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작가의 작품, 연어담장 벽화. 강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삶을 그렸다간밤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았던 날. 소록소록 이야기가 흐르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강화 원도심을 걸으며 강화읍에 관한 역사와 이야기를 알 수 있는 도보 코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1~2022 한국관광 100선’에 꼽혔다. 1970년대 초까지 방직산업으로 활황을 이루었던 마을의 모습과 3ㆍ1운동 당시 치열했던 싸움의 흔적 등을 찾을 수 있다. 거리│2.6km 소요시간│약 2시간 코스│심도직물터→용흥궁→대한성공회 강화성당→강화 3ㆍ1독립만세 기념비→700년 은행나무→이화견직 담장길→조양방직→강화중앙교회→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소창체험관
코스│심도직물터→용흥궁→대한성공회 강화성당→강화 3ㆍ1독립만세 기념비→700년 은행나무→이화견직 담장길→조양방직→강화중앙교회→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소창체험관
폐가로 전락한 방직공장이 카페 겸 미술관으로 변신한 조양방직 ●섬이 고파서 가는 겨울이 아쉽더라니. 간밤에 펄펄 눈이 내린 모양이다. 커피를 내리며 창문 밖에 지붕을 쳐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빨간 지붕 위엔 소복이 눈이 쌓였는데 몸은 바닥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란. 겨우내 웅크렸던 몸이 좀처럼 좀이 쑤신 것이다. 섬이 고팠던 핑계를 대자면 그렇게나 단순했다. 어디론가 떠나고는 싶은데 그리 멀지는 않았으면 했고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동떨어진 곳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도 앱을 켜고 서울에서 가까운 섬을 더듬다가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강화도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 대략 차로 1시간 반이면 가 볼 만도 한데. 섬 안에서 활보할 수 있는 뚜벅이의 반경은 그리 넓지 않을 걸 알지만, 운이 좋다면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눈밭을 밟아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밑창이 말랑한 운동화를 신었다.
심도직물터. 심도직물의 굴뚝 일부와 당시 쓰이던 직조기가 남아 있다 ●이야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 늘 그렇듯 초행길은 설레고도 막막하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 일단 가장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면 분명 곧 배가 고플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강화도에 가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젓국갈비 한 상을 거하게 먹을 요량이었다. 그러고 나선? 섬 전체에 흩뿌려진 명소(라고 뜨는 곳들)를 차례로 훑으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재다 결국 ‘강화도 뚜벅이’, ‘강화도 당일치기’ 등의 직관적인 검색어를 입력하고야 해답처럼 떠오른 코스를 하나 발견했다. 이른바 ‘강화스토리워크’. 강화읍 원도심에는 친절하게도 뚜벅이를 위한 도보 코스가 존재했다.
강화문학관 앞 벽화 아침부터 문을 연 식당을 찾았다. 갓 지은 돌솥밥에 한소끔 푸욱 끓여 낸 젓국갈비로 따끈하게 위를 채웠다. 이제 칼로리를 서서히 비워 낼 차례. 코스의 시작점인 ‘심도직물터’로 발길을 돌렸다. 강화의 화려했던 왕년, 그 중심에는 직물이 있었다. 한때 강화는 ‘직물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직물 산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1910년대 직기가 개량되며 직물 대량 생산의 형태를 갖춘 강화읍에는 심도직물, 이화직물, 평화직물, 조양방직 등 국내 최고의 직물 공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은 60개의 크고 작은 직물 공장들이 성업을 이루며 강화 경제에는 활기가 돌았다. 짱짱했던 강화의 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든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 현대식 합성 섬유 생산 시스템을 갖춘 대구로 직물의 메카가 옮겨 가면서부터다. 현재는 강화 소창(소위 ‘거즈’라고 불리는 면직물) 공장 10여 곳만이 가내 수공업 형태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기엔 아직은 두 볼이 얼얼했지만. 옮겨 가는 걸음마다 달라지는 배경에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1970년대에 머물렀던 시점은 어느새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치열한 3ㆍ1운동의 현장으로, 또다시 저 멀리 고려시대까지 넘나들곤 했다. 그 모든 걸 덤덤하게 지켜봐 왔다는 듯 700살이 넘은 은행나무는 마을 한 쪽에 여전히 정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젠 빈 굴뚝만이 말해 주는 과거가 있는가 하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한 방직공장은 레트로의 바람을 타고 힙하게 되살아났다. 시간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고서 찬찬히 걸었다. 호호 내뿜는 입김마저 아무래도 산뜻했던 날. 아무도 가지 않은 새하얀 눈 위를 밟을 때마다 뽀드득, 이야깃거리가 새어 나왔다. ●Story Walk Ganghwa 뚜벅이의 슬기로운 강화 여행법
서두르지 않고 산책하듯 거닐 것. 그리고 귀를 기울여 볼 것. 강화에 얽힌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마을 곳곳에서 샘솟는다.
한국 직물산업의 꽃 ①심도직물터 한국 직물산업의 성지로 통했던 강화읍에서도 특히나 심도직물은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했다. 1947년 설립된 이후로 1970년대 종사했던 종업원이 1,200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대구의 현대식 섬유산업의 발달과 중국산 면직물 수입 등으로 위기를 맞은 심도직물은 2005년 문을 닫았고, 지금은 용흥궁 공원 내에 공장 굴뚝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굴뚝 옆에는 ‘남경직물’에서 실제로 쓰였던 직조기가 전시되어 있다. 주소: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 공원 내
©강화군 왕의 흔적을 따라서 ②용흥궁 조선의 25대 왕 철종(1849~1863년)이 왕이 되기 전까지 거처했던 곳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철종 4년(1853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궁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랑채를 갖춘 용흥궁의 구조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궁 안에는 철종이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는 비석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199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됐다. 주소: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 공원 내
한국과 서양의 조화 ③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겉모습만 보면 절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성당이다. 1896년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강화성당이 세워졌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가 성당을 지을 당시는 우리나라에 막 서양식 건축기법이 도입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외형은 한국식 불교 사찰의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이 가미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주소: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치열했던 역사의 한 조각 ④강화 3ㆍ1독립만세 기념비 용흥궁 공원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 역사의 흔적. 1919년 3월7일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장날을 맞아 일어난 강화 3ㆍ1독립만세운동에는 강화군민과 김포군민 2만4,000여 명이 참여했고, 20명의 주도자가 옥고를 치렀다. 이를 기록하고자 1994년 견자산 기슭에 처음 세워졌던 기념비는 1996년 만세운동의 현장인 웃장터(은혜교회 안)로 옮겼다가 2011년 지금 위치로 옮겨 왔다. 주소: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 공원 내
마을 역사의 산증인 ⑤700년 은행나무 강화산성 북문으로 올라가는 길목, 주변 다른 나무들에 비해 월등하게 큰 나무가 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자.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이 은행나무가 심어진 시기는 무려 1300년경 고려시대라고 전해진다. 1982년 강화군이 ‘보호수’로 지정할 당시 688년 수령이었으니, 지금은 이미 나이가 700살을 넘긴 셈이다. 강화읍에서도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한 은행나무는 마치 지긋한 어르신처럼 온 마을을 품고 있는 듯하다. 주소: 강화읍 북문길49번길 1 부근
직물산업의 아카이브 ⑥이화견직 담장길 19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강화읍의 직물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심도직물, 조양방직, 평화직물과 함께 대표적인 직물공장으로 알려졌던 이화견직의 담장길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스토리보드가 설치돼 있다. 각 스토리보드에는 당시 직물공장의 규모와 모습, 강화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다. 주소: 강화읍 관청길55번길 3 부근
옛 방직공장의 힙한 변신 ⑦조양방직 조양방직은 1933년 강화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방직공장이었다. 강화 직물산업의 하락세와 함께 조양방직 또한 문을 닫게 됐고, 단무지 공장과 젓갈공장이 되었다가 한동안 폐가로 방치됐다. 그리고 2018년. 1년이 넘는 보수기간을 거쳐 거대한 카페 겸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 골동품수집가였던 주인장의 손길 덕에 하나의 박물관을 연상케 할 정도. 뉴트로(Newtro)의 진수다. 주소: 강화읍 향나무길5번길 12 전화: 032 933 2192 영업시간: 월~금요일 11:00~20:00, 토~일요일 11:00~22:00
계몽과 교육의 현장 ⑧강화중앙교회 일제강점기 때 교회의 역할은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강화 3ㆍ1운동을 주도했던 조봉암 선생과 계몽운동의 선구자였던 최상현 합일초등학교 교장 등 독립과 교육에 앞장섰던 이들 모두 강화중앙교회 출신들이었다. 교회 입구 쪽에 있는 기념비는 1907년 강화진위대(근대 지방군대)가 강제 해산되며 일어난 의병들이 일제에 의해 부당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을 기리는 뜻으로 2003년 세워졌다. 주소: 강화읍 청하동길 36
그 시대에 일었던 강한 의지 ⑨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합일초등학교는 1901년 미국인 선교사 조원식과 강화교회의 박능일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후세를 교육하지 않으면 독립도 어렵다’는 일념으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계몽과 독립을 이루려 했던 의지가 담겼던 것. 초등학교 담장에 설치된 스토리보드에는 그 시대 강화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주소: 강화읍 합일길 3
직물을 직접 체험하는 곳 ⑩소창체험관 구(舊) 평화직물 건물을 강화군이 매입, 현재는 소창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소창은 강화에서 국내 최고 수준으로 생산됐던, 흔히 말하는 거즈(gauze)를 말한다. 체험관에서는 직물공장의 옛 전경, 소창 공정 순서와 제조에 쓰이던 기구 등을 볼 수 있으며 소창 손수건 스탬프 체험 등 프로그램 참여도 가능하다. 주소: 강화읍 남문안길20번길 8 운영시간: 화~일요일 10:00~18:00, 월요일 휴관(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운영 잠정 중단) 전화: 032 934 2500
▶FOOD 삼삼하게 당기는 맛, 젓국갈비 강화의 대표 토속 음식인 젓국갈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고종이 몽골의 위세에 몰려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강화 특산물을 이용해 만들어 진상했던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젓국갈비는 돼지갈비로 우려낸 탕에 강화 특산물인 새우젓으로 간을 맞춰 끓여 낸 음식이다. 맑고 삼삼한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간간하게 입맛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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