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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하나님 나라
막 10:23-31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막 10:23-31 / 예수께서 그가 가는 것을 지켜 보다가 제자들을 둘러보며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하고 말씀하셨다. 24)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의아해하자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자들아, 재물을 믿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6) 그래도 제자들은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27) 예수께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백 배의 상;마19:27-30,눅18:28-30]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서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재산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은 박해를 받을지라도 장차 그 버린 것의 백 배로 돌려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처럼,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천국을 소유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23)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돌아간 후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자는 재물을 많이 소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과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고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시 52:7).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나 권세, 명예 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24-27) 제자들은 “만일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으로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부’는 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가난’은 악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신다는 표시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욥 4:7-8; 5:2; 8:6; 11:6; 15:20, 29; 눅 13:1-5; 요 9:1-3).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구원 문제는 물질의 많고 적음이나 인간의 어떤 행위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요 3:3, 5; 엡 2:8-9).
천국을 소유한 자들의 삶(28-31)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을 확신했습니다(1:18, 20; 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백배의 축복을 받되, 핍박과 영생을 같이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축복은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영적인 축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16:17-19; 요 24:50-53; 고후 13:13). 그리고 핍박은 앞으로 전개될 초대 교회가 로마에 의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당연하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갈 4:29). 그리고 “먼저 된 자로서...”라는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 교만함을 사전에 차단합니다.
적용: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물질관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사람이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그 종교에 대한 관심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들의 삶의 우선권이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물질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다가 가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 설 교 >
성도들에게 고난은 왜 필수인가?
마가복음 10:23-30 / 강문호 목사
고난 주일입니다.
물없는 바다가 없고, 나무없는 산이 없듯이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림자처럼 반드시 고난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오늘 찾아보려고 합니다.
미국 장로교 잡지 <Presbyterian Survey>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분의 간증담입니다.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천국을 이리 저리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천국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다가 천국에 오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1860년 동안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찍 온 셈이지요. 나는 바울 시대에 로마에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었습니다. 네로가 나를 잡아 기둥에 매두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굶어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지나도 죽지 않으니까 내 위에 장작을 쌓더니 불을 질러 나를 죽였습니다.”
“그 때 얼마나 무서웠었습니까?”
“아니요. 도리어 기뻤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 데 나도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때 한없이 기뻤었습니다.”
천국을 구경하던 그는 자기 신앙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또 한 사람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귀하는 어디서 신앙생활하다가 천국에 오셨습니까?”
“나는 하늘나라 이곳에 온 지 수 백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 남해 에로망가 섬에서 왔습니다. 식인종 민족입니다. 죤 윌리암 선교사가 그 섬에 와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확실하게 믿어지는 지 놀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 후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종족들이 선교사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도 잡아서 나무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기진맥진할 때까지 팼습니다.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와서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뽀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요리하여 먹었습니다.”
“저런 끔찍한 일이 있나?”
“아니요. 당신이 보기에는 끔찍하여도 나는 기뻤습니다. 윌리암 선교사는 나에게 예수님은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으셨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 믿음을 끝까지 당당하게 지킨 것을 나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윌리암 선교사와 같은 분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였습니까?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신 예수님을 위하여 어떻게 헌신하고 살고 계십니까?”
그는 이런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 하고 서있었습니다. 그렇게 물어 본 이는 슬픈 얼굴을 그를 물끄럼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는 침대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몇 시간동안 울면서 회개하면서 자기 생활을 점검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헌금드리는 데는 인색하였고 좋은 옷을 사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 않았는가?
나는 놀러 다니는 데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 예배드리는 데 시간을 얼마나 바쳤는가?
나는 육적 건강을 위하여는 좋은 것이라면 다 사먹으면서 영적 건강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였고 영적인 책을 사보았는가?”
그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다가 꿈에서 깨어나 자기 영적 생활을 다시 조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꿈이 준 영적 성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1. 재산을 헌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고기를 두 배 그득 잡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배와 그물을 갈릴리 해변가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맡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아내에 연락하여 팔라고 잘 매어 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헐값에 당장 팔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 관심 밖이었습니다. 다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2. 가족을 헌신하였습니다.
가족과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습니다.아내에게 연락이라고 하고 떠나지 거냥 떠났습니다. 누구에게 연락 좀 하여 달라는 언질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가족관계보다 예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가족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재산을 헌신하고, 가족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숙연하여지며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금세에> 즉 살아 있을 때에 100배나 받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금세에도 보상하십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주십니다. 그런데 핍박이 겸하였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 가지는 필수로 따르는 요소입니다. 왜 예수님을 잘 믿는 데 핍박 고난이 따르는 것일까요?
1. 핍박 고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르게 살려고 영적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영적으로 살려고 하니까 사탄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탄의 공격이 심하기에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면 할수록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고 미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베드로는 자기 경험담으로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아네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후 5;9-10)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말이 여기 숨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고난을 당하지만 잠간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고난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려는 이들이 고난을 받는 모습을 가장 잘 알려주고 있는 곳이 믿음장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이곳에 신앙생활 잘 하면서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모습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리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 하느니라.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3-38)
이같이 예수를 잘 믿으면 고난이 오게 됩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사탄이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부살인자들이 모여서 사람을 죽일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도저히 용납지 않아 뛰쳐나오며 외쳤습니다.
"나 그만 둘란다."
사람들은 그를 죽였습니다. 바르게 살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아프리카 우독족에게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두 여자 선교사가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 마을 13,000명 모두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이교도들이 핍박을 시작하였습니다. 죽이려고 모의를 하였습니다. 사막에 가두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데 덮을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가끔 가서 예수를 배반한 사람들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그 곳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50명씩 그렇게 하였습니다. 믿음을 지키던 이들 13,000명 모두 수단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 양식으로 한 달을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가 된 두 여자 선교사가 그 곳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어서 고맙다고 달걀 한 박스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들 한 달 식량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끼어 안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바르게 믿으려고 하니 사탄이 그냥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징계 고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따르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죄지은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징계하시기 때문에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여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아들이 자꾸만 삐뚜로 가는 것을 아버지가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참다 못 하여 아들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사정없이 매질을 하였습니다. 거의 죽도록 팼습니다. 드디어 매질이 끝났습니다. 소리없이 맞고난 아들이 아버지를 끼어앉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다 때리셨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잘못 했어요"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모습을 거울로 보았어요. 아버지가 더 아파하셨어요. 울면서 나를 때리는 것을 보았어요." 이것이 하나님 심정입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징계하시되 더 아파하시는 심정입니다.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는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95년도 승마경기 중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역경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타로서 죄를 물마시듯이 저지른 것을 하나님이 장계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잘 나갈 때 주지육립 속에서 살았습니다. 잘못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영화감독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배우로서 이런 영화를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영화 촬영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함으로서 분노나 좌절대신 해방감을 느낀다.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창조적인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징계를 통하여 더욱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팽이를 때리면 때릴 수록 더 잘 돕니다. 유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은 조금만 잘못 하여도 징계하시기에 고난은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3. 거룩 고난
예수님을 잘 믿고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사탄이 고난을 줍니다.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다가도 때로는 곁길로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잘못 할 때 하나님이 징계로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훈련 고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히 12:14)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하기오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순수하다> <헌신되었다> <구별되었다> 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분리되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구별된 것을 거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별된 땅을 성지라고 말합니다. 구별된 쌀을 성미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책을 성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구별된 가구를 성구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구별된 돈을 헌금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여야 합니다.
청교도들의 생활 철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함.>
이것이 청교도들의 삶이었습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를 창설하면서 말했습니다.
“성경에 의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 세계 알리기 위하여 감리교를 창설한다.”
피비 팔머, 핸드리 모울, 앤드류 머레이, 재시 펜 루이스, F.B 마이어, 오스왈드 챔버스, 호레이시우스 보나르, 에이미 카마이클, L.B 맥스웰 이런 분들은 19세기 영의 거성들입니다. 이들의 핵심은 거룩이었습니다. 이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지나면서 거룩으로 성결 운동을 일으킨 영계의 거성들입니다.
종교 개혁 전 영적인 거성은 성 테레사,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마담 기용, 뻬루 그루입니다. 이들도 거룩을 제일로 삼았던 이들이었습니다.
6.25 직후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문둥병 수용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문둥병자에게서 흐르는 피고름을 다 닦으며 받아내고 치료하였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특파원 사진 기자들이 이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진은 100만 불짜리 사진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100만불을 주어도 이런 일을 못 하겠습니다.” 그 때 고름을 닦아주던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나도 못 합니다.” 기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고난을 주셔서 훈련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고난은 은혜입니다.
보석 중에 가장 비싼 보석은 진주입니다. 다른 보석은 모두가 광물질입니다, 산에서, 땅에서, 돌속에 캐내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진주만은 생명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아프니까 감싸고 감싸다 생기는 보석이 진주입니다.
고난은 보석을 만들어 냅니다.
아픔을 느끼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병이 문둥병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아픔을 모릅니다. 코가 떨어져 나가도 모릅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 합니다. 난로가에서 자기 발이 타는 데 모르고 말합니다.
"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
그렇기에 문둥병자들은 고양이를 기릅니다. 미국 문둥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카라우파파에 갔더니 고양이 떼가 온통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잘 때 쥐들이 와서 살점을 뜯어 먹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취제 없이도 수술하는 병이 문둥병입니다.
고통을 느끼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병이 문둥병입니다. 물론 요즈음은 문둥병은 불치병이 아닙니다.
고난은 은혜입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이 있습니다. 100배의 축복이 있습니다. 죽으면 분명히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신유 은사가 강하여 자기가 사용하던 손수건만 대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가시와 같은 병으로 평생 시달리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을 이룬 마틴 루터의 별명은 종합병원이었습니다. 평생 병의 고난이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병이 너무나 심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단 5분만이라고 아픔없이 평안함을 맛보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의 근원이 사탄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모르면 영적 문둥병자입니다.
고난은 은혜입니다.
고난 주간 다음 주간이 부활주간입니다. 고난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비없는 무지개는 없습니다.
사탄이 주든지, 하나님이 주시든지 고난은 은혜입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
강문호 목사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고기를 두 배 그득 잡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갈릴리 해변가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보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맡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아내에 연락하여 팔라고 잘 매어 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헐값에 당장 팔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 관심밖이었습니다. 다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많이 잡은 고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전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조금 버린 것이 아니라 다 버렸습니다.
<오직 예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물어 본 배경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이야기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고 참 좋다. 그러나 재산이 많다. 그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숙연하여지며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과 친구가 되고 나서 세상 사람을 버렸습니다.
복음과 친구가 되고 나서 어부를 버렸습니다.
제자들과 친구가 되고 나서 가족을 버렸습니다.
영원과 친구가 되고 나서 순간을 버렸습니다.
하늘과 친구가 되고 나서 땅을 버렸습니다.
영혼과 친구가 되고 나서 고기를 버렸습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 미국 남북 전쟁 때였습니다. 중간에 란카스타란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하루는 북군이 차지하고 하루는 남군이 차지하며 엎치락 뒤치락하였습니다. 북군 때문에 죽고, 남군 때문에 죽어 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어느 때 남군이 들어올지 모르고, 순간적으로 북군이 들어 올 지도 모르니 위에는 북군의 옷을 입고 밑에는 항상 남군의 옷을 입자. 북군이 불시에 들어오면 자기 옷을 보고 안 죽일 것이다. 남군이 갑자기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남쪽 옷을 입은 것을 보고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위에는 북군의 옷을 입었습니다. 밑에는 남군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반대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군이 들어와서 남쪽 아래옷을 입은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남군의 옷을 입었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죽였습니다. 또 남군이 불시에 들어와서 북군의 옷을 입은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북군의 옷을 입었네.> 그리고 또 죽였습니다. 이래저래 다 죽었습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요즈음 나는 감리교 감독회장에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 선거 전략에 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미국 역사상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 하나뿐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데에는 상대방 후보 닉슨 덕분입니다. 닉슨과 케네디가 경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케네디는 선거구를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1. 자기에게 유리한 곳
2. 자기에게 불리한 곳
3. 경합되어 있는 곳.
그리고 유리한 곳은 가지 않았습니다. 불리한 곳은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합되어 있는 곳만 집중적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닉슨은 51개 주를 다 다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지친 모습이 TV로 방영되었습니다. 지친 후보에게 사람들은 표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케네디가 승리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친구로 만들려고 하던 닉슨이 졌습니다. 버릴 사람은 버리고 친구로 삼을 사람만 집중 공략한 케네디가 이겼습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
1. 금세의 친구는 내세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금세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내세는 앞으로 우리가 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만 생각하고 이 땅을 친구로 삼은 사람은 저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금세를 버리고 내세를 친구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 봄이라>(히 11;24-26)
바울도 내세를 친구로 삼으려고 금세를 멀리한 사람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4-17)
오늘 위하여 내일을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만족하면 그만입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베짱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 좋기 위하여 오늘을 고생하며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개미같은 사람들입니다.
내일의 친구는 오늘의 친구가 아닙니다.
금세의 친구는 내세의 친구가 아닙니다.
2. 예수님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헨리 보스(Henry Vos)는 말했습니다.
<나에게 머리가 둘 있다면 나는 이 머리 둘을 주님을 위하여 바치겠다.>
카스틸라 루피아(Castilla Rupea)는 그를 이교도들이 낭떨어지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비록 내 몸을 낭떨어지로 떨어뜨릴 지라도 내 영혼은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 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아닙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3. 복음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버리지 못 하고 이런 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복음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거의 TV를 보지 않습니다. 뉴스 외에는 별로 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TV를 열었습니다. 물론 기독교 TV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노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들에게 내쫓긴 할머니였습니다. 세상에는 어찌 상상할 수 있는 일만 생기나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 할머니를 데려다가 같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그 할머니에게는 그런 노인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노숙자 노인들만 모셔다 같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말한 적도 없는 데 양로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밤에 잘 때가 되면 서로 옆에 와서 자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자리다툼으로 심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한 시가만 늦게 와도 야단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안 계신 동안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늦게 와요?> 그는 노인들을 정성껏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는 데 나는 저들을 위하여 죽어야지요.> 기자가 물었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보고 싶어서 성지 순례 가고 싶어요.> <한번 가시지요.> <내가 한 시간만 비어도 난리들인데 어떻게 며칠을 비울 수 있겠어요?> <성지 순례 못 가시겠네요?> <이 땅에서 성지 순례 못 가도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에서 이스라엘을 내려다보지요.>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를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으로 즐기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 익산에 집회인도를 하였습니다.
원 형수 관리자와 둘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그냥 치웠습니다. 이야기가 진지하였습니다.
호남 선교 연회가 250 교회 정도됩니다. 원 관리자는 100 교회를 더 개척하여 350 교회 만들어 정식 연회가 되는 것이 오직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파나이섬에 260개 교회를 지었습니다. 나에게 맡기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사명감이 불 타 올랐습니다.
원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중에 가장 감동깊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농구 선수는 농구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 가장 바람직하지요. 운전수는 운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좋지요. 목사는 목회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목사지요. 목사가 스트레스 푼다고 등산가고 수영하고 낚시질하러 가면 되나요? 발명왕 에디슨은 결혼하고 신혼여행 가지전에 연구실에서 연구하다가 신혼여행을 잃어버렸지요. 나는 휴일이면 공부하고 성경 연구하지요. 그러면 교인들이 스트레스 풀러 노는 날이나 나가자고 하지요. 나는 나가면 더 스트레스 받아요. 성경 연구하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책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강 목사님도 책을 100권 정도 썼지만 나도 11권 썼지요. 복음의 사람은 복음과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하지요.> 식사하면서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1. 금세의 친구는 내세의 친구가 아닙니다.
2. 예수님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아닙니다.
3. 복음의 친구는 세상의 친구가 아닙니다.
맘몬에 도전하라
임현수 목사
기독교 위기의 본질적 원인 을 세가지로 지적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1. 성경 권위의 실추
2. 돈을 사랑함
3. 세속화 : 세상에 동화됨….
성경에 ‘맘몬’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네 번 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데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 필 요가 있습니다. 그 네 곳을 문맥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것을 생명이나 인격이 없는 사물로 여기시면서 재물(財物)이나 부(富)라고 명명하지 않으시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격화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격화(神格化)하여 신성(神性; deity)을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은 비인격적이며 전적으로 중립적인 교환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돈의 도덕적 성격이 규정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은 지극히 위험스러우며 마귀의 기만에 속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권세(power)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 또는 권력이라 함은 고유의 법칙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주체적으로 행동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돈은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권세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 인격적인 권능으로서 등장하듯이 맘몬도 인격적인 권능을 가진 재물의 신입니다. 돈은 분명 무서운 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력을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영적 세력자입니다. 성경 전체를 고찰해 보면 이 맘몬이 마귀이거나 아니면 마귀의 수족 역할을 하는 악 한 영임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돈 뒤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혹되거나 집착하도록 유도한 후 결국에는 그를 지배하여 예속시키는 권능을 가진 맘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마태복음 6장 19-21절과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 하늘에 쌓아 두라. … 이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기 때문이라.”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고, 생각을 하늘나라에 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25절은 너무도 유명한 예수님의 잠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잠언은 젊은 어떤 부자라고도 하고 한 청년이라고도 하고 한 율법사라고도 하는 사람과의 대화 도중에 나온 이야기 입니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종합해 보면 젊은 부자 율법사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 율법사는 예수님을 일 대 일로 만났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 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병든 사람이 병을 고치러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자기가 아쉬우니까 나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고 병든 자가 잘 믿는 것과 부자가 잘 믿는 것과는 달라요. 부자가 잘 믿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똑 같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해도 아쉬운 사정이 있어서 나오는 것과 아쉬운 것이 없는데도 나오는 것은 다릅니다. 집에 병자가 있고, 집에 고3 학생이 있고,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어서 나오는 사람과 이런 아쉬운 것이 없는데도 나오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이 정말 잘 믿는 것입니다.
지금 이 젊은이는 병들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생의 갈증 때문에 나온 것 입니다. 마음 이 고귀합니다. 동기가 아름답습니다. 거기다가 나오는 자세도 좋아요. 17절에 보시면 여기 보십시오. 꿇어앉았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을 보세요. 그는 돈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마지막이 나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는 돌아갔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축 쳐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 사람의 모습을 연상해 보세요. 참 안 됐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재물이 걸림돌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젊은이를 보신 후에 주님은 오늘의 잠언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씀이 바로 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재물과 구원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잠언 말씀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성경에 주님의 잠언의 말씀이 대개 38가지 정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16가지 그러니까 40%정도가 재물과 관계된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서도 10절 가운데 3절이 돈과 관련된 교훈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도 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재물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겠는가? 어떤 재물관을 갖고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 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사용되면 소중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우선 순위가 바뀌면 재물은 큰 가시가 되고 큰 걸림 돌이 됩니다. 심지어 천국에도 못 들어가게 막습니다. 그렇게 되면 재물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재물을 바로 관리하면 인생이 자유로워지고, 재물을 바로 관리하지 못하면 재물의 노예 로 살아가게 됩니다. 돈이 폭군이 되는 것 입니다. 일단 돈만 있으면 많은 것들이 현실적으로 해결이 되니까 돈이면 다 되는 줄 착각하는 것 입니다. 매력이 생기는 것 입니다. 화려해 보입니다. 돈이 만능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하나님 보다 더 중해지고 하나님 보다 더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탐욕 때문에 멸망한 사례들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간(수 7장), 발람(민 22-24), 게하시(왕하 5), 유다(마 27:5, 행 1:18-19),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마술사 시몬(행 8:9-24)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돈에 의해 기만당한 대표적인 몇몇 사례들을 본다면, 제일 먼저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돈은 그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그의 인생까지 사들인 강력한 영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맘몬에 의해 기만당하고 희생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 때문에 자신들의 헌신을 위선이라는 포장지로 크고 예쁘게 포장함으로 하나님께 감히 거짓말을 하다가(행 5:3)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유다도 얼마 되지 않는 은 삼십 때문에 자신의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이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이 하는 권능을 보고 돈으로 그 권능을 사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을 받게 되는 마술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돈으로 구원과 직분과 권세를 사려고 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사건은 하나의 좋은 경고가 될 것입니다. 발람이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뜻을 이루지 못하자 재물에 대한 탐욕은 그로 하여금 교활한 간계로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시켰습니다. 막강한 부와 권력이 솔로몬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벗어나 우상숭배와 타락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하찮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이 엘리야의 충성되었던 종 게하시로 하여금 탐욕에 빠져 나병환자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왕하 5장). 그래서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은 주께 도전하는 마음입니다. 재물에 마음이 붙잡히기 시작하면 보이는 게 없어집니다. 자식도 아내도 남편 도 안 보입니다. 교회도 안 보입니다. 돈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자기가 자기의 발목을 자르 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험금을 탈 수 있다면 좋다는 것 입니다.(복권, 도박, 증권에 미친 사람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단계입니 다.) 그러므로 돈에 미치지 않도록, 돈에 마음을 통째로 빼앗기기 전에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도 돌 게 만듭니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돈이 꽤 있다고 해서 안하무인(眼下無 人)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만 있으면 사람들이 다 자기 밑으로 들어온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것 입니다. 오늘 대화 도중에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니 주님 말씀 하시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하십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가난 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낙타 같이 높고 큰 사람을 낮추고 낮 춰 작게작게 만들어서 낮아지게 하시므로 바늘 귀로도 들어 갈수 있 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전에 부흥 목사님들이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추켜주면 속으로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저의를 의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해보니까 그런 분들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헌금과 믿음의 정도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무조건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헌금에 인색한 사람이 믿음이 좋은 예는 극 히 적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다 희생적으로 헌금을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 체험도 많고 성경 지식도 많고 전도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들이 영적으로 어리고 육적이 라는 사람이라고 평을 하고 있습니다(고전 3:1). 그 증거중의 하나가 헌금에 인색한 것입니다. 이런 권유가 필요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약정을 해 놓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0-11절). 우리의 신앙 성장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재물입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면서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하여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을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 에 비유하셨습니다(마 13:22). 헌금에 인색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재물이 주인이기 때문인 수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희생적인 헌금입니다.
희생적인 헌금은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재물의 지배에 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믿음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도 십일조를 시작하면서 믿음이 부쩍 자랐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헌금은 우리를 재물의 파워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세상은 지금도 돈 때 문에 도둑질하고, 돈 때문에 강도질을 하고, 돈 때문에 형제끼리, 친구끼리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사랑에 금이 가고, 돈 때문에 전쟁도 일어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돈 때문에 범죄 행위를 하고, 끝내는 자살과 살인이라는 극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 다. 요즘 신문에 보도된 제목만 보더라도 ‘빚 갚지 못해 사채업자 살해’, ‘빚 고민으로 자살’, ‘일가족 동반자살’, ‘주부은행강도’, ‘사채의 늪에서 헤매는 사람들’, ‘카드 빚 때문에 여자 친구 팔아 넘겨’ 등등 나열하기조차 어렵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잠 4:23 에 보면 마음을 지키라 이에서 생명의 근원이 난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의 상태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재물관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 6:21, 누가 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재물을 관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나아가 신앙에 대하여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재물관은 곧 신앙과 직결이 됩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른 물질관의 신앙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바른 재물관은 무엇일까요.
1. 재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재물에다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른 재물관을 가진 자는 재물에다가 인생의 승부를 걸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희망과 비전을 품는 자입니다.
1) 물질 때문에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17절, "마음을 높이지 말고" . 이상하게도 사람은 돈이 좀 있으면 거 들먹거리고 교만하게 됩니다. 겔 28:5,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사회풍토가 성공의 기준을 돈을 많이 버는 것에다가 두고 , 돈 많은 것을 곧 성공의 척도로 삼기 때문에 사람이 교만하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고,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 물질을 많이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 것도 아니요 물질이 많다고 해서 곧 그 사람 인격이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많은 것을 할 수가 있기에 자기가 최고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2) 물질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17절,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재물이라는 것은 오늘 있다가도 내일 없을 수가 있고, 오늘 없다가도 내일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재물이 항상 내 손에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물질을 잃어버릴 수도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돌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잠 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항상 가변성을 가지고 있는 소망을 두게 되면 마음도 생활도 신앙도 카멜리온처럼 항상 변하게 마련입니다.
3) 물질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17절,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물질과 관련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물질의 주권자가 되시어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시고 누릴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 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바른 물질관은 어떤 경우에서도 물질 때문에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2.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18절,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목적이었을까?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행20:35, 주는 자의 복을 누려야합니다. 마5:14,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이 무엇입니까?
마 5;16 착한 행실을 통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 차고 넘치도록 선을 베풀어야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물질은 모으는 데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쓰는데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사용되어지는 것에 그 가치와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목적이 분명하면 반드시 그 일을 하고야 맙니다. 돈 버는 목적이 분명하면 반드시 돈을 벌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이 이웃에게 착한 행실을 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되 차고 넘쳐야 합니다. 한 두번에 그쳐서는 안 되고 일평생하여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중단 없이 하여야 합니다. 인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성껏 차고 넘치도록 해야합니다(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2) 즐거운 마음으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선을 행하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못해서 해서 안 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선을 행하는 데는 열매가 없습니다.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3) 긍휼의 마음으로 선을 베풀어야합니다.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행의 동기가 바로 긍휼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선한 욕구를 채운다거나, 공치사하기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선행을 자기를 드러내려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고 오직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여야합니다. 여기서 '동정'이라는 말은 마음의 코이노니아, 마음을 주고받는 것 을 말합니다. 단지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눅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물질만 베푼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베푼 것입니다.
3. 내세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 빈손으로 가지만 천국에 도착해 보니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이 세상에서 삶의 질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사용할 때 이 땅에서 얼마나 바르게, 의미있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내세에 상급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재물에 소망을 두고 이웃에 선을 베풀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배만을 위한 자들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이웃에게 선을 베푼 자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갈 6:7,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1) 죽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장래에' 이것은 10년 20년 뒤의 장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의 세상을 말합니다. 한국말이 재미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장래(將來)에 장례(葬禮)가 있습니다. 앞으로 곧 닥쳐올 그날에 내 시신을 장사지내는 장례식이 있을 겁니다. 그 죽음을 기억하고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것 실컷 쓰고 죽자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나는 죽을 터인데 죽기 전에 어떻게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히 9:27,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2)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이 땅에서 자기만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였던 자는 죽은 다음에 자기를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선을 베풀었던 자는 죽은 다음에 자기를 위하여 쌓아놓은 것이 많은 자입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3) 죽음 이후에 생명의 주님을 만날 준비해야 합니다.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 영생 얻은 자의 복된 삶을 말합니다. 저는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을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자도 영원히 살기에 저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생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 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 자체가 영생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은 온전치 못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이르렀을 때 참된 생명의 주님을 만날 때 완전한 영생에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생명 얻은 자는 생명의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합니다. 주님은 물어 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재물 너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사용하다가 왔느냐?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로서 주인 되시는 주님께 보고를 해야만 합니다. 그 때 대답할 답변을 이 땅에서의 선행의 삶을 통하여 준비해야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 아시죠. 한 해 소출이 넘쳤을 때 그는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창고만 크게 늘렸습니다. 그리고 배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눅 12:19,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러나 그 계획이 얼마나 오래 갔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은 자에게 말합니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 어리석은 부자는 죽음도 생각하지 못했고,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더구나 장래에 하나님 만날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원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였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던 한 부자청년, 그도 올바른 재물관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행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올바른 재물관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가롯 유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물질관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 앞에 나와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 가난하였지만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과부, 자기의 새 무덤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내어놓았던 부자 아리 마대 요셉, 자기의 소유의 절반이라도 내어놓았던 삭개오 모두들 올바른 재물관위에 신앙이 형성되었던 자들입니다. 재물은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전 10:19). 돈은 범사에 응용이 될 뿐입니다. 올바른 재물관을 가집시다
1) 오직 하나님께 소망 을 두시므로 맘몬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2)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선한 사업에 부하시기 바랍니다
3) 내세를 대비하며 사시기 바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