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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성지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정약용이 자주 찾은 백련사(白蓮寺) 탐방기
2017. 9. 2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사학(邪學:천주교)에 물든 죄를 덮어쓰고 경상도 포항 땅 장기현(長鬐縣)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시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A. de)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사건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참담한 유배생활이 강진(康津)에서 시작되었다. 명문사족(士族)으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대역죄(大逆罪)지어 폐족(廢族)의 신세로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 위치도
처음 강진읍에 왔을 때, 주변사람들은 귀양 온 선비 정약용에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고 피하였다. 그 때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그는 강진읍 동문 밖에 있는 주막(酒幕)집 노파의 인정(人情)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었다. 정약용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내고, 그의 애제자(愛弟子)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마침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지금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본래 귤동(橘洞)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산간정자(山間亭子)였다. 윤단은 아들 삼형제를 위해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招聘)하여 아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강진읍지도
귤동(橘洞) 마을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대나무와 소나무, 동백나무가 총림(叢林)을 이루고 있고 돌부리와 나무뿌리 길을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이곳 다산초당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18년간 강진에 머물면서 그 중 이곳에서 11년간 머물며 후진을 양성하며 실학을 집대성(集大成)한 곳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가운데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고, 그 양옆으로 동암(東庵)과 서암(西庵), 동쪽 산마루에 아름다운 구강포(九江浦)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천일각(天一閣;하늘의 끝 한모퉁이)이 있다. 다산초당은 제자들을 강학(講學)하는 교실로, 동암은 정약용 자신이 기거하면서 천 여권의 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암은 주로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거처로 썼다. 정약용은 가끔 천일각에 나와 바람도 쏘이고 머리도 식혔다. 그는 천일각에서는 가족이 있는 서울을 그리워하고,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간 둘째형 자산(玆山) 정약전(丁若銓)을 생각하며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을 것이다.
강진군관광 안내도
다산초당과 백련사 위치 개념도
다산초당 올라가는 오솔길
돌부리길
나무뿌리길
다산초당(茶山草堂) 중심건물
다산초당-서암
다산초당-동암
다산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茶山草堂’ 글씨는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만든 것이고 ‘寶丁山房’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쓴 것이라고 한다.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년 연하였지만 평소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다.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 현판
또 정약용의 흔적으로는 초당 옆의 연못과 앞마당의 다조(茶竈;차 부뚜막)로 쓰였던 넓적한 바위 그리고 집 뒤의 샘과 그 뒤편에 암벽에 새겨져 있는‘정석(丁石)’이 있다.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온 후 비로소 마음 놓고 사색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여건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그 유명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범인은 평생 1권의 책도 못 내는데 500여권이라니 놀랍기만 하고 그의 천재적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다산초당-연못
다산초당 뒷암벽에 써있는 정석
다산초당의 천일각(天一閣)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추앙받는 정약용은 일찍이 그를 인재로 알아보고 깊은 신임을 주었던 조선의 제 22대왕 정조가 있었다. 종조대왕은 정약용에게 우리나라의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의 설계를 부탁하여 수원 화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만덕산의 다산초당과 백련암 탐방 개념도
천일각 옆을 지나 만덕산(萬德山)을 넘어 백련사(白蓮寺)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그와 혜장(惠藏)선사(1772~1811)가 유(儒)와 불(佛)의 경계를 넘어 오고갔을 그 길이다. 혜장은 정약용보다 열 살 연하였고 또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에서도 뛰어났다. 정약용이 이 길을 걸어서 백련사에 있는 혜장선사를 찾아가 자기의 심정을 토로(吐露)하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茶山’ 이란 아호가 만덕산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야생차로 인하여 백련사 혜장스님으로부터 다(茶)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만덕산 즉 다산이 된 것이다.
백련사 올라가는 길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만경루 앞
대웅전 전경
백련사-명부전
명부전 안의 여러 위의 불상들
약1km 거리에 있는 백련사에 도착했다.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백련사는 붉은 배롱나무 꽃을 배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꽃 속의 백련사는 보는 사람들로부터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 만경루(萬景樓) 마당에서 바라본 강진 앞 바다는 한 폭의 그림으로 닥아 와 나의 가슴에 안긴다. 과연 강진만(康津灣)의 남도다운 아름다운 매력에 푹 빠져본다.
백련사 출입문인 만경루
만경루 옆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강진만
백련사에서 가까이 잡힌 강진만 근경
백련사는 만덕사(萬德寺)로 불렀으며 신라 문성왕(文聖王) 1년(839)에 무염(無染)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倭寇)들이 자주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할 때 해안에서 가까운 이 절도 큰 피해를 입었다. 행호선사(幸浩禪師)는 왜구들에게 당했던 옛 일을 거울삼아 긴 토성을 쌓았다. 그래서 이 토성을 행호토성으로 불린다.지금도 그 토성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이 절은 조선 효종(孝宗) 때 중수되고 그 후 잦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백련사는 그 후에 중창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백련사에서는 8명의 대사가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바로 다산 정약용과 교류했던 혜장선사이다.
백련사- 응진각
백련사 천불전
백련사- 삼성각 1
백련사- 삼성각 2
스님들의 생활 공간인 육화당
지금의 백련사는 중간 크기의 규모이다. 맨 앞에 만경루가 있고, 만경루를 들어가면 대웅보전과 명부전, 천불전, 응진당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선방과 요사채도 있다. 대웅전은 영조 때 화재로 새로 세워진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하여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가 받쳐져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이 ‘大雄‘ ’寶殿‘ 이라고 두 쪽으로 나뉘어 걸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현판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고 현판 양옆 기둥 위에 용두(龍頭) 장식이 눈에 띈다.
대웅보전의 현판과 용두
백련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천연기념물 제 151로 지정된 1500여 그루 동백 숲이라고 하는데 보지 못하고 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려오는 길 옆에 동백나무가 보인다.
남부 지방에 잘 자라는 비자나무
백련사 - 해탈문
만덕산백련사 -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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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린 백련사에서 동백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넘어 왔었지.
그리고 다산기념관을 들르고...
백련사 앞 동백숲이 장관!!!
일정이 빡빡한 단체 투어로 인해서
동백숲을 보지 못했다네
이런 곳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가야하는데...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곳, 잘 가셨네. 나도 거길 두 번 갔었는데 1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
지금쯤은 많이 변했을 것 같은데 --
간 김에 보길도와 월출산을 올랐으면 더 좋은 여정이 되지않았을까 한는 생각이 드네.
이 먼 곳을 두 번이나 갔다 오셨다고!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메니아는 다르군!!
그래 자네 말과 같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지었다는
<보길도>에 가보지 못했다네. 단체로 당일 투어 였으니까 어쩔수 없었었어.
자네가 이야기한 월출산과 보길도는 여유를 가지고
꼭 한 번 가봐야 하겠네.
월출산은 워낙 큰산이라 완전 하루를 잡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