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강론>(2023. 9. 19. 화)(루카 7,11-17)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일어나라.』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루카 7,11-17).”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또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은 죽음의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신(희망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은, 죽은 그 사람만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군중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지금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루카 8,54)”
“예수님께서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나인’이라는 고을에서도 죽은 젊은이에게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신 것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사자의 응답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은 ‘긴 잠’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루카 8,52).”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무생물’처럼 되어버린다는
생각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도 ‘무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살아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들을 수 있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연도’는 죽은 사람의 안식과 구원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이고,
동시에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이고,
그리고 죽은 사람 들으라고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의 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예수님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살아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첫 번째 증인은 바로 그 당사자들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사자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한 당사자의 증언과 고백은
목격자들의 말보다 더 생생한 증언과 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는 살아난 뒤에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야이로’ 라는 회당장의 딸과 ‘나인’ 고을의 젊은이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살아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울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ㄹ-4ㄴ).”
“일어나라.” 라는 말씀은, 이야기 속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
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죄입니다.
정말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살고 있더라도,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더 주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난 그 젊은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진짜’ 라고
증언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해석됩니다.
[출처]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