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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보첼리 Andrea Bocelli
1958년 9월 22일 ,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 출생
이탈리아의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 ...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으며 , 1994년 산레모 음악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하였다 .
1994년 산레모 가요제의 신인상을 받은 이래 , 보첼리는 팝과 클래식 ,
8개의 오페라 음악을 포함한 13개의 솔로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여 세계적으로 7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팔았다 .
1998년 잡지 《피플》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50명〉중의 하나로 꼽혔다 .
셀린 디옹과 듀엣으로 부른 The Prayer 는 영화 《캐멀럿의 탐구 대상》의 주제가로 골든 글로브 상의
최고 새가수 상을 수상하였고 , 아카데미상에서도 같은 부분의 후보에 올랐다 .
클래식 앨범 《Sacred Arias》는 미국 클래식 앨범 차트의 톱3에 들어오면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 .
세계적으로 5백만 장이나 팔리면서 , 그 앨범은 솔로 가수에 의한 최대 판매 앨범이 되었다 .
또한 ... 전 세계에서 2천만 장 이하로 팔린 1997년 팝 앨범 《Romanza》는 이탈리아 가수에 의한
최대 판매 앨범이 되었으며 ... 캐나다 ,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최대 판매 앨범으로 알려졌다 .
앨범의 첫 싱글 Time to Say Goodbye 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차트 1위를 차지하여 ,
이탈리아 국내에서 3백만 장 , 세계적으로 12백만 장이나 팔리면서 판매 기록을 깼다 .
“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둠을 볼 수 없습니다 .
역시 귀 먹은 사람들은 소리와 대립되는 침묵을 모릅니다 . ”
1958년 9월 22일 토스카나 주(州)의 피사 근교의 라자티코 (Laiatico) 에서 태어났다 .
안드레아 보첼리는 토스카나 주 피사 근교의 라자티코에서 아버지 알레산드로 보첼리(2000년 사망)와
어머니 에디 보첼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 Alexandro Bocelli 는 ‘Chianti Bocelli’ 라고 불리우는 와인(Wine)을 제조하고 있다 .
그의 가족은 농장집에서 살면서 농기구를 팔고 포도주를 만드는 기업을 유지해왔다 .
소년으로서 ,
보첼리는 음악의 위대한 열중을 보였다 .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편안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음악 뿐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세 때에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 후에 플루트 , 색소폰 , 트럼펫 , 기타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
14세 때에 비아레지오(Viareggio)에서 열린 경연 대회에서 O sole mio 를 불러 우승하였다 .
이탈리아 테너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는 빛을 보지 못한다 .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가 있었고 , 12살 때 축구경기 중
불의의 사고로 완전히 시력을 빼앗겨버렸다 .
앞을 못보는 장애는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가로막지 못하였고 ,
다른 활동들을 가로막는 장벽을 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
그는 선천적인 녹내장을 앓았으며 , 12세 무렵에 축구 시합을 하던 도중 ...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시력을 완번히 잃고 만다 .
하지만 난 몸을 숙여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 그리고 이제 끝없는 인내로 그것들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 그 조각들에게 그 옛날의 찬란한 빛을 돌려줄 것이다 .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 나는 법을 배워 서서히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누가 알겠는가 ? 현실의 장벽을 넘어 저 높은 곳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 - 안드레아 보첼리의 일기 중에서 ... |
놀랍게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
그는 평범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 피사 대학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하였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 피사 법률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법정 선임 변호사로 일하기까지 했다 .
몇 해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내 그만뒀다 .
젊은 날의 부모님 (아버지 알렉산드로 보첼리 & 어머니 에디 보첼리)
아버지 알레산드로 보첼리는 2000년 세상을 떠난다 .
그가 음악적인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 그의 부모들은 그가 6살 때 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
후에는 플롯과 섹소폰을 배우게 되었다 .
그는 Pisa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 음악을 하기 전에는 1년여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음악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돈을 벌기 위하여 , 피아노 바에서 상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
법과 대학원을 마치고 , 법정 변호사로 1년간 일하면서 지냈다 .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점자 악보를 더듬거리며 음표를 익혔고 성대에 무리가 갈 정도로
노래를 불러 ‘천상의 목소리’ 라는 극찬을 얻게 됐다 .
인간 승리의 상징으로 불리우며 세계인으로 부터 사랑받는 테너가수 이다 .
1992년에 Zucchero Fornaciari 는
그가 발라드에서 오페라의 아리아까지 모든 형식의 음악을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 그를 정식으로 발탁했다 .
그가 프랭코 코렐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으면서 음악인의 길에
접어든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
1992년 12세 연하의 전처 엔리카 첸자티와 첫 결혼 후 아들 둘을 두었으나 2002년 이혼했고 ,
이후 2014년 25세 연하의 전 매니저였던 베로니카 베르티와 재혼해 딸 비르지니아 보첼리를 두었다 .
전처는 이혼 후에도 보첼리와 같은 동네의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자식들은 양쪽 부모를
모두 방문하며 자랐다고 한다 .
전처와 현처 사이의 관계도 친밀하게 교류하는 관계라고 한다 .
전처에게서 낳은 97년생 둘째 아들 ‘마테오 보첼리’ 가 굉장한 미남에 노래 실력도 좋은데 ,
2018년 새 앨범을 발매하며 이 아들과 함께 듀엣곡을 발표했다 .
이 곡이 실린 si 앨범은 안드레아 보첼리가 생애 첫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해 더욱 의미가 깊다 .
2018년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앨범이 외국어 앨범으로는 2006년 이후 12년만에
빌보드 1위를 한데 이어 같은해 두 번째로 안드레아 보첼리가 외국어 앨범으로 1위를 차지했다 .
이 앨범에는 두아 리파 , 에드 시런도 피처링으로 참여해 이탈리아 어로 불렀다 .
1992년 이탈리아의 락 가수 ‘주케로(Zucchero)’ 가 《Miserere》앨범을 발표하여
동명의 곡을 위한 시청용 테이프를 만드는 데 테너 가수들을 선택할 무렵에
‘루치아노 파바로티’ 에게 보냈다 .
보첼리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 , 파바로티는 자기 대신에 보첼리를 기용하라고 하였다 .
그 시청용 테이프는 보첼리를 발견한 카테리나 카셀리(Caterina Caselli)로부터 왔다 .
카셀리는 보첼리의 현재 감독 , 제작자이다 .
추케로는 결국 그 곡을 녹음하는 데 , 파바로티를 설득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히트곡이 되었다 .
1993년 추케로의 유럽 공연에서 그와 듀엣으로 부르는 데 동반한 보첼리가 푸치니의
Turandot 에 나온 Nessun Dorma를 솔로로 불렸다 .
보첼리는 밀라노(Milano)에서 슈거 뮤직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다 .
12월에는 산레모 이탈리아 가요제에 들어가 Miserere 를 상연하였고 ,
28일에는 레지오 에밀리아의 로몰로 발리 극장에서 열린 클래식 콘서트에 데뷔하였다 .
1994년 2월 산레모 가요제의 경연대회에 들어가 Il mare calmo della sera 를 불러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
동명의 그의 데뷔 앨범은 발표되자 마자 , 이탈리아 톱10을 차지하였다 .
5월에는 이탈리아의 팝 가수 제라르디나 트로바토(Gerardina Trovato)와 함께 순회 공연을 가졌고 ,
9월에는 모데나에서 열린 파바로티의 자선 공연에 나가
루제로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의 Mattinata ,
마우리치오 모란테 (Maurizio Morante) 의 Notte e Picatore 를 파바로티와 듀엣으로 불렀다 .
또한 피사에서 열린 베르디의 Macbeth 에서 맥더프 역으로 오페라 데뷔를 하였다 .
보첼리는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알려져 왔으나 , 톨스토이의 작품들에 깊이 잠긴 결과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
1993년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들고(Nessun Dorma)’ 를 부르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그는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을 계기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 1996년 전 유럽 투어 공연에서 전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
“ 시력(視力)을 잃었을때 ...
두려움과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데 필요한 시간은 꼭 한 시간 뿐이었습니다 .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했어요 . ”
- 이탈리아의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인터뷰 중에서 -
“ 사람들이 이점(利點)을 너무 감상적으로 느끼는 걸 원치 않는다 .
그건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다 .
난 그 사고가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
세계 최고의 테너가수 그리고 Cross - over Singer 안드레아 보첼리 ...
그의 웅장한 스케일과 감정을 강하게 토해내는 그의 격정적인 비장미가 돋보인다 .
그러나 평생을 사무실에서 보내기에는 그의 심장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의 물결이 너무 거셌다 .
보첼리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이탈리아의 유명한 테너 프랭크 코넬리를 찾아
그에게서 사사를 받게 된다 .
레슨비 마련을 위해 일하던 피아노 바에서 그는 한 평생 잊을 수 없는
두가지 중요한 인연을 맺었다 .
하나는 첫번째 아내 ‘엔리카’ 였다 .
또 Miserere 를 함께 부를 수 있는 테너를 찾던
이탈리아 출신의 락 스타 주케로(Zucchero)를 만난 것도 그 ‘피아노 바’ 였다 .
주케로와의 만남은 보첼리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 한다 .
1993년 ‘주케로’ 의 생일 파티에서 Miserere 와 Nessun dorma 를 부른
보첼리의 목소리에 반한 슈거 레코드사의 카테리나 카셀리 사장이 그와 음반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
1994년에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산레모 음악 가요제〉 에서
Il Mare Calmo Della Sera 을 부르며 최고 인기와 최고 점수로 우승했다 .
이후 모데나에 살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만났고 그해 〈파바로티와 그의 친구들〉 이라는
자선 콘서트에 출연하여 유럽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
안드레아 보첼리는 클래식과 팝의 경계를 허물며 팝페라를 개척한 인물로 꼽히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통산 6천 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 세계 각종 음악 차트를 휩쓸었다 .
새러 브라이트만과의 듀엣 ‘Time to Say Goodbye’ 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셀린 디온과 듀엣으로 부른
‘The Prayer’ 가 애니매이션 ‘매직 소드 (The Quest for Camelot)’ 에 삽입되어
골든 글로브 최고 주제가 상(Best Song)을 수상함과 동시에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됐다.
또 그래미 어워드 역사상 클래식 아티스트로 최초로 ‘베스트 뉴 아티스트’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그의 ‘Sacred Arias’ 는 클래식 솔리스트로서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
2000년 ,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와 함께 첫 내한공연을 가졌으며 ,
2003년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
안드레아 보첼리는 클래식은 물론 팝 세계에서도 단연 최고의 스타의 위치를 누리고 있어서
과거 사라 브라이트만이 이룩하였던 경이로운 성공을 거둔 또 한 사람의 크로스 오버 싱어로
평가되고 있다 .
두 눈이 안보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며 부르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열정이 담긴 목소리와 천상(天上)의 목소리는 깊은 감동을 넘어 숙연한 마음까지도
들게 한다 .
1998년 잡지 《피플》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50명 중의 하나로 꼽혔다 .
토스카나에는 그의 집안 대대로 경영하는 와인 농장도 있다 . 1년에 2만병을 생산하고 12종류의 와인을 생산하며 ... 미국 · 러시아 · 네덜란드 등에 ‘보첼리’ 라는 상품명으로 수출하고 있다 . 형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실질적인 경영을 맡고 있는 , 2살 작은 친동생 알베르토 보첼리는 “ 형님이 가수로 유명해진 후 , 매상이 2 ~ 3배는 올랐다 ” 고 하며 형님 안드레아 보첼리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나타냈다 . The Italian tenor Andrea Bocelli , his wife Enrica Cenzatti and their son Amos 10년간 함께 했던 엔리카 센자티 (Enrica Cenzatti)와 1992년 결혼 후 ... 두 아들 ‘아모스’ 와 ‘마테오’ 를 낳는다 . 하지만 2002년에 별거를 시작했고 , 안드레아 보첼리는 현재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동거하게 된다 . 그 후 ... 이혼에 합의하고 이혼한다 . 2008년 아시아 순회 공연 중에 일본 도쿄에서 ... 「베로니카 베르티」 와 함께 ... 1992년 12세 연하의 전처 엔리카 첸자티와 첫 결혼 후 아들 2명(아모스 , 마테오)을 두었으나 2002년 이혼했고 ... 그 이후 2014년 25세 연하의 전 매니저였던 베로니카 베르티와 재혼해 딸 비르지니아 보첼리를 두었다 . 전처는 이혼 후에도 보첼리와 같은 동네의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자식들은 양쪽 부모를 모두 방문하며 자랐다고 한다 . 전처와 현처 사이의 관계도 친밀하게 교류하는 관계라고 한다 . Partner , Friend , Lover Veronica is my companion, my best friend, my lover, my partner in joy and pain ; she is my go - to person , and she brings peace and unity into our family . She is also my manager ... I can say that I was lucky enough to be able to share not only my private life , but also my professional life with the woman I love . 아내 베로니카와 함께 ... 장남 Amos Martellacci Boccelli 차남 Matteo Boccelli 전처 엔리카 첸자티에게서 낳은 9197년생 둘째 아들 마테오 보첼리가 굉장한 미남에 노래 실력도 좋은데 , 2018년 새 앨범을 발매하며 이 아들과 함께 듀엣곡 Fall On Me 을 발표했다 . 이 곡이 실린 Si 앨범은 안드레아 보첼리가 생애 첫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해 더욱 의미가 깊다 . 2018년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앨범이 외국어 앨범으로는 2006년 이후 12년만에 빌보드 1위를 같은 해 두 번째로 안드레아 보첼리가 외국어 앨범으로 1위를 차지했다 . 이 앨범에는 두아 리파 , 에드 시런도 피처링으로 참여해 이탈리아 어로 불렀다 . 딸 Virginia Boccelli |
2020년 4월 12일(현지 시간) 밀라노 대성당에서 ‘희망을 위한 음악 (Music for Hope)’ 을
주제로 콘서트를 열었다 .
MBC 뉴스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 - 19 사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계획했다 .
201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 세계 음악 최고 클래식 가수 상 , 피사노 독상
본인과 가족 역시 2021년 3월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극복하였다 .
관객 없이 오르간 반주자를 제외하면 혼자서 공연을 했으며 , 보첼리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 됐다 .
녹화 영상 7월에 이탈리아 코로나 봉쇄령에 대해 비판하였다 .
2021년 유로 2020 개막전에 오래만에 등장하여 Nessun dorma 를 열창했다 .
안드레아 보첼리가 현재 가족들과 거주하고 있는 자택(者宅)은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Toscana) 지역의 루카(Lucca)에 있는 포르테 데이 마르미(Forte Dei Marmi) 라는
작은 해안가 마을 안에 위치해 있다 .
피사(Pisa)에서 약 38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 곳은 ‘마블의 요새’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작은 마을로 중심부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보도 블록을 ‘대리석’ 으로 깔려 있는
값비싼 대저택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Sogno
1999년 1월 1일 발매
Va ti aspetterò
Il fiore nel giardino segna il tempo
가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정원의 꽃은 시간을 표시합니다 .
Qui disegnerò
Il giorno poi
Del tuo ritorno
당신이 돌아온 다음 날에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
Sei così sicura del mio amore da portarlo via con te
Chiuso nelle mani che ti porti al viso ripensando ancora a me
당신은 내 사랑을 너무 확신해서 당신과 함께 가져갑니다 .
내 얼굴을 다시 생각해 볼 때 내 손을 꼭 잡고 있어요 .
E se ti servirà
Lo mostri al mondo che
Non sa che vita c’è
Nel cuore che distratto sembra assente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세요 .
그는 정신이 나간 듯한 가슴속에 어떤 삶이 있는지 몰라요 .
Non sa che vita c’è
In quello che soltanto il cuore sente
그는 마음만이 느끼는 것에 어떤 삶이 있는지 모르고 있네요 .
Non sa
그는 모릅니다 .
Qui ti aspetterò
E reberò
I baci al tempo
여기서 기다릴게요 .
그리고 나는 칭찬할 거에요 .
시간에 맞춰 입맞춤을 하세요 .
Tempo che non basta cancellare coi ricordi il desiderio che
Resta chiuso nelle mani che ti porti al viso ripensando a me
그 욕망을 기억으로 지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
당신은 내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손에 갇혀 있어요 .
E ti accompagnerà
Passando le città
그리고 그는 도시를 지나면 당신과 동행할 거에요 .
Da me
Da me che sono ancora qui
E sogno cose che non so di te
나는 아직도 여기 있어요 .
그리고 나는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들을 꿈꾼답니다 .
Dove sarà
Che strada farà
그가 어디에 있을까요 ?
어떻게 될까요 ?
Il tuo ritorno
Sogno
Qui ti aspetterò
당신이 돌아오는 꿈.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
E ruberò
I baci al tempo
그리고 시간에 맞춰 입맞춤을 훔칠 거에요 .
Sogno
Un rumore il vento che mi sveglia
E sei già qua
나는 나를 깨우는 바람을 꿈꾸어요 .
그리고 당신은 이미 이곳에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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