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종(980~1009. 재위 997~1009)은 제5대 경종과 제3비 헌애왕후 소생이었다. 경종이 승하할 때는
유일한 아들인 그가 만 한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성종에게 선위했었다. 성종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경종의 아들 송(誦)을 궁중에서 기르며 개령군에 봉했었다. 성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송(誦)을 불러
선위했는데, 여기에는 성종에게 아들이 없었던 점도 작용했다.
목종은 18세의 장성한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이 강한 모후 헌애태후가 대신 왕권을
휘둘렀다. 헌애태후는 귀양살이 중인 옛 정부 김치양을 사면한 뒤 궁으로 불러들여 노골적으로 치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는 대소신료들에게 자신을 천추태후라고 부르도록 명하여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
기 때문에 왕도 신하들도 감히 직언조차 할 수 없었다. 김치양은 경종이 보위에 오르기 전 훗날 제3비
가 되는 경종의 부인과 사통하다가 성종에 의해 귀양에 처해졌었다. 헌애태후는 김치양을 우복야 겸
삼사사에 제수하여 함께 권력을 주물렀다. 권력에서 소외된 목종은 남색을 즐기며 미풍양속을 개판
으로 흐려놓았다.

김치양은 차츰 천추태후를 밀어내고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김치양이 백관의 임면권을 장악하자
한자리 사려는 지방 호족들이 바리바리 뇌물을 싸 들고 김치양의 문전에 장사진을 쳤다. 그는 3백 칸
이 넘는 대저택과 뇌물창고를 짓고 거대한 연못을 만들어 뱃놀이를 즐겼으며, 연못의 인공섬에 조성
해놓은 호화로운 정자에서는 밤마다 주지육림을 질펀하게 펼쳤다. 김치양은 그예 보위를 찬탈하기
위해 송도 인근 절마다 사병을 기르며 때를 기다렸다.
자포자기한 채 남색을 즐기던 목종은 김치양을 쳐내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보지만 그때마다
모후인 천추태후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에 목종은 남색인 유행간에게 합문사인이라는 벼슬을 내려
자신을 돕도록 했다. 유행간은 왕의 신임만 믿고 저보다 벼슬이 높은 중신들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
다. 유행간의 주변에는 정보를 제공하는 벼슬아치 아첨배들까지 들끓었다. 유행간은 발해 출신인 유
충정을 목종의 새 남색으로 바쳐 한층 깊은 환심을 샀다. 조정은 김치양과 유행간‧유충정의 대립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목종 7년(1004),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아들을 낳았다. 김치양은 즉각 아들을 보위에 올리기 위한 공
작에 들어갔다. 이때 태조의 혈통은 태조의 아들인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뿐이었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가 지냈는데, 이때 왕욱과 배가 맞아 불륜
의 씨앗인 대량원군을 출산했던 것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서는 무슨 수를 쓰든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대량원군을 양주에 있는 한 절간에 유폐시켜
놓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참에 목종이 와병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더욱 초조해져 정치는 뒷전인 채 대량원군 살해에 몰
입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조정은 목종의 남색인 유행간‧유충간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목종은
대량원군에게 선위하기 위해 그를 부르려 했지만, 권력을 빼앗길까 질투가 난 유행간‧유충간이 극력
반대하여 그마저 성사되지 않았다. 개경 백성들은 연일 ‘이게 나라냐!’ 하며 손에손에 촛불을 들고 거
리로 나와 무능한 중신들에게 욕을 퍼부어댔지만, 중신들이 마카 다 김기춘‧우병우 같은 간신배들뿐
이라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종은 은밀하게 충신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들여 조언을 들은 뒤, 그들
의 조언에 따라 김치양의 수하인 전중감 이주정을 서북면 순검부사에 제수하여 내보내고 서경 도순
검사 강조에게 개경으로 오라는 명을 내렸다.
강조는 개경으로 오는 도중 ‘왕이 이미 죽었으니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는 아버지의
서신을 받았다. 강조는 서경으로 돌아가 군사 5천을 이끌고 다시 출발했는데, 황해도 평주에 도착해
서야 목종이 상굿도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이 살아있는데도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는 것은 명
백한 역모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강조는 있으나마나 한 왕을 폐위하기로 결심하고 비장을 시켜
‘폐하께서 잠시만 귀법사로 피신해 계시면 김치양 일당을 제거한 뒤 다시 모셔오겠나이다’ 하는 내용
의 밀서를 보냈다. 강조의 군사들이 입궐할 때까지 미적거리고 있던 목종은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
귀법사 대신 가까운 법왕사로 피신했다.

목종 12년(1009) 2월, 궁궐을 점령한 강조는 지 맘대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옹립했으니, 그
가 제8대 현종이다. 이어 김치양 일당과 목종의 남색인 유행간‧유충정을 살해하고 천추태후의 잔당 3
0여명을 귀양 보냈다. 강조는 자객을 보내 목종마저 시해했다. 목종의 나이 29세, 재위 11년 4개월 만
이었다. 역사는 이 일련의 사건을 ‘강조의 난’이라고 한다. ‘강조의 난’은 거란에게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유발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남색을 좋아한 목종은 한 명의 왕비만 두었는데, 단 한 번도 별을
보지 못한 왕비는 당연히 소생이 없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왕조시대의 성희롱 역시도 빈번히 그리고 끊임없이 있었던 사기를 접할때 마다 "미투 열풍" 처럼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지 못한것은 역시 권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근간 일본 차관이 상습적 성희롱이 들통나 사표를 낸 후의 정부 부총리의 반응은 성희롱 죄 라는 죄는 없다고 언급하여 사뭇 우리와는 다른 관념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문제로 일삼아 교훈적인 사례로 도덕적 질서가 제자리 하리라는 기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