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다른 한축인 등나무꽃
다양한 색상과 휘휘 늘어진 자태도 일품이지만
여인네 페로몬 같은 은은한 향기는 가히 뇌쇄적이다.
19세에 즉위한 의종(1127~1173. 재위 1146~1173)은 묘청의 난을 거울삼아 초기부터 친위세력 강
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 탓에 아래 달린 것은 서지도 않는 환관들이 위에 달린 목만 빳빳이 세운 채
중신들을 깔보기 시작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유학이 고려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무신들을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는데, 이 풍조는 조
선까지 이어져 무신을 업신여기고 국방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은 왜놈들에게 병탄되는 수모까지 겪었
다.
의종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멀리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특히 격구를 좋아하여 환관이나 무장들과 어
울려 국사를 도외시한 채 종일 뛰어놀기 일쑤였다. 즉위 초에는 부왕 때 공신인 김부식‧임원후 등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지나치게 간섭을 해대자 의종은 이들을 멀리하고 더욱 환관
들 위주로 정사를 펼치기 시작했다. 의종은 잔소리꾼들을 만나기 싫어 며칠 동안 편전에는 나가지도
않고 환관이나 무장들과 어울려 격구만 계속하기도 했다. 말발이 세진 환관들의 유언비어와 무고가
난무하여 조정은 무질서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즉위 이듬해인 1147년 서경의 불평분자들이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
다가 발각되었다. 이들은 관군에게 추포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1148년 10월에는 서경파들이 또다시
송나라 사람 정철과 공모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히 처단되기도 했다. 1151년
대간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의종에게 제발 정신 좀 차리고 국사에 신경을 쓰라고 진언했지만, 의종
은 오히려 진언을 주도한 지주사(정3품) 정습명을 삭직하여 유배에 처했다. 이때부터 의종은 대간들
의 진언을 일체 금지시켰다.
1157년에는 환관들이 간신배들과 짜고 인종의 2남이자 의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대녕후 왕경을 유배
시키는 데 성공했다. 태생적으로 옹졸한 의종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서는 아우 경을 시기하여 눈
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무고가 있자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멀리 천안부
로 유배시켰던 것이다. 의종은 아우를 무고한 환관 정함에게 합문지후(정7품) 벼슬까지 내렸다. 비록
하위직급이지만 합문지후 자리는 문관들만 앉힐 수 있는 자리였다. 이에 문관들이 등청거부운동을
벌이자 의종은 마지못해 정함의 벼슬을 삭직했다.
문신들의 잇단 청원으로 의종은 눈물을 머금고 측근 환관 수십 명을 축출했으며, 대간들의 목숨을 건
진언을 받아들여 격구도 멀리했다. 대신 주색잡기로 방향을 돌렸다. 이복기‧임종식‧한뢰 등 아첨 잘
하는 문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평소 쓴소리 잘하던 중신들의 저택을 몰수하여 향락의 장소로 삼았으
며, 민가 50여 채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호화찬란한 태평정을 지어 연일 기생들을 끼고 술을 마시며
음란한 짓을 했다. 간신들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보면 빼앗아다 의종에게 바쳐 점수
를 따기에 바빴다. 주변에 아첨배들이 들끓자 의종은 왕권이 강화된 것으로 믿고 삭직했던 환관 정함
을 다시 불러들여 합문지후에 제수했으며, 점쟁이 최순실, 아니 영의에게 벼슬을 내려 측근에 두고
그의 조언대로 정무를 처결했다.
의종은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밤새 주색잡기를 즐길 때마다 정중부를 비롯한 고위 무관들로 하여금
주변을 호위하도록 했다. 의종과 함께 술을 마시는 하위직 문신들이나 환관들은 그러한 무관들을 노
골적으로 멸시하기 시작했다. 합문지후 정함을 필두로 박희준‧백선연‧왕광치‧유장 등 의종의 측근 환
관들은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 모두 백 칸이 넘는 대저택과 수십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박봉에 시달리는 남루한 무관들을 얕볼 만도 했다. 특히 환관의 우두머리 정함과 백성연은 눈짓으로
고위 무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등 안하무인이었다.
1170년 8월, 의종이 보현원 인근 경치 좋은 곳에서 문신들과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의종은
흥을 돋우기 위해 무관들에게 수박희(우리 고유무술인 태껸의 한자식 표기) 시합을 시켰다. 시합 도
중 하급 문신 한뢰가 아버지뻘인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상장군 정중부를 비롯하여 주석을 경
호하고 있던 고위 무관들이 격노하여 칼을 뽑아들 기세였지만, 의종이 중재에 나서 겨우 진정시켰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의종이 술타령을 계속하기 위해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고위무관 이고‧이의방 등
이 의종 곁에 붙어 앉아 한창 아첨을 떨고 있는 한뢰를 필두로 여러 문신들과 측근 환관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내친 김에 상장군 정중부는 무신들과 함께 대궐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대궐에 있는 추밀원 부사 양순
정 등 50여 명의 문신들과 환관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피의 숙청이 마무리되자 그해 9월 정중부
는 의종을 거제도에, 태자를 진도에 유배하고 의종의 동복아우인 익양공 호(晧)를 보위(제19대 명종)
에 올렸다. 이 일련의 사태를 역사에서는 <정중부의 난>이라고 한다. <정중부의 난>으로 문신귀족
들은 일거에 몰락했으며, 이후 100년 동안 무신정권이 고려를 지배한다. 이처럼 무신의 난은 무능하
고 타락한 의종이 자초한 정변이었던 것이다.
명종 즉위 후인 1173년 8월, 문신 김보당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제도에 유배 중인 의종을
모시고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첩보를 입수한 이의민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
고 경주로 내려와 이들을 일망타진함으로써 거병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났다. 이 일로 수많은
문신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참수되었다. 그해 10월, 이의민은 화근인 의종도 살해해버렸다. 천수 46
세, 재위 27년 만이었다. 의종은 세 왕비를 두었으며, 제1비 장경왕후에게서 효령태자와 3녀를 얻었
다. 폐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던 효령태자의 사망에 관한 역사기록은 없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