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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유 게 시 판 ┃ 스크랩 *가장 행복하게 하는길
태일(太一) 추천 0 조회 58 13.11.30 12: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장 행복하게 하는길,참선수행 


이 불교가 불교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소린데요, 
사실은 간단치는 않습니다. 
모두들 어렵다고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한몫에 다 알기는 어렵지만 조금 조금씩 이해하면서 
그것을 생활에 적용을 해 나가다 보면 
뭔가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많은 도움은 못 드리더라도 불교에 대한 이해, 
저는 그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정견을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자고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대로 열심히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를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 얘기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를 우리가 얘기를 한다면 
이것은 선적으로 표현을 한다면 사슴을 놓고 말이라고, 
제 입장에서 보면 거짓말하는 꼴이 됩니다.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사슴을 놓고 말이라고 거짓말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또 우리가 고귀한 신분인데 하천한 신분으로 
전락하려고 노력하는 것 밖에 안 된다고 표현을 합니다. 
왜 이렇게 표현을 하는가 하면 그 자리는 본래 완성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그 자리는 말로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거짓말이고 중생이라고 해도 거짓말이고 
번뇌라 해도 거짓말이고 지혜라 해도 거짓말이고 
구속되어 있다고 해도 해탈돼 있다 해도 거짓말입니다. 

왜 제가 서두에 이런 말을 드리는가 하면 
이런 말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으키고 있는 생각을 
멈추게 해야만 불교를 바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흔히 우리는 마음을 비운다고 그럽니다. 
그런 마음에서 제 얘기를 들으시면 제가 별 실력은 없지만 
듣는 효과가 배나 상승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서두에 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설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하면 거짓말하러 이 자리에 올라와 잇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거짓말을 통해서 우리 존재원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제 지금부터 거짓말에 조금 더 부연을 드린다면,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인가, 
그러면 불교는 우리 생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인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분은 어떤 사람인가? 
깨달은 분하고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있기에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배우려 하고 생활하려고 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인가? 
깨달은 분의 가르침은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여러분들도 굉장히 궁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부분은 우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그런데 실제는 차이가 없습니다. 꼭 같습니다. 
꼭 같지만 우리는 그 효능을 제대로 발휘를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를 이해하면 부처님 가르침이 뭐다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부터 얘기를 한다면, 우리가 나를 쳐다보고 밖의 세상을 한번 쳐다보는데 
나를 쳐다보는 것은 인생관이고 바깥을 쳐다보는 것은 세계관이라고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를 쳐다보고 세상을 쳐다보는 그 시각이 부처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부처님은 당신 스스로 쳐다보는 것 하고 이 바깥세상을 쳐다보는 것하고, 
내가 내 자신을 쳐다보는 것과 바깥을 쳐다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잠깐 설명해 드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형상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수 천 명이 모여 있습니다만 전부다 우리는 현상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어떤 물건 어떤 것도 좋습니다. 
그 형상만 쳐다보고 그 형상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한 거다, 열등한 거다 
이것은 귀한 거다 천한 것이다 이렇게 현상만 쳐다보고 계속 분별을 합니다. 

심지어 암연 같은 데서는 그 형상만 쳐다보는 사람을 부처님은 장님에다 비유를 합니다. 
부처님은 장님이 아니고 눈뜬 사람입니다. 
이 장님이 길을 걸을 때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상처를 입은 단계에서 그 상처가 곪아 터지고 
우리는 몹시 고통을 느끼면서 그렇게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만 장님이냐 하면 코, 입도 장님하고 같아서져서 
모든 것을 취사선택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길을 걸어간다 말입니다. 
이 길이 인생의 길이죠. 

그래서 끝없이 귀, 눈, 입이 나를 학대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만 학대하면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한다 말입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드니까 아까 강주 스님이 스님 법문할 때 마다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하는데,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를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그러면서 자기도 학대하고 주변도 괴롭힙니다. 
제가 좀 심하게 말씀을 드린 겁니까? 절대 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비교하고,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계속 주변 사람을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또 우리 가정만 해도 한국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듯이 
이혼율이 세계에서 두 번째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학대하고 남을 학대하고 끝없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하고 중생하고 다른 얘기입니다. 

제가 좀 심하게 비교해서 얘기 드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난번 조계사에서 신도 교양과정을 마치고 신도님들이 몇 분 토굴에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어떤 젊은 보살이 가슴을 치더군요. 
스님 말씀 듣고 나니 너무 억울하다는 거예요. 
자신은 자신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줄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 같은 경우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봐라.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밖에서 동기유발을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면 
절대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내가 화내는 것은 결국 내 몫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자기가 화를 안내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인데,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내면 그것은 내 몫이잖아요. 
그래서 남이 나를 화나게 하는 그 허물을 보지 말고 
자기가 화를 내는 자기 허물을 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하고 다른 면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부처님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제가 비교를 해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형상만 본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고 우열을 따지고 귀천을 따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형상만 보는 게 아니고 그거에 한 가지 더 보는 겁니다. 
그게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한 가지 더 보는 것이 무엇이냐? 

방금 반야심경 염불을 잘 하시데요. 
거기에 오온이 개공이라고 그랬죠? 
오온은 색, 색은 즉 이 세상에 형상 지어진 것은 모두 색이라 합니다. 
이 몸뚱이도 형상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색입니다.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와 정신은 반야심경에서 개공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형상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형상도 보지만 형상 말고 공을 하나 더 보시는 거예요. 
이점이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공을 보게 되면 아까 말씀드렸던 눈 먼 장님이 길을 가다가 상처가 나서 
고름이 터지고 고통을 받는다 했는데, 
눈을 떠버리니까 부딪칠 일도, 넘어질 일도 없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별로 어려운 일 아니시죠. 
그러면 공만 우리가 이해하면 부처님의 법문과 내가 법문하는 것이 똑같은데 
나는 형상만 보고 부처님은 형상도 보면서 공도 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는 도시니까 시골에 가면 새끼, 가마니, 덕석, 짚신이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물건 보기가 어려운데 그러면 이 네 가지가 형상,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만든 재료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짚이죠. 
그러면 짚의 입장에서 보면 가마니나 새끼나 덕석이나 같아요. 
거기에는 귀천도 없고 우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앞집은 그랜저인데 왜 티코냐 하는 겁니다. 
이 짚신이 반야심경에서 얘기하는 공입니다. 
우리는 남하고 비교하면서 굉장히 마음속에서 스트레스도 받고 고뇌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몸짱, 얼짱 하는데 그게 참 이상한 겁니다. 
우리 존재의 형상을 보면 몸짱, 얼짱 하지 안 해도 날씬해지고요. 

그래서 선종에서는 이것을 비교할 때에 황새와 뱁새에 비교를 합니다. 
긴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다리 짧은 뱁새를 낮게 보고, 
짧은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황새를 낮게 보고 천하게 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끝없는 갈등을 합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입장에서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면서 끝없이 갈등을 합니다.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모든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 대립, 투쟁이 있습니다. 
지구상뿐 아닙니다. 
더 축소해서 보면 국가에서 갈등하고 있는 정치하는 사람, 
기업에서 갈등하고 있는 일들, 가정불화, 내 개인적으로 나와 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존재원리의 짚을 보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중국의 운문스님은 그렇게 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되느냐? 
대중이 대답을 못하니까 물어놓고 당신이 얘기를 했는데 
여러분들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우리는 좋은 일 나쁜 일을 계속 반복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짚 하나, 오온이 개공한 줄 알면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 되고, 
또 우리가 하는 일마다 다 좋은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제가 법문하는 주제가 행복한 삶이라고 했죠. 
바로 이겁니다. 
그러면 간단한 짚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짚은 무엇이겠습니까?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얘기했고요, 
또 그것을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주인공이다, 
본분자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름이지요. 
제가 있는 토굴에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오는데 
제가 얘기를 한 테이프를 듣고 공감이 돼서 찾아오는 분들인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테이프로 목소리 듣고 
굉장히 젊은 줄 알았는데 와보니까 굉장히 노스님이시네요. 

방금 제가 얘기한 주인공이다, 불성이다, 본분자리, 
이 이름만 듣고 추측하는 것은 본 것이 아닙니다. 
테이프를 듣고 젊은 스님인 줄 알았는데 
늙은 스님이라고 알듯이 눈으로 직접 봐야 됩니다. 
확실히 봐야 돼. 그래서 간혹 이름만 듣고 
자기는 그것을 알았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는 있는데 
이름만 듣고 아는 것은 바로 안 것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 해인사에 가면은 팔만 대장경이 있고 
불교는 굉장히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 스님 말씀이 
방대해서 다 볼 수가 없고 스님들한테 이런 저런 
얘기 들으면서 혼란이 오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요. 
이름은 다양하게 있고 설명은 다양하지만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 짚을 알아야 합니다. 

이해하고 생활하고 체험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수행이고 행복한 삶을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실은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하고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그것을 체험하는 일은 실제로 조금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그것도 우리가 너무 한 번에 또, 
그것을 백 프로 생활에 적응을 시켜서 정말로 행복감이 
마음속에 충만하고 또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어가려고 하니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죠. 
이것도 차근차근 생활에서 하나 둘 부처님 법을 이해하고 적응하면서 수행해 가다보면, 
이것은 제가 자동차에 비교를 하면은 자동차도 처음 출발 할 때는 느리게 가지만 
가다보면 점점 가속이 붙듯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하면 할수록 어려워져 가는데 
불교는 하나하나 공부해가고 생활에 적용해 가다보면 
깊이 가면 갈수록 이것은 쉬워집니다. 
그래서 선종에서 <서장>같은데 보면 

“선 것이 익어가고 익은 것이 설어진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선 것이 익어가는 것은 익어갈수록 점점 힘이 적게 든다는 거예요. 
아까 자동차를 예로 들었듯이 가속도가 더 붙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처음 적응할 때 어렵지 조금만 적응해서 생활화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있는 토굴에 서울에 사는 처사님 2분이 내려오는데 
그분들도 처음 이런 얘기를 드렸더니 

“그러다 보면 공장 문 닫습니다.”,
 
또 한분은 “우리 회사 문을 닫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혀 안 받아들여요. 
그런데 안 받아들이면 안 찾아오면 좋겠는데 계속 찾아와요. 
그렇게 한 4년이 되니까 그런 얘기를 일체 하지 않습니다. 
회사나 가정에서 한 가지 두 가지 시험을 해보니까 
안 할 때보다는 훨씬 좋게 느껴지고 
그렇게 해결해 보니까 해결방법이 나온다는 것을 느끼신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절대 어렵다는 얘기는 안하십니다. 

그래서 너무 수행이나 공부를 높은데다가 두고 하시지 마십시오. 
며칠 전에 해인사에 가서 스님들한테 특강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불교 신도님들이나 스님들이 이해하는 수준과 
이해하는 수준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이 너무 바닥에 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부산은 예외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수행하는 그 공부가 바닥에 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백 프로 한목에 하라고 하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닥이라도 좋습니다. 
1프로, 2프로, 3프로 개인도 높여가고 단체도 높여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몫에 백 프로 다한다고 하면 굉장히 멀고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높여가면 방금 말씀을 드린 것처럼 
가속이 붙고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수행하고 생활에 적용하면 불교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생활화하고 수행을 해가야 되느냐? 
그게 굉장히 중요하죠? 
아까 말씀 드린 데로 우리는 
부처님과 다른 점이 실제로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형상만 보고 있고 
우열을 따지고, 고하를 따지고, 귀천을 따지면서 
끝없이 비교하면서 자기와 남을 괴롭히니 이것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과 같이 오온이 개공한 줄 알고, 
방금 제가 예로 든 바와 같이 나의 짚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하면서 생활에 적용해보고 그 가운데에서 참선을 하시든지 염불을 하시든지 
봉사를 하든 차근차근 생활해 갈 때 불교가 우리 생활에서 
행복을 조금씩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짚이고, 공이라고 했는지 얘기를 해 드려야 
“아 뭔가 잘못됐구나.”하고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왜 공이라 하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렵더라도 얘기를 들으셔야 왜 공이라고 하는지를 알아서 또 그렇게 해야 일상생활을 
공이라고 보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공을 일상생활에서 보라고 하니까 어떤 염려가 일어나느냐 하면, 
그러면 공이면 아무것도 없고 허망하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 살라는 겁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허망하고 공허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오늘 햇빛이 화창합니다. 
구름이 없으니까 햇빛이 난 겁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니까 그것을 귀천으로 보고, 
고하를 따져 비교 하면서 계속 갈등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상만 보고 시비분별 하는 그 마음이 햇빛을 가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형상만 보는 사람은 장님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길을 가면서 부딪치고 상처가 나고 고름이 납니다. 
그런데 공 인줄 알아버리면 햇빛이 납니다. 
햇빛이 나니까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살님들도 많은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진공묘유라고 하잖아요. 
진공은 구름이 걷힌 것이고 묘유는 햇빛이 나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이해심 많고 비교안하고 이런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공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공이 되어야 햇빛을 보게 되요. 
또 지혜가 개발이 되요. 
그것은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그렇게 돼 있다는 거예요. 
본래 모습대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공을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우리가 내가 있다고 착각에 빠져서 비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사실 어렵습니다. 
왜 공이냐. 
우리 내라는 이 존재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든,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연기가 무슨 소리입니까? 
연기는 글자 그대로 인연이 모여가지고 형상이 지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연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쓰지요?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제루를 두고 얘기를 한다면 
천 가지 재료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보제루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천 가지 재료가 들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일로 독립된 물체가 
뚝 떨어져서 본래 만들어져 있다면 연기가 아니죠. 

그런데 여기에 천여가지 재료가 모여서 이 집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재료 가운데 나무도 있고 창문도 있고 못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여러 가지 중에 무엇을 갖고 집이라고 하겠느냐 이거죠. 
모여서 된 것을 우리는 연기라고 합니다. 
여기에 천여가지가 모였는데 그 천여가지의 재료를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집이라고 하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면 이 기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못을 집이라 하겠습니까? 
기왓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모여 있으니까 집이라고 합니다. 
실제 집이라는 말은 사실 실체가 없는 겁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천여가지 재료가 만든 것이지 
집이 저절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세월이 가서 허물어지면 
집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집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집 이야기가 어렵다면요, 
제가 가끔 비유를 드는 손가락을 갖고 얘기 드리겠습니다. 
손가락을 A와 B로 얘기를 한다면, 
손가락 A와 B가 의지를 해서 만든 삼각형을 C라고 합시다. 
이 C는 A와 B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어진다면 C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C는 그냥 이름 뿐 입니다. 
그래서 이 C를 우리는 공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고 무아라고 합니다. 
이 몸뚱이도 60조의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 60조 덩어리가 어느 세포를 갖고 내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신도님들은 이것을 알면 내라는 것이 없고 실체가 없다면 
너무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묻습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는 요소도 있지만 지금도 
여러 신도님들이 듣고 보고 하는 그 존재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태어나는 것도 공이고 성장하는 것도 공이고 병들어 죽는 것도 공입니다. 
그 말이 어렵죠? 이것이 없어져서 공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알면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알면 오늘같이 구름이 걷히면서 
거기에서 비교하면서 귀천과 우열을 따지며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자리가 없어지면서 
밝은 햇빛과 같은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비교안하니까 편안하지요. 
비교안하니까 그것 때문에 속상할 일도 없고 그래서 자유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나의 짚은 뭐냐 이렇게 질문을 드렸는데 
나에 대한 짚을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명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실제 보는 데에는 이 설명이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이해를 먼저하고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보는 공부를 해야 바로 공부를 해 가는 것이지, 
이해도 안하는 입장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잘못하면 
공부의 길이 잘못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데에는 정견을 세워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될 것은, 지금 제가 부족한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 설명을 듣고 수행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금 설명을 드린 그 사실이 우리는 지금 체험을 안했는데 
체험을 하게 되면 본래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본래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같이 사고하고 행위도 하면서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의 길로 가야합니다. 
그런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 무정물 어떤 것도 모든 존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위대한 존재이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다면 정말 억울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보살님들 중에 이런 얘기를 듣고 가슴도 치고 눈물도 흘리는 분도 봤습니다. 
저도 서른 한 두 살 때 봉정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어렴풋이 그런 느낌을 받고 그런 이해를 하면서 
그 때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도하면서 며칠 동안 운 일이 있는데요. 
그런 위대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지만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자신도 학대하고 남도 학대하고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산다는 건 억울한 일입니다. 

남까지 학대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이해만 하게 되면 누구든지 그런 삶을 살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원리는 보편적으로 가능합니다. 
다리가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상관이 없습니다. 
손톱만큼도 누구는 더 갖고 있고 
누구는 부족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마니를 만들 때는 좋은 짚으로 만들고 
짚신 만들 때는 나쁜 짚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만 봐도 우리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가 말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이해를하시고요. 
제가 존재원리와 가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수행을 어떻게 해 가야 되느냐? 
제가 참 마음 아픈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달라이라마 스님과도 2시간 얘기도 해보고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그분들 불교하고 한국불교하고 비교를 해보면 
실정을 그대로 얘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쪽 불교보다는 우리 불교는 한 단계 높이 보고 있습니다. 
그쪽 불교는 수행방편에다가 자기 생활을 갖다 맞춥니다. 
그래서 참 보기는 좋습니다. 
화가 나도 겉으로는 안 난 척 하고요. 
그것도 수행입니다.
여러 가지 수행 방편에 자기 생활을 맞춥니다. 
보기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박제화, 고정화 될 염려가 많습니다. 

부처님 법은 해탈하고 자유자재하고 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목적인데 
구속이 오히려 되어서 다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럴 염려가 있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 선 수행은 어떻습니까? 
생황에다가 선을 스며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생활을 말씀 드린 대로 마음을 비교안하고 편안하게 만들고, 
또 그런 차별하는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선입니다. 
그런 것도 다르고 불교를 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 다릅니다. 

우리는 선이 생활에 스며들어가서 생활을 완성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지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공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말씀드린 것은 금강경에 뗏목과 저 언덕이 나옵니다. 
반야심경에도 저 언덕을 건너라는 말이 나옵니다. 

능엄경에는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진리가 달이고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그 수행방편에다가 생활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손가락에 달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달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불교에서는 아예 달을 얘기해놓고 
생활 속에다가 바로 스며들어가서 달로써 생활하게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다른 나라보다 한 수 위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자부심도 느끼고 한국불교를 만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과 생활이 둘이 아니고 
굉장히 평화롭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공부거든요. 
이쪽 선은 철저히 달 불교입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그런 차이점을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면요, 
틱낫한 스님의 <화>. 
화나는 것을 참아 삭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틱낫한 스님은 화를 삭이는 것을 얘기 했는데 
그 책이 굉장히 많이 팔렸다 그래요.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달 입장에서 말하면 부처님은 화 안냅니다. 

부처님이 외도가 찾아와서 부처님한테 공격하고 욕을 합니다. 
부처님은 꿈쩍도 안 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자신의 화를 못 이겨서 침을 뱉어도 부처님은 꿈적도 안 해요. 
그 사람 상식으로는 같이 화를 내고 대응을 해야 하는데 
부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질려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가자 아난이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참느라 애먹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럽니다. 
“아까는 그 사람을 연민했지만 지금은 너를 연민하노라. 
그 사람은 감정에라도 충실했는데 
너는 감정까지 억제하고 화가 안 나는 척 했으니 
너는 위선자와 같구나. 그래서 연민하노라.” 

부처님은 목석처럼 아무 반응이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상대편이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면 똑같이 갚아주려고 하는데 
부처님은 화를 안내는 대신에 연민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또 연민하라고 하면 상대편을 깔보고 낮추어서 보는데 
부처님은 깔보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 아니라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고 똑같이 생겼을 뿐이다. 

너는 비교해서 나도 학대하고 남도 학대한다. 
나는 원리를 알고 있지만 너는 모르고 화를 내니 
너무나 안타깝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른의 어른 되는 것이 연민이라 합니다. 
똑 같이 어른이면 싸우지만 어른의 어른이 되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7,80살 먹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와 같이 
과수원 옆을 지나가다가 따달라고 조를 때 주인이 없으면 절대 안 따 줍니다. 
그 대신에 그 아이가 자꾸 때를 쓰면 할아버지가 그 아이를 때리겠습니까? 
어쨌든 달래서 설득시켜서 데리고 갈 겁니다. 
부처님이 그런 분이예요. 
세상 사람들이 화를 내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본래 우리가 부처인데 나라는 착각에 빠져서 
화내고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정말 딱하게 여겨서 달래서 데리고 가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런 것을 연민이라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손가락 입장에서 화를 삭이는 것이고 달 입장에서 보면 화를 안내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불교 선종은 달 입장에서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고, 
수행 방법도 그렇고 불교를 보는 관점도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화를 안내는 것이 한국불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오늘 제 얘기를 듣고 
내 존재원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오늘부터는 화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됩니다. 
안내셔야 됩니다.(박수) 

그런데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생활에서 조금만한 것부터 시작을 하자는 겁니다.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소위 
달 불교 한다는 한국불교가 손가락불교를 하는 
다른 나라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달라이라마 스님, 
틱낫한 스님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존경받고 있습니까? 그
런데 한국 스님 가운데 그렇게 세계에서 신뢰받고 존경받는 스님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아까 달 불교 한다는 한국불교의 수행하는 스님과 신도들이 바닥에 와 있다는 겁니다. 
부산불교부터 달라져 봅시다. 
달라지는데 제 얘기가 도움이 된다면 제가 매달이라도 내려오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개인도 그렇고 사부대중이 모인 승단, 
여기의 바닥이라도 좋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일 프로 이 프로 프로테이지를 높여가자. 
저 백 프로를 까맣게 쳐다보지 말고 일 프로 이 프로 올려가다 보면 가속도 붙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힘이 덜 들어요. 
우리도 백 프로 가능합니다. 

오십 프로인들 삼십 프로인들 어떻습니까? 
저는 스스로 백 프로 아니거든요. 
몇 프로냐 물으면 대답은 못하지만 프로 게이지가 조금은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저는 굉장한 행복감도 느끼고 자부심도 느낍니다. 
저도 백 프로 간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프로테이지가 굉장히 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프로테이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굉장히 행복감을 느낍니다. 

짧은 시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충분하게 못했습니다. 
연기를 설명하는 것이 다른 날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실제 불교는 연기라는 말, 중도라는 말, 
공이라는 말이 다 같은 말인데, 그것이 짚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짚은 무엇이냐는 것이죠. 
한국불교의 가장 문제가 무엇이냐고 하면 수행은 수행, 생활은 생활. 
그래서 존경도 못 받고 신뢰도 못 받는 겁니다. 

제가 뼈아픈 얘기 드리겠습니다. 
노스님한테 여쭤봤습니다. 
나도 출가하니 그 말이 있대요. 

“도인은 멀리서 봐야 도인이지 가까이서 보면 도인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욕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특정 사람이 도인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은 다 도인입니다. 신도님들도 도인 이예요. 
그런데 이 말은 공부도 안한다, 
생활화도 안한다는 말입니다. 
방장, 조실스님에 대한 특정 얘기가 아닙니다. 
공부한 사람은 모두 도인입니다. 
한국불교가 도인도 안 나온다, 
선지식이 없다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대신 이런 얘기라도 들으려고 모여든 이 열기에 대해서는 
저는 정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열기를 열기로만 그치지 말고 한국불교의 가장 큰 취약점인 생활화를 해야 합니다. 
그 생활화도 한몫에 다하지 말고, 100가지가 있다면 
한 가지, 한 가지 씩 차근차근 해 나가자는 것이죠. 
생활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면서 한 가지 한 가지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참선, 염불, 봉사도 하시고 해야 안팎으로 맞아서 수행이 돼 갑니다.
 그렇게 해야 공부가 되어 가지 공부는 따로 수행은 따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다 보면, 
공부하는 사람은 점점 더 없어지고 
생활의 습관에 젖어가지고 그 이기심으로 생활하다 보면 
마음속에 구름이 걷혀서 밝아지려 하다가도 구름 두께가 점점 더 두꺼워져서 
영원히 햇빛도 못 본다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장님에 비유했는데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갈 때 깜깜해서 나라는 존재를 엄청나게 괴롭히면서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정견’을 열 분 스님들 법문을 통해서 세우셔서 
그것을 생활에 하나하나 실천해 가면서 
공부도 같이 병행해 나갈 때 공부가 성취가 됩니다. 

그런데 공부는 따로 생활은 따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질문을 통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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