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고 선위를 받은 숙종(1054~1105. 재위 1095~1105)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숙청을 이어갔다. 그 동안 인주 이씨의 발호로 어지러워진 조정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취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숙종은 이자의 제거에 가장 공이 컸던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제수한 뒤 나머지 자
리도 모두 측근들로 채웠다. 소란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되어갈 즈음, 꾸준히 세를 불려온 여진족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했다. 숙종은 군사제도를 개편하여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급변하
는 내외 정세에 대응해나갔다. 숙종은 제11대 문종이 ‘훗날 왕실을 부흥시킬 재목’이라며 칭찬했을
정도로 총명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숙종은 1096년 유학자들의 집요한 요청을 수락하여 6촌 이내 친척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
포했다. 그때까지 고려 왕실은 신라의 혼인풍습을 수용하여 혈통 보존이라는 명분하에 이복인 경우
친남매 간에도 혼인을 허용해왔는데, 항렬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콩가루 집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숙종이 유림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인 데는 송나라에서 족내혼을 금하기 시
작했다는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나라에서도 족내혼 관습이 도태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왕실에
서나 백성들 사이에서나 6촌 이내의 혼인이 단칼에 근절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의 김흥국, 이정, 박명수
1097년에는 송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주전관(鑄錢官)으
로 하여금 동전을 만들어 유통하도록 했다. 고려에서 동전이 처음 주조된 것은 성종15년(996)이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폐의 가치나 모양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왕실이나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다가 슬그머니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때 주조된 동전 역시 백성들에게까지 유통되었
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사」에는 동국중보‧동국통보‧삼한통보‧해동중보‧해동통보 등이 발행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언제 얼마나 발행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1101년에는 한반도 모양의 은 1근짜리 은병(銀甁)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널
리 통용되지는 않았다. 은병은 현재 유물이 남아있다. 1101년 3월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여
출판을 확대했다.
숙종이 조카 헌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것은 41세 때였다. 이미 고려왕들의 평균수명(42세)에 가까
운 나이였다. 당시로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 나이였다는 뜻이다. 숙종이 신임하던 이복동생 왕
수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만약의 경우 보위를 차지하기 위해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다
는 첩보가 올라왔다. 1100년 숙종은 왕수를 유배하는 한편, 장남 왕우를 태자에 책봉하여 자신의 형
제들이 더 이상 보위에 군침을 흘릴 수 없도록 조치했다.
1101년 말부터 동북면에서 잇달아 급보가 올라왔다. 강성해진 여진족이 기마병을 앞세워 국경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가 되돌아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의 방위군이 얼마나 대비태세를 잘 갖추고
있는지 간을 보는 모양이었다. 숙종은 추밀원지주사(정3품)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조직
한 뒤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별무반에는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중
들로 구성된 항마군 등이 있었다. 1102년 4월, 숙종은 東여진 추장이 보낸 사신을 환대하여 보냈으
며, 그해 11월에는 東여진의 요청에 다라 은그릇 제조기술자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 끝에
1103년 7월에는 東여진과 정식 국교를 맺고 평화공존을 약조했다.
그러나 국교체결문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인 1104년 정월, 東여진 추장이 정주 관문 밖에 군사를 집
결시키고 있다는 급보가 올라왔다. 숙종은 평장사(정2품) 임간을 동북면 병마사에 제수하여 급파했
다. 그러나 임간은 초전에 대패했다. 숙종은 임간을 유배하고 문신(文臣)인 추밀원사(종2품) 윤관을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에 제수하여 급파했다. 윤관도 첫 전투에서는 패하기는 했지만, 東여진 추장을
설득하여 화의를 맺은 뒤 귀경했다.
1104년 5월, 1101년에 착공된 남경의 별궁이 준공되자 그해 8월 숙종은 중신들과 함께 남경에 행차하
여 별궁 축조에 공이 높은 신하들을 포상하고 노역꾼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별궁은 지금의 경복궁
이나 청와대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수도 개경을 중앙행정의 중심지로, 서경(평
양)‧남경(서울)‧동경(경주) 등 3경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활용했다. 남경은 충렬왕 34년(1308) 한양
부로 개칭되어 조선말까지 이름을 이어간다.
즉위 후 잠시도 쉴 틈 없이 국정을 쇄신하고 강온 전략을 병행하며 외교전략을 펼치는 한편, 국방을
강화하여 날로 강성해지는 여진의 외침을 막아온 숙종은 재위 10년 만인 1105년, 서경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의 능에 제사를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어가(御駕) 안에서 승하했다. 천수 52세의 노
년이었다. 52년의 장수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명의왕후만 두었다. 그러나 밤일에는 충실하여 명의왕
후로부터 7남 4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장남 우(俁)가 일찌감치 태자로 책봉되어 있다가 부왕이 승하
하자 제16대 예종으로 보위를 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남한산성 걷기 모임에 서둘러 나갑니다. 성곽에서 보는 시정이 맑고 봄 한창인 풍경을 즐길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함께 하는 즐거움이 있기에 거르지 않고 월례행사로 오래동안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