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루카 9,1-6
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이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의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독서 : 에즈라 9,5-9
기도의 모델, 에즈라!
멸망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안타깝게 바라보며,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한 의인(義人), 사제요 율법학자 에즈라가 바친 기도는, 우리가 바쳐야 할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에즈라는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에즈라 9장 5절)
여기서 ‘찢어진 의복과 겉옷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큰 죄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죄인으로서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손을 펼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표시입니다.
에즈라가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모범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잘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앞에, 죄인인 아들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진실성과 겸손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①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에즈라 9장 6절)
에즈라는 기도의 출발점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민족이 처해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 공동체적으로 죄를 고백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죄가 곧 내 죄이며, 공동체의 일이 곧 내 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에즈라 9장 7절)
우리의 죄가 하늘까지 닿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음을 기억합니다.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생존자를 남겨주시어 이스라엘 역사를 잇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③ 이어서 민족의 멸망과 유배라는 참담한 현실을 불러온 구체적인 죄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가장 중요한 죄목은 우상숭배,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불러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솔직하고도 진정성있는 참회와 죄의 고백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④ 에즈라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큰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보답하기는 커녕 끝도 없는 배신과 타락의 길을 걸어왔음에 가슴을 칩니다. 고개조차 들수 없고, 그 어떤 처벌 앞에서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자비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죄한 의인이면서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백성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에즈라의 기도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백성들의 지도자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 9,5)
제1독서에 등장하는 에즈라의 기도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돌아온 유배자들이 성전을 다시 지어 봉헌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의 일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즈라는 아론 가문 출신으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따라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 있다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에즈 9,8)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에즈 9,9)
에즈라는 나라의 멸망과 유배, 귀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자신들의 죄악과 잘못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되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부터, 하느님은 살리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넘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분도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살리고, 되살리고, 마침내 영원히 살게 하는 분이시지요.
복음에서는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성자 예수님을 거쳐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눠 주시고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구마와 치유, 하느님 나라 선포 등등,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주님께서 권한을 부여하시고 파견하시니 믿고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머물러라. ... 떠날 때에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지침은 소유와 머무름, 떠남에 대한 것들입니다. 구마나 치유, 선포 등 내용에 대한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니 필요한 순간에 그분께서 친히 채워 주실 겁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교통이나 지역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길을 떠나면서 식량과 옷, 생필품과 무기 등을 챙기지 않는 것은 안전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맡기는 결단입니다. 미지의 고장에서 신세지거나 떠나는 일조차 일면식 없던 사람들의 호의에 맡겨야 하니, 그 호의나 배척 뒤에 자리한 하느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제자들은 자기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믿고 되살리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어둠에 갇힌 이들을 희망으로 되살리고, 구마와 치유로써 악령과 질병에서 그들을 되살립니다.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억울하고 지치고 절망스런 영혼들을 되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단 한 번의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조차 떼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는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죄와 질병과 두려움으로 스러져갈 때마다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되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어둠이 아무리 짙고 절망이 커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일으키러 오실 것이니, 언제라도 온 힘을 다해 그 손을 붙잡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일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복음 환호송)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