로 함께 복음 선포 여행을 하였던 바오로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해 주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글로 남긴 복음사가가 마르코입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전한 교회의 첫 복음서가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마르 8,29; 15,39 참조)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으로 복음서의 제목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의 ‘긴 결말’(16,9-20 참조)에 속하는 부분으로 2세기 무렵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를 보충하고 싶었던 이들이 다양한 전승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빈 무덤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이를 더한 결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목격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16,11.13.14 참조)을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 쓰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복음 선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로 드러날 것입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믿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결의와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의 수용과 거부에 따른 결과는 극명한 차이, 곧 구원 아니면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
[부산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님]
<예수님의 정체>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실상, 마르코 복음을 저술한 분이 누구인지 우리로서는 현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유다인들의 풍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풍습까지 아는 것으로 미루어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그는 폭넓고 개방적인 사람이라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믿어 다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다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마르 12,9) 그는 이방인들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7,28; 15,39)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자들조차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한 모습을 본 사람들을 사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6,14)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십니까? 막상 고백하려고 하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이 순간이나마 다시금 그분이 누구신지, 특별히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한 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께서도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기 위해 복음을 쓰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할 당시인 A.D. 70년경은 초월적인 예수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러기에 앞서 믿는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주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부활하신 다음의 모습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무슨 말씀과 어떤 일을 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우리가 평상시 묵상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사건과 말씀을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그분에게 나아가는데 매우 좋은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당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상당히 꺼리신 것 같습니다. 어쩌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1,24.34; 3,12; 5,43; 7,36; 8,26.30; 9,9)
이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경우를 경계하셨던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을 따로 불러 교육시키셨던 장면 (4,10-25; 5,37-43; 6,45-52; 7-17-23 등)이 나오는데,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해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단견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마치 정리된 듯이, 잘 알고 있는 듯이 뒤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선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상입니다
“어느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8,34-35)
이는 당시에 자행되고 있던 박해의 와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도록 격려하고자 하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신자들에게도 자기희생을 통한 나눔의 영성을 권고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16,15)
복음사가 마르코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오늘 마르코 축일을 맞아 마르코에 관한 성경의 몇 대목을 읽으면서 새삼 그의 정체성에 관해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사도행전 12, 12절입니다. 이때 교회는 헤로데의 박해로 인해 요한의 형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교회는 이런 곤경의 때에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베드로는 이 기도의 힘으로 천사의 도움을 받아 쇠사슬을 끊고 감옥에서 탈출하고 난 다음 찾아간 곳이 바로 마르코의 집입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마르코’란 ‘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으로,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가 바로 마르코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마르코는 박해 시대를 산 신앙인 집안 출신의 젊은이였으며, 마르코와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베드로는 이런 마르코를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5,13)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마르코가 바르나바와 사울의 키프로스 전도 여행을 동행합니다. “그때 요한 마르코도 그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13,6) 그런데 이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2차 전도 여행 시작 전에,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지만”(15,37), 바오로의 반대로 말미암아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납니다.”(15,39) 이런 마르코는 네로 박해 후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이 짧은 인용을 통해서도 마르코가 어떤 사람인지 잘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단순히 외모나 이름만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체성이란 바로 ‘그 사람’만의 가치관, 신념, 특성이 포함하여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신념이 없이 남을 따라가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즉 마네킹처럼 남이 입혀 주는 대로 옷을 입지 않지요. 오늘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에 동참하도록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마르코 사도는 베드로에게 직접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마르코 사가는 단지 복음을 기술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만난 다음 그로부터 들은 것과 자신이 ‘바르나바와 사울(=바오로)’과 함께 전도함을 통해서 이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 다음에 기술했기에 이 말씀의 무게와 진정성이 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로 다가옵니다. 마르코 사도는 사도 베드로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5, 8~10)라는 말씀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또 그 앎을,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신당부하신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고, 살도록 권고와 함께 기술하고 우리를 복음 선포에 동참하도록 호출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야말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제자의 사명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 복음을 쓰신 당대 교회는 바로 어려운 박해의 시기였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은 물론 “나의 아들 마르코”(5,13) 역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곧 환난과 시련의 때인 박해에도 복음을 선포할 사도로 선택받았으며,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자신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16, 20)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마르코 사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도로 선택받은 사람답게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고, 그 삶의 결실이 바로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라는 복음서이기에, 1장 1절 곧 첫 문장부터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의 핵심, 절정은 바로 9장 9절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아내어 알려 주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드러내셨다는 점을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서 재차 확인해 줍니다.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셨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마르코 사가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했으며, 마르코 복음서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 마르코는 누구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복음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삶의 기나긴 여정, 곧 시련과 환난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고 기술하면서 깨닫게 된 메시아 신비, 곧 파스카의 신비를 보고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은혜는 바로 한 사람, 그가 곧 마르코였기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야기’를 기술한 일입니다. 이 일은 바로 마르코가 마르코답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복음환호성)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삶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었을 때, 이제 막 후반기를 맞이했거나 곧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이미 후반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요? 그들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첫째, 인생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둘째, 이제 나답게 살고 싶다.
셋째,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인생 전반기에는 주로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하면서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많은 것을 하고 또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면, 이제 내려놓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작은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도 황창연 신부님처럼 큰 신부가 되어야지.”
그 친척은 아마 유명한 신부를 큰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잘하고 이를 통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온 힘을 쏟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글이 아닌 몸으로 주님을 알려야 함을 묵상합니다. 특히 나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 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인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시지요. 2,000년 동안 읽히는 성경을 기술할 정도로 그의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그 뛰어남을 살려서 자기 이름을 더 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알려야 할 것은 주님뿐이었고, 주님의 기쁜 소식뿐이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만을 알리려고 하고,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만족을 얻었을까요? 의미 있는 삶을 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함으로 인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 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길 기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의 길>
마르코 16,15-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기쁨의 길>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기쁨이 오시어
기쁨으로 삼으시니
기쁨이 되어
기쁨을 언제나
기쁨을 어디서나
기쁨을 누구에게나
기쁨을 나누러 떠나는
기쁨이 함께하시는
기쁨의 길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적 삶, 순교적 삶>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한결같이-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 89,2)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012년도 수도원 설립 25주년 감사제 때 낭송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마지막 연입니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 많이 나눴고 하루도 되뇌어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 좌우명 고백시와 더불어 2014년 안식년 중 산티아고 순례여정 후, 늘 생각했던 인생여정 중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했을 때, 나는 과연 어느 시점에 자리 잡고 있겠는가의 점검이었습니다.
아침 6시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태어나 오후 6시 해가 짐과 동시에 죽는 인생이라면 나는 어느 시점(時點)에, 또 봄철에 태어나 겨울로 끝나는 삶이라면 나는 어느 계절의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늘 나눴지만 저의 경우는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확인이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오늘 하루를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젊음은 나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처럼 샘솟는 꿈과 열정의 삶이라면 마음은 늘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에. 영원한 현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기에 하루하루 마지막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죽어야만 끝나기 때문입니다. 옛 어른이 오늘 말씀이, 또 교황님의 오늘 말씀이 인생순례여정중의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나이테는 어떤 재주로도 흉내낼 수 없다. 사람들은 그의 성과에 감탄하지만 그의 노력은 따라하지 않는다.”-다산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면 쇠와 돌에도 무늬를 새길 수 있다.”-순자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은 영원한 삶에 유익이 되는 향주삼덕(向主三德)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1.인내, 2.현명, 3.용기, 4.정의, 5.절제에 대한 강의에다,어제의 6.믿음, 7.희망, 8.사랑의 향주삼덕입니다. 향주삼덕에 대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령께 마음을 연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 신적덕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신뢰를 잃었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믿음에로 다시 열어주실 것이고, 좌절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안에 희망을 일깨워주실 것이고, 우리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부드럽게 하실 것이다.”
강론후에는 어김없이 평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교황님의 다음 말씀도 잊히지 않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이다. 이런 전쟁의 비극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은 무기 생산자들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 중에 있고,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삶입니다. 교황님의 시야는 전 세계 고통중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4월25일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이런 앞서의 모든 성찰이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 순교적 삶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흡사 유언처럼 참 엄중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선포 사명은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우리 신자들의 기본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신자여야 비로소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받아들여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 구원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선포의 핵심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환호송과 영성체송이 복음의 핵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알렐루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물론 멀리 파견되어 활동하는 복음 선포자도 있지만, 각자 삶의 자리 또한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선포의 장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합니다. 어디서나 복음 선포자의 선교사로서의 신원입니다. 다음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심을, 하느님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의 일을 이루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ㄴ)
바로 하느님곁에 계신 초월자(超越者)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내재자(內在者)가 되시어 늘 우리의 일을 완성에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니, 새삼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예수님이니 얼마나 든든하고 복된 복음선포자의 삶인지요!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복음선포의 사도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안팎은 하나입니다. 안으로 충실한 제자가 밖으로도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충실한 제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가르쳐주십니다. 1.겸손과 2.깨어 있음과 3.믿음입니다.
1.“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애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2.“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3.“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중,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나나이다.”(시편 89,16-17)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것으로 봐 둘 사이는 영적 부자 관계였던 것 같은데 둘 사이에는 인간적으로도 나이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코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마르코는 어렸거나 젊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은 베드로가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얘기이고 여기서 베드로는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마르코의 어머니 집은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아들처럼 돌봤던 중국 신학생이 신부가 되어 사목하던 곳을 제가 방문하러 갔는데 마침 그때 그 신부가 베드로처럼 공안에 잡혀갔고, 그래서 저와 신자들은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마르코 어머니 집에 모여서 기도했던 사도행전의 신자들처럼 모여서 기도하였는데 그날 밤에 그 신부가 감격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풀려나 얼싸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르코도 어렸을 때 이렇게 베드로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때문에 같이 고초를 겪고, 하느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기쁨을 같이 나눕니다.
우리말에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있고 누가 누구와 동고동락했다면 이는 둘 사이가 매우 깊은 관계임을 뜻하는데 베드로와 마르코는 세속적 동고동락이 아니라 영적인 동고동락을 나눈 사이이고 그래서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때의 마르코는 영적으로 그리 성숙한 상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와 만났지만 베드로 사도는 홀연히 떠나고 어제도 읽은 사도행전 12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니까 마르코는 사울과 바르나바의 1차 선교의 동반자가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를 모두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13장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마르코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5장을 보면 마르코의 동반을 놓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투고 그래서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부터는 둘이 갈라서는 빌미가 됩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이런 것을 보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대 성인으로 여기는 이들도 인간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또한 도전도 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싸우고 갈라질지라도 영적 성장의 여정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나의 여정이 멈추어서는 안 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이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코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주님의 복음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도가 되고 복음사가가 되는데 우리도 이런 마르코에게서 위안과 도전도 받으면서 영적 성장을 해가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일상의 삶!>
오늘 복음(마르16,15-20ㄴ)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고, 승천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일상의 삶!'
복음 선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하고, 일상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1베드 5,5ㄴ-14)는, '겸손과 깨어 있음'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권고가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 선포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1베드 5,5-7)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ㄱ)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의 옷을 입읍시다!'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 아버지께 내맡깁시다!' '늘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악마(악령)와 싸워 이겨냅시다!'
'교만'은 '모든 덕의 적'이며, '겸손'은 '모든 덕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복음'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nMHi_xdoU0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복음을 위해
내딛는 우리의
한 걸음이 바로
믿음이며
복음입니다.
헤매이는
우리를
예수님께로
바르게
안내하는 것이
기쁨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복음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짧고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복음으로
살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실천하는
기쁨이며
실천함으로써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의
환희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복음사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복음입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한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들여다보는
기쁨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복음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거짓을 무너뜨리듯
보편을 지향하며
복음을 실천합니다.
한 번도
복음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자신이
복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실천하며
복음이 되는
복음의 여정을
오늘도 우리는
걸어갑니다.
생활이
복음이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