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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 ; Esperanto
■ opening date ; March 14th, 2015
■ e-mail ; esperanto.ms@hanmail.net
05
방파제처럼 우뚝 서 있는 5층짜리 적 벽돌 건물 사이로 비릿한 향과 함께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혹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들떠있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 할 것 없이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곧 부우- 하면서 회색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배 한 척이 리버풀 항구로 천천히 진입해 들어왔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뱃머리가 우현으로 향했고 얕은 파도가 밀려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 닿으며 하얗게 부서졌다. 선체에 매달려 있던 닻이 내려가는 소리가 육중하게 들려옴과 동시에 부두에 있던 철근 고정 물에 밧줄이 연결되자 배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곧 선착장 주변에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3만 톤이 넘는 정기 여객선 루스타니호가 리버풀 항구에 정박하자 2천명 가까이 되는 승객과 승무원이 일제히 배에서 쏟아져 나왔고 무사히 여행을 마친 기쁨으로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을 터트렸다.
화물칸에선 특등석 승객들의 물건들이 짐마차로 옮겨지고 있었는데 그 중엔 위험물 표시가 찍힌 갈색 나무 상자가 연달아서 일곱 개나 실려 나왔다. 잠시 후 마차에 모두 실린 짐들을 보고 가격을 매긴 마부가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전표 한 장을 끊었다. 미국식 카우보이모자에 덥수룩한 턱수염, 렌즈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있어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재질이 좋은 가죽 장지갑을 꺼내 후한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보아 재력이 탄탄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그 자는 상자가 행인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검은 모포로 덮으라고 지시했다.
“주소를 적어줄 테니 그쪽으로 배달해 주시오.”
남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표 뒷면에 주소를 적었다.
“한 시간 내로 도착한다면 추가 수고비를 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마부가 신이 나서 고삐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진흙 바닥에 고여 있던 흙탕물이 신발과 바짓단에 튀어올랐다.
인산인해인 항구를 뚫고 나가기에 벅차보였지만 숙련된 운전솜씨를 발휘하던 마부는 어느새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남자가 주머니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도착한지라 잠시 개인적인 볼 일을 보기로 했다. 영국국기를 흔들며 휘파람을 불어대는 사람들과 거대 여객선 루스타니호를 뒤로한 남자는 선술집이 있는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울탄’이라고 쓰인 입간판 아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산한 술집 전경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널찍한 홀에는 열 개 정도 되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두 자리를 제외하곤 모두 공석이었다. 럼주를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 잠시 시선을 던지는가 싶었지만 곧 흥미를 잃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푸른색 줄무늬 선원 복 위에 코트를 걸친 걸 보니 다음날 미국으로 떠날 루스타니호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추측했다. 한쪽 벽면엔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스카치 말고도 그레인이나 몰트위스키도 있었다.
몇 개의 스툴이 놓인 테이블 바로 걸어간 남자가 카우보이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오른손 검지를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유리컵을 닦고 있던 바텐더는 허리춤사이로 살이 비죽 튀어나온 육중한 몸매를 과시하듯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그런데 제법 가까운 곳에서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바텐더가 돌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빌트 제르고프!”
반가움과, 믿을 수 없다는 의미의 표정이 절반씩 섞여있었다. 곧이어 20대 초반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욥 아저씨. 잘 지내셨죠?”
“자네 도대체 얼마만이야! 아니, 근데 행색이 왜 이 모양이야?! 수염은 또 뭐고?”
안경을 벗은 빌트가 말끔하게 빗어 넘겼던 연갈색 머리카락을 부스스 흩어 내리고 가짜 수염을 떼어내자 제법 말끔한 청년 모습이 되었다. 욥이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이리 나와 봐! 누가 돌아왔는지 보라고! 잠시 후 군데군데 물이 빠진 붉은색 앞치마를 두른 50대 중반의 여자가 나타났다.
“응……? 맙소사, 빌트!”
“헙!”
욥 크리스의 부인 역시 남편의 육중한 체구와 비슷했는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더웠는지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친 그녀의 노멀한 가슴이 빌트의 얼굴을 그대로 덮쳤다.
“도대체 얼마만이지? 인사도 없이 떠나서 우리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니?!”
크리스 부인이 울먹거렸다. 얼굴이 붉어진 빌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욥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엉덩이를 마구 두드려 주었다. 마치 헤어졌다가 만난 자식을 대하듯 그들만의 방식대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한참이나 부인의 가슴에 안겨있던 빌트가 다시 스툴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홀에 있던 손님 중 한 일행이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간 덕분이었다. 빌트는 그리웠던 고향 냄새에 흠뻑 취해 잠시 할 말을 잃고 크리스 부인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두 사람은 많이 변해있었다. 근심으로 검게 찌든 눈가와 주름진 이맛살, 푸석하게 갈라진 머리카락만 보아도 빌트는 왼쪽 가슴이 아스라이 떨렸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니?”
“미국 이곳저곳에 있었어요.”
“세상에, 계집애처럼 고운 얼굴을 해가지고선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미국엘 갔다고! 내 도움은 필요 없었던 거냐?”
“두 분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린 널 아들처럼 생각했어.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것도 큰일이었는데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고 말이야. 그동안 널 걱정하느라 우리 속이 새카맣게 탔다고!”
욥이 넓적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마두 두들겼다. 빌트가 손 사례를 치며 연거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시 한 번 빌트의 어깨를 끌어안고 훌쩍거리는 아내에게 얼른 가서 요기 할 것 좀 준비하라고 말한 욥은 중앙 홀 가장 넓고 깨끗한 자리로 빌트를 안내했다. 그리고 손수 만든 레몬에이드를 한 컵 가득 따라왔다. 빌트는 예전부터 즐겨 마시던 음료를 맛보고 낮은 탄성을 질렀다. 이제는 기억하는 것조차 아픔이 되 버린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잠시 후 주방에서 한껏 요리 실력을 뽐낸 크리스 부인이 양손 가득 접시를 들고 나왔다.
“이것 좀 먹어 봐.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스테이크 하난 기가 막히게 굽잖아.”
“잘 알죠. 아주머니 음식 먹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빌트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감자 샐러드를 우악스럽게 퍼먹더니 스테이크 한 조각을 크게 썰어 입안에 넣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뿌듯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크리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욥은 지금 막 들어온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알아 낸 거니?”
“네?”
빌트는 알고도 모른 척 경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크리스 부인이 남편 눈치를 슬쩍 살피곤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놈 찾는다고 했잖아. 꼭 찾아서 누이 무덤 앞에 무릎 꿇릴 거라고. 그 말을 한 다음날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는 한동안 잠도 못 잤다. 너도 이비처럼 잘못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옛날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던 크리스 부인은 결국 볼 살이 축 늘어진 얼굴 위로 눈물을 떨어트렸다.
“이비가 죽은 지 3년이구나. 그 가엾은 게 이 세상 떠난 지 벌써……. 벌써 3년이야.”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밥 먹는 애 소화 안 되게. 청승 떨지 말고 가서 소시지나 구워!”
주문을 받고 돌아온 욥의 목소리에도 과거의 잔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어서 먹으라며 큼지막한 손으로 빌트의 어깨를 토닥이고 돌아섰다. 그러나 빌트는 여전히 추억 속에 살고 있는 크리스 부부와는 달리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꽃을 피웠다. 맑고 순수하기만 했던 그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를 잃은 것도 모자라, 욕심 많던 친척들이 모든 재산을 가로채는 바람에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아온 이비와 빌트는 여섯 살 터울의 남매였다. 어린 나이에도 부지런했던 빌트는 가끔 공부를 마치면 욥의 선술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생활비를 마련했고 이비는 봉제 공장에 취직해 성실한 생활을 해왔었다.
‘분명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그 분은 무척 멋진 분이셔…….’
어느 날 갑자기, 이비는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수줍게 웃으며 연신 자랑을 하던 이비의 얼굴이 생각나자 나이프를 움켜쥔 빌트의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3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누이를 죽인 자를 찾아 복수하는 것. 그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뒤따르는 잠재적인 고통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쉬웠다. 뼛속 깊이 사무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전엔 함부로 죽지도 않겠다고 다짐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언뜻 벽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빌트가 음식을 절반쯤 남기고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두둑한 뱃살을 튕기며 기름진 얼굴로 웃어보이던 욥이 물었다.
“집에 좀 가보려고요.”
“아……. 그렇지만 너희들이 살았던 집은 이미…….”
크리스 부부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끔찍한 사고가 있었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긴장된다는 듯 손바닥에 난 땀을 행주로 마구 비벼 닦던 욥은 침울한 표정으로 빌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알아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거. 근처에서 살펴보기만 하려고요. 그리고 아저씨.”
한사코 말려도 음식 값을 지불하던 빌트가 크리스 부인의 손을 슬쩍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당분간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아직 집을 못 구해서요. 다락방이라도 괜찮아요. 직장을 구하고 나면 낮엔 일을 해야 하니 잠만 잘 수 있으면 되요.”
“물론이지! 다락방이 아니라 객실을 쓰도록 해. 오늘 당장 청소 해 놓으마.”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럼 전 볼 일 좀 보러 나가요. 늦을 거예요.”
빌트는 아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가짜 수염을 챙겼다. 안경과 모자도 착용했다. 이 근방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또래들은 물론 단골이었던 야채나 빵가게 주인들도 모두 빌트를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게 싫었다. 울탄을 벗어나기 전, 크리스 부부에게 한동안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곤 코트 깃을 세우자마자 깊숙했던 골목 사이를 빠져나가 큰길가로 들어섰다. 마침 지나가고 있던 빈 마차를 세운 뒤 마부에게 행선지를 설명했다.
* * * *
“스프링필드 라이플과 저격 총, 샷 건 30자루, 그리고 덤으로 시한폭탄이 10개 입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상자 뚜껑을 지렛대로 열자 어마어마한 무기들이 쏟아졌다. 그 중 라이플 한 개를 들어 상태를 확인한 헤롯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신참답지 않게 일을 확실히 한다니까. 앞으로 지켜볼 만하겠어.”
헤롯의 입술이 이죽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아르거스가 물었다.
“두목. 그 녀석, 이번 계획에 정말 투입시킬 겁니까?”
“왜. 너보다 한참 어린 애송이라서 불만이냐?”
“경험이 없잖습니까.”
“물론 경험이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말이다, 아르거스.”
철컥. 라이플에 실탄을 장전하고 창고 출입문 쪽을 조준하던 헤롯이 이제 막 나타난 신참내기 어린 양 한 마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빌트 제르고프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 총구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증오와 원한이 두터운 놈들은 자기 몸뚱이를 자폭해서라도 적을 말살시키는 법이거든. 왜냐고?”
그가 헤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
헤롯은 일꾼들에게 상자를 모두 치우라고 했다. 일꾼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빌트와 다른 부하들이 헤롯의 뒤를 따라 창고 한 쪽에 마련된 다이닝 룸(*다이닝 룸: 호텔의 바 카운터 안쪽에 난로가 있는 방으로 계급에 따라 술을 마시는 장소가 구분되던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안쪽에서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고급 가죽으로 만든 담배케이스 안에서 스페인산 아편 한 개를 꺼내 절단기로 끝부분을 살짝 날려 입에 물었다. 그리곤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부하들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워낙 고된 훈련과 오래된 경험을 쌓고 있던 자들이라 일일이 스펙을 묻거나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2인 1조다. 마음 맞는 녀석들끼리 팀 맞춰서 보고하도록 해. 그리고 누차 말했듯이 우리 파수꾼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게 아니다. 저런 총알 몇 개로 그 녀석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 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테니 더 이상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우리의 목표는 판도라다. 신이 내려주셨다는 특별한 인간, 판도라. 알겠나?”
“하루 이틀 해먹은 일도 아닌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 굴로 들어가는 멍청한 놈들이 속출하니까 하는 말이다.”
부하들이 아우성치자 헤롯이 말을 이었다.
“내가 건네 준 명단은 이미 확인해서 알겠지만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주소가 있을 거다. 반드시 확인사살을 해야 하는데, 목표물이 판도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딱 하나야.”
헤롯이 턱을 움직여 고개 짓하자 멀찍이 서 있던 빌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갑자기 빌트의 손을 꺾어 등을 보이게 한 후 그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손목에 강한 통증을 느낀 빌트가 벗어나려고 몸을 돌렸지만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크고 힘이 센 헤롯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몸을 가깝게 밀착한 헤롯의 시선은 여전히 부하들에게 가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빌트의 귓등에서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이렇게 관자놀이를 겨누고 묻는 거다. 네 주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큭큭큭…….”
아르거스는 낑낑거리며 헤롯의 품에서 발버둥치는 빌트를 향해 조롱 섞인 웃음소리를 퍼부었다. 그러자 이번엔 헤롯이 아르거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주인의 이름을 말해주면 살려줄지, 죽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다. 자, 네 주인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아르거스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조아렸다.
“헤롯 비나 웨인입니다.”
“탕! 탕! 탕!”
헤롯이 커다란 목소리로 방아쇠 당겨지는 소리를 내자 부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장대소 했다. 그 와중에도 빌트는 헤롯에게 왼팔을 결박당한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빌트는 미국에서 만난 이방인에게서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뱀파이어가 판도라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누이가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다고 확신한 바, 판도라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뱀파이어도 없애버리겠다는 투지를 품고 있었다.
헤롯이 부하들에게 무기를 챙기라고 명령하자 모두들 신이 난 얼굴로 룸을 빠져나갔다. 빌트와 둘만 남게 된 헤롯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그에게 담배를 건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거절을 의미하는 무언의 침묵이었다.
“자, 말해봐. 어째서 너 같은 녀석이 교황청을 배경삼아 낙하산을 타고 파수꾼이 됐는지에 대해서.”
“알고 계시잖습니까.”
헤롯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은. 누이를 죽인 자를 찾는다고만 알고 있지.”
“말 그대롭니다.”
“누이를 죽인 자가 뱀파이어라면서? 몇 번을 말해줘야 이해하겠나. 우린 뱀파이어가 아니라 그들의 먹잇감인 판도라를 사냥한다고.”
“그 자의 이름을 압니다.”
건조한 아랫입술에 척 붙어있던 아편대가 흔들렸다.
“안다고? 그래서?”
“판도라를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라고 하셨잖습니까. 주인이 누군지 물어보는 것뿐이라고. 전 누이를 죽인 뱀파이어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거면 된 것 아닙니까?”
헤롯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 놈을 찾아냈다고 치자. 조금 전 내가 공격했을 때도 넌 꼼짝 못 했던 놈이야. 그런데 뱀파이어를 상대로 때려눕힐 건가, 아니면 목을 조를 건가. 그것도 아니면 총구를 들이댈 것인가. 확신하건대, 네가 뭔가를 시도할 새도 없이 죽을 거다.”
빌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갔던 것은 뱀파이어를 사냥한 적이 있었다던 자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2년의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아낸 사람은 인디언의 피를 이어 받은 자였는데 놀랍게도 여자였다. 게다가 자신이 ‘판도라’였었다는 사실까지 말해 주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목 언저리에 난 상처를 보여줬었다.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지만 두 개의 송곳니자국이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서 방법을 알려 주는 대신 자신의 부탁을 꼭 들어달라고 했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씻어내도 빨간 핏물이 물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갓 잡아 올린 물고기가 살려고 퍼덕거리듯 고동치던 그 심장의 울림과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악몽은 빌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자꾸만 인간미의 고뇌와 싸우게 만들었다.
헤롯은 상념에 빠진 빌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 이겨내는 것도 버거워했던 놈이 무슨 수로 뱀파이어를 잡겠다는 거야?”
“상관없습니다.”
“아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복수라도 시원스레 해 보고 같이 자폭하겠다는 말이군. 하지만 넌 실패할 거야.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는 빌트의 속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인간 사냥을 하는 모순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헤롯은 빌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노에 찬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고 있는지, 충분히.
“난 말이야, 지구상에서 직립보행 할 줄 아는 동물 중에 가장 존엄한 건 인간 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 인간을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존재들은 절대 있어선 안 돼. 그래서 판도라 사냥을 시작했어. 그 녀석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인간을 밟고 서지 못하도록. 그런 난 너보다 훨씬 강하지. 난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이성적으로 싸우지만, 넌 복수를 위해서 지극히 감정적으로만 싸우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다 버리고 가벼워지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차피 내 말 들을 녀석도 아니고. 또, 이미 복수가 시작했다면…….”
읏쌰. 헤롯이 기지개를 펴고 반쯤 타들어간 아편을 재떨이 모서리에 세워두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두 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네가 죽여야 할 인물의 정보가 들어있어.”
“왜 저만 둘입니까?”
“네가 단독행동을 원했으니까. 만약 두 명을 다 죽이고 오면 그 후엔 더 많은 임무를 주도록 하지.”
빌트가 천천히 두 개의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내어 자신이 죽여야 할 판도라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앨리스테어 다닐, 그리고……. 아샤 카멜.”
그 사이 헤롯은 다른 서랍장을 열고 상자 하나를 꺼냈다. 가공된 합판에 파란색 벨벳 소재의 천을 덮어씌운 상자였는데 뚜껑을 열자 눈이 휘둥그레 질 만큼 반짝거리는 금빛 술잔이 들어있었다. 헤롯은 그것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술잔이지.”
두 개의 명단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은 빌트가 차가운 눈빛으로 헤롯을 직시했다.
“네가 첫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돌아오면 이 성배를 들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어금니를 깨물어 자신의 의지와 복수를 한 번 더 되새긴 빌트가 룸을 빠져나갔다. 이중으로 된 철제문이 막 닫히기 직전 빌트는 분명히 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편을 다시 입에 물며 자신에게 던진 헤롯의 목소리를.
“누가 뭐래도 증오로 미치기 일보직전인 그 눈빛, 정말 마음에 든다. 빌트 제르고프.”
pandora
뚜벅, 뚜벅.
일정하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수로를 따라 흐르는 템스 강물보다 더 차갑고 으스스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작은 남자 아이 둘이서 신나게 눈싸움 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막만한 손으로 연신 눈을 뭉쳐 던지는 게 우스울 만큼 귀여웠다. 빌트는 그 아이들이 던지는 눈을 피해 골목 안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여 들어갔다.
“응? 아저씨. 그 쪽은 길 없어요! 향초 만드는 누나 집 밖에 없는데…….”
한쪽에 쌓여 있던 눈뭉치를 움켜잡던 남자 아이가 말했지만 빌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골목 끝으로 향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에 실탄이 장전되어 있는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음습한 코너 안쪽 깊숙이 몸을 밀어 넣자 빌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꼬마아이는 잠시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시 눈싸움을 하는데 열중했다.
똑똑.
두 장의 천을 덧대어 만든 두건을 쓴 여자가 손잡이를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조금 놀란 듯한 갈색 눈동자에 하얀 피부위로 주근깨가 있는 귀여운 아가씨였다. 대략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생각한 빌트는 그녀에게서 아주 향긋한 오렌지 향이 난다는 것을 느꼈다.
“앨리스테어 양?”
“누구시죠?”
그녀의 어깨 너머로 집안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녀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빌트는 출입문을 확 밀었다. 아! 짧은 비명을 지르며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안으로 들어온 빌트는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나, 남편을 부르겠어요! 어서 나가요!”
겁먹은 여자가 소리쳤지만 빌트는 그녀에게 남편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자는 빌트의 손에 들린 총자루가 자신을 겨냥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도, 돈이라면 다 드릴게요. 제가 낮에는 조화를 팔고 밤에는 향초를 만들어서 큰돈은 못 벌지만 그래도 있는 거라면 다 드릴게요!”
빌트는 그녀가 측은했다. 자신을 일개 좀도둑으로 취급한 사실도 안타까웠지만 왠지 오래전 소박하게 살아가던 누이와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에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마음을 잡아먹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총구가 천천히 그녀의 미간을 향해 올라갔다.
“당신의 주인이 누굽니까.”
“무, 무슨 말이에요! 사, 사실은 나 혼자 살아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필요한 거 다 가지고 가세요!”
“대답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주인의 이름이 뭡니까.”
“주……. 주인이라면 설마!”
빌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겁에 질린 듯 몸서리쳤다. 문득 그녀의 목덜미 언저리에 물린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이미 판도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것이었다.
“주인의 이름이 뭡니까!”
빌트가 분노했다. 그의 지적인 눈매는 강렬하게 찢어지고 꽉 깨문 잇새에선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아무 죄 없는 가녀린 여자가 자신의 우악스러운 힘에 굴복한 채 고통스러워해도 머릿속엔 온 통 그 놈의 이름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비가 죽어가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 인디언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화형 시키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모든 기억들이 빌트의 심장을 옭아맨 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젠장, 어서 말 하란 말이야!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여자를 바닥에 엎드려놓고 등에 올라타 머리에 총구를 대고 더 세게 눌렀다.
“당장 말해.”
“그……. 그레고리 빅터……. 으흡!”
여자의 입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름을 듣자마자 빌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아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놈들 중에 한 놈. 그 한 놈의 이름을 듣는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제기랄…….”
두건이 풀려나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절대 이성을 잃어선 안 된다고 수 천 번씩 되새겼지만 여전히 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천천히 여자 앞으로 다가와 다시 총구를 들이대는 빌트의 손이 무자비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
탕!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여자의 머리에 거대한 총구가 생겼다. 살인의 전율이 스쳐 지나기도 잠시, 붉은 피가 마룻바닥에 번져 자신의 구두 앞까지 퍼지자 모자를 눈 밑까지 푹 눌러쓰고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이 아직 있었다. 어느새 눈사람을 만들어 골목 입구에 턱 하니 세워두었다. 빌트는 그것을 비켜가다가 한 아이와 부딪쳤지만 모른 척하곤 빠른 속도로 그 곳을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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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ㅋ이번글 역시 와..장난이 아니십니당ㅋㅋㅋㅋㅋ
다른 인물이 등장할때마다 마치 번외같아서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캬캬 뭐 어떻게든 되겠죵;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