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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연구
의자왕
백제 망국을 부른 비운의 군주
의자왕(義慈王)은 백제 최후의 임금이다. 그는 망국의 임금으로서 오랫동안 무능한 임금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과연 의자왕은 형편없는 리더십으로 국정의 혼란을 초래한 끝에 나라를 망친 무능한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황음무도한 국왕이었을까. 참으로 그러했는지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비운의 임금 의자왕이 즉위한 것은 641년 3월. 무왕(武王)의 태자인 그는 결단성이 있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즉위 이듬해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가잠성을 공격할 때 의자왕은 정병 1만 명을 장군 윤충(允忠)에게 주어 대야성을 함락케 하고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 성을 빼앗았는데, 그때 대야주 도독은 신라 정계의 실력자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절치부심하며 기필코 백제를 멸망시키겠노라 맹세하고는 고구려로 당으로 쫓아다니며 원수 갚을 일에 여념이 없었다.
647년. 신라에서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죽고 사촌인 승만(勝曼)이 즉위하니 진덕여왕(眞德女王)이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데리고 당에 건너가 당 태종(唐太宗) 앞에 꿇어앉아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 달라 간청하고, 중국의 의관을 가져다 입고 쓰며, 법흥왕(法興王) 이래의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는가 하면, 아들들을 인질로 남겨두는 등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표현을 빌자면, ‘사대주의의 병균을 이 땅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진골(眞骨)의 씨가 마르자 52세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부인 김문명(金文明)은 김유신의 작은누이동생으로서 당대 신라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처남 매부간이다.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정벌군을 발진시킨 것은 무열왕 7년(660년) 5월 26일.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진주(金眞珠) ․ 김천존(金天存) 등과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6월 18일 오늘의 경기도 이천인 남천정으로 북상했다. 서라벌에서 백제의 도성 소부리(사비성:부여)로 가는 직선거리를 택하지 않고 3배나 먼 길을 돌아서 간 이유는 첫째는 출병을 고구려 공격으로 위장하려는 양동작전이요, 둘째는 국경을 수비하는 백제의 정예군을 우회하여 배후를 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한편 당 고종(唐高宗)의 명령을 받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를 출발, 황해를 건너 6월 21일 덕물도(덕적도)에 상륙하니 무열왕은 오늘의 충북 음성인 금돌성에 머물며 태자 김법민(金法敏), 뒷날의 문무왕(文武王)을 보내 당군을 영접하고 양군이 수륙으로 진격해 7월 10일 백제의 도성 소부리를 총공격하기로 약조했다.
젊어서는 ‘해동증자’ 소리 듣던 의자왕
그러면 그 동안 백제는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즉위 이듬해에 윤충 등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켜 위세를 떨친 의자왕은 그 뒤에도 계속하여 장군 의직(義直) ․ 은상(殷相) 등을 보내 신라를 치고, 재위 15년(655년) 8월에는 수상인 상좌평(上佐平) 성충(成忠)을 보내 동맹을 맺은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바로 그해부터 매사가 빗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그해 2월에 태자궁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고, 궁궐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으며, 그 이듬해 3월에는 ‘궁인(宮人)과 더불어 음란하고 탐락하며 술 마시고 노는 것을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왕은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는 감히 간하는 신하가 없어졌다고 한다.
성충은 어떻게 하여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는가 하면 단재의 주장에 따르면 김유신의 모략전의 제물이 된 때문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라 17관등 중 제9등관인 급찬 조미압(俎未押)이란 자가 있었는데 백제에 포로로 잡혀 좌평 임자(任子)의 가노(家奴)가 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김유신이 조미압을 첩자로 이용하여 임자를 포섭하고 금화(錦花)라는 무녀(巫女)를 여간첩으로 침투시켜 의자왕의 총애를 얻게 하자, 기회주의자인 간신 임자와 요녀 금화가 의자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충신들을 멀리하게 만드니 마침내 백제 국정이 어지럽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평 성충과 장군 윤충을 동일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단재는 다 같이 왕족인 부여씨(夫餘氏)로서 형제간이라고 해석했다.
그리하여 임자와 금화의 요망한 이간질로 왕의 배척을 당해 윤충은 울화병으로 분사(憤死)하고, 성충은 임자와 금화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미움을 받아 옥에 갇혔다고 했다. 성충이 옥중에서 의자왕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충신은 멀리하고 간신은 가까이에 둔 것이 화근
-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므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죽으려 하나이다. 신이 항상 시세(時勢)의 변화를 관찰한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듯합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는 그 지리를 살펴 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아 싸운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겠사오니, 만약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숯고개를 막고 수로로는 기벌포를 지켜 그 험난한 곳에 의지해 막아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 -
그리고 28일간을 굶다가 한을 남기고 이승을 버렸다.
이보다 앞서서 또 다른 충신인 좌평 흥수(興壽) 또한 의자왕의 미움을 받아 오늘의 전남 장흥인 고마미지(古馬彌知)로 귀양 가 있었다.
의자왕은 657년 정월에는 41명이나 되는 왕자들을 모두 좌평을 삼고 식읍을 주었다는 믿기 힘든 말을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에서 기록했는데, 그토록 영특하고 총명하던 의자왕이 재위 20년 중 무슨 까닭으로 마지막 4~5년간 급작스럽게도 멍청하고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전락했다는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궁금하기도 하려니와, 의자왕이 참으로 나라를 망친 무능하고 무도한 임금이라면 어떻게 하여 나라가 망할 때에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을 백마강애서 바닷가까지 울며불며 뒤따라가 애통하고 절통해했으며, 또 당연히 망할 왕국이었다면 백제 유민들이 4년간에 걸쳐 피어린 항쟁을 벌일 턱도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고, 더군다나 김부식은 자칭 ‘신라의 후예’가 아니던가. 그런 까닭에 유독 의자왕 말년에 황당무계한 괴변괴사와 천재지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고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가 당연히 망할 나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온갖 천재지변 괴변괴사는 망국의 조짐인가
655년에 붉은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란 절에 들어가 마구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다가 며칠 뒤에 죽었고, 657년에는 가뭄이 심해 농사를 망쳤으며, 659년에는 수많은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여우 한 마리는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았다고 했다. 또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했으며, 사비하(백마강)에서 세 발이나 되는 큰 고기가 나와 죽었고, 키가 열여덟 자나 되는 여자의 시체가 나루터에 떠올랐다고 했다. 역시 같은 해에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에서 울었다고 했다.
운명의 해인 66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일어났다는 괴변 기사는 점입가경이 아니라 점입가관이다. 소부리의 우물물과 사비하가 피처럼 붉어졌고, 서쪽 바닷가에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하여 떠올랐는가 하면, 개구리 수만 마리가 모여들었고, 까닭 없이 놀란 백성들이 마구 달아나다가 100여 명이 밟혀 죽었다. 또 갑자기 풍우가 몰아쳐 여러 절에 벼락이 떨어졌고, 용 모양의 검붉은 구름이 동서 양쪽 하늘에서 충돌했으며,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중이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어서 괴변은 절정에 이른다. 사슴만한 개가 서쪽에서 나타나 왕궁을 향해 짖다가 사라져버리고, 도성의 수많은 개가 울부짖다가 흩어진 다음,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서는,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부르짖다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그곳을 파보라고 시켰더니 등껍질에 ‘백제는 온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인 거북이 나타났다. 의자왕이 무당에게 물었더니 “온달은 꽉 찼으니 이지러진다는 뜻이고, 초승달은 덜 찼으니 앞으로 점점 차게 된다는 뜻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하여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동서 수륙 양면으로 침공해 온다는 급보에 접한 백제 조정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임금의 정무소인 남당에서 개최하였는데 의견이 분분하였다.
좌평 의직은 “당나라 오랑캐들은 바다를 막 건너와 피곤하고 지쳤을 테니 상륙할 때 바로 치면 이내 깨질 것이요, 오랑캐 군사가 무너지면 신라군은 겁을 먹어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했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군이 도착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전의가 식지 않았을 것이니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렸다 쳐야 하고, 먼저 만만한 신라를 침이 옳다”고 주장했다.
용단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은 귀양살이하는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계책을 물었다. 흥수가 말하기를, “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라 장부 1인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인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니 수륙의 정병을 뽑아 두 곳을 지키게 하고, 대왕은 도성을 방비하다가 되받아치면 백전백승하리다.”고 했다.
성충이 죽어가며 올린 말과 같았으나 임자 일당이 극력 반대했다.
“흥수가 오랜 귀양살이로 대왕을 원망하며 늘 해치려는 마음을 먹고 있을 테니 어찌 그의 말을 따르겠나이까?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게 하여 치면 항아 리 속의 자라를 잡듯이 양 적을 일시에 격살할 수 있으리다.”
의자왕이 들어본즉 저 말도 옳고 이 말도 옳은 것 같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다시 금쪽같은 시간만 허비하였다. 변경의 수비군사가 연달아 들이닥치고 마침내 신라군이 숯고개를 넘어서 무인지경을 가듯 소부리로 쳐들어온다는 보고에 당시 백제 16관등 중 좌평 다음 2품관인 달솔로 있던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나가 막으라고 시켰던 것이었다.
백제망국의 장렬한 서사시 황산벌전투
서기 660년 음력 7월 9일 백제의 수도 소부리, 곧 사비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황산(黃山) 연봉. 대장군 김유신의 신라군 5만은 우세한 병력으로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일시에 짓밟고 돌파하고자 총공격을 개시했다. 북과 징이 귀청을 찢고 군사들의 아우성과 군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산과 들과 하늘을 진동했다. 화살이 비 오듯 날고 군기가 펄럭이고 창검이 무수한 무지개를 그렸다. 하지만 10배의 신라 대군은 백제 5천 결사대의 무서운 기백과 투혼을 당할 수 없어 패하고 물러나기를 네 차례나 거듭했다.
백제 멸망의 비극적 대서사시는 이렇게 황산벌에서 막을 올렸는데, 쓰러져가는 나라의 잔병 5천으로 5만 대군을 맞아 4전 4승의 신화를 남긴 계백은 어떤 인물인가. 한평생을 전쟁터로 떠돌며 숱한 싸움을 치르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겪어온 백전연마의 용장 계백, 그 역시 가정에서는 둘도 없는 지아비였고 아버지였으나, 출전에 앞서 그는 아내와 자식들의 가슴을 칼로 찔러 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노예가 당해야 할 비인간적 치욕을 생각할 때 손수 처자를 죽인 계백의 처사는 가혹한 게 아니라, 당시의 윤리적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뜨겁고 지극한 가족애요 인간애의 발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백은 또한 절박한 극한상황인 전투중임에도 적의 무용(武勇)을 아끼고 사랑하여 소년 화랑 김관창(金官昌)을 살려 보냄으로써 도량 넓은 대장군의 풍모를 보였으며, 죽을 때와 자리를 바로 찾아 비장한 최후를 기꺼이 맞은 진정한 무인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 소부리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황산벌에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다다른 것은 의자왕 20년 음력 7월 9일 새벽이었다. 어제 오후 늦게 도성을 떠나 밤새 달려온 것은 최후의 방어선이요, 전략적 요충인 황산의 관문을 침략자인 신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봉을 이룬 야산의 능선과 골짜기들 너머로 희부옇게 동녘이 터오고 있었다. 밤새 한잠 못 자고 행군해 온 5천 장병은 저마다 핏발 선 눈을 들어 훤하게 밝아 오는 동쪽 하늘을 쳐다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숯고개를 넘어 진격중이라는 5만 대군의 신라병은 아직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백제 군사들은 누구나 이곳이 바로 최후의 싸움터가 되고, 그리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판국에 빠져들긴 했지만 우리 백제가 한때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의 도성까지 함락시키고 그 임금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였는가 하면, 한때는 멀리 중국 대륙까지 건너가 수십만 위(魏)나라 오랑캐 대군을 파죽지세로 깨뜨리며 종횡무진하던 부국강병이 아니었던가.
그런 긍지와 자부심 속에서 연마 단련해 온 전통의 백제군인지라 비록 신라군이 5만의 대군이라 해도 겁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우리 백제군의 원수(元帥)는 상승장군 계백 달솔님이 아닌가 말이다. 다 늙은 김유신쯤이야 여지없이 짓밟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 놈들을 물리치고 소부리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덕물도에 상륙했다는 당나라 오랑캐 따위야 보나마나 마구잡이로 끌어 모아온 오합지졸 시러베 잡놈의 군사들일 게 뻔하니 13만이건 130만이건 모조리 황해 바다 속에 쓸어 넣어 버리면 그만이다!
어제 아침, 임금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기 전부터 계백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늦었다는 사실을.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한 노릇이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고 해도 아니 싸울 수는 없었다. 그저 팔 다리를 묶고 앉아서 적에게 운명을 내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을 다해 싸워서 막아내야만 했다.
하루 종일 사군부(司軍部)의 무독(武督)․좌군(佐軍)․진무(振武) 등 무관들을 이끌고 사비성내 상(上)․하(下)․전(前)․후(後)․중(中) 5부(五部)의 5항(五巷)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모았다. 가까스로 5천 명의 병졸을 모은 것은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갈 무렵이었다.
5천 결사대로 5만 대군을 네 차례나 물리친 계백
천험의 요새 숯고개를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쉽사리 타넘은 김유신은 계백이 진치고 있는 황산의 연봉 앞에 마침내 나타났다. 백제군의 대장기가 산직리산성에서 펄럭이는 것을 본 김유신은 맞은편 곰티산성에 본영을 두고 이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둥둥둥둥 전고(戰鼓)가 울리고, 군기가 펄럭이고, 돌격의 사나운 함성이 산과 들과 하늘을 울렸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창검이 허공중에 무수한 무지개를 그렸다. 백제군이 불과 수천으로 보잘것없다고 여긴 김유신이 압도적인 우세한 대군으로 일거에 짓밟아 버리고 돌파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그것은 오산이요 오판이었다.
목숨 따위야 이미 초개같이 버리기로 작정한 채 일당백의 투혼으로 맞받아 쳐내려오는 백제 5천 결사대의 무서운 기백을 김유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허약해 보이는 적도 과소평가하는 것은 금물인 법. 게다가 백제군은 세 군데 산성에 의지하고 고리처럼 연결되어 좁은 산길을 올라오는 신라군을 밀어붙이니 아무리 10배의 대군이라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또한 백제 결사대의 사령관 계백은 백전연마의 용장이요 탁월한 전략의 명장이라는 사실을 김유신은 67세의 노령 탓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가.
전후 4차에 걸쳐 공세를 취했건만 <삼국사기>에 빛나는 그 숱한 김유신의 전공은 어찌된 노릇인지 5만 대군으로 5천 군사를 당하지 못하여 패배에 패퇴를 거듭하니 소정방과의 약정 기일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참 큰일이다 싶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 날 온종일 4전 4패하여 군사들은 기세가 꺾이고 기력이 떨어지니 김유신은 이튿날 아침 모촌리산성을 치던 좌장군 김품일, 황령산성을 치던 우장군 김흠춘 두 대장을 곰티산성 본영으로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열 곱의 대병으로 이기기는커녕 벌써 1만 가까이 손해만 보았으니 어찌 면목을 세울 수 있겠소? 오늘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을 깨치고 대국병(大國兵)과 합류해야 하오. 약조를 어겨 소(蘇)장군 혼자 싸우다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 신라군의 체면은 어디 가 서 찾으며, 또한 그들이 홀로 싸워 이기더라도 그 수모를 어찌 당할 것인가 그 말이요!”
이에 김흠춘이 화랑인 아들 김반굴(金盤屈)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 해야 마땅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 해야 마땅하거늘, 오늘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 어찌 충효를 다 할 수 있겠느냐?”
반굴이 긴 대답 소리도 없이 “네이!” 한 마디만 남기고 이내 저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백제진으로 달려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김품일 또한 화랑인 아들 김관창을 불러 세우고 장졸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도다! 너는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느뇨?”
관창이 역시 “네이!” 하는 대답 소리 한 마디 끝에 필마단기로 백제 진중으로 달려 들어가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으나 백제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계백이 사로잡혀 온 장수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본즉 아직 어리디 어린 소년인지라 차마 죽이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 “어허,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길게 탄식하며 살려서 돌려보내었다.
관창이 제 아비 품일에게 돌아가 말하기를 “소자가 적진 중에 돌입을 하였으나 적장의 목을 베고 대장기를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맨손으로 곰티재 아래 샘물을 떠 목을 축인 다음 말을 달려 창을 휘두르고 뛰쳐나갔다. 그리하여 힘이 다해 또다시 생포되니 계백은 “이 소년이 죽기를 작정하였으니 어찌 그 장한 뜻을 받아 주지 않겠는가!” 하고는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자식들을 죽여 승리를 구한 김유신의 고육계
품일이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줄줄 흐르는 피가 옷소매를 시뻘겋게 적시는데도 울부짖었다.
“보라! 내 아들의 얼굴이 산 것과도 같도다! 나라 일에 죽었으니 내 오히려 즐거워하노라!”
이에 신라병들이 하나같이 잃었던 용기와 죽었던 힘을 불러일으켜 북치고 함성을 울리며 성난 파도같이 밀고 들어가니, 마침내 일세의 명장인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4전 4승하던 기력이 떨어져 물밀 듯 총공세를 펼치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해 산성의 요새로부터 황산벌로 밀려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전쟁의 원리. 일당백의 투혼과 기백으로 버티던 결사대도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밀려 벌판 여기저기에서 살점을 가르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오장을 쏟으며 백제군은 5천이 3천으로 3천이 1천으로 1천이 100명으로 줄어들어가 마침내 전멸을 당했다.
7월 10일 온종일 걸린 싸움에서 5천 결사대는 처절하게 학살당하고 계백 또한 충장산․충훈산으로도 불리는 수락산 아래서 전사하니 계백의 최후는 곧 백제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5천 명 중에서 가까스로 참살을 면해 포로가 된 자가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황산벌전투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계백이 김유신보다 탁월한 장수라는 판단이 든다. 이름만 결사대였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허약한 5천 명의 군세로서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신라의 5만 대군을 맞아 4전 4승을 거둔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김유신이 김반굴과 김관창 등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고육지책을 쓰지 않았고, 계백에게 만일 군사들을 보충할 여유가 있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틀림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도 없으니 어찌하랴. 이 황산벌전투가 계백군의 장렬한 전몰로 끝나고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123년간의 영화를 자랑하던 백제의 도성 사비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낙화암․대왕포의 한 맺힌 전설을 남긴 채 700년 백제사는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좌평 의직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백강(白江 : 錦江)을 거슬러 올라와 7월 11일 김유신의 신라군과 합류하여 사비성을 포위하니, 의자왕과 태자 효(孝)는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으나 7월 18일 웅진성주 예식의 협박에 못 이겨 투항하고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무비유환의 교훈 되새겨주는 백제의 멸망
당시 백제는 5방 37군 700여 성, 76만 호를 거느린 국세로 능히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단 일주일 만에 제대로 전쟁다운 전쟁도 치러보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던가. 그것은 허약하고 무능한 지배층이 불러온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을까, 왕과 귀족들이 비굴하게 삶을 이어가고자 한 생존본능 때문이었을까.
그해 660년 음력 7월 18일 사비성이 무너지자 신라와 당군이 백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아비규환의 피바다 속에서 도성은 7일 낮 7일 밤을 철저히 불타고 무지막지하게 파괴당해 지상에 버티고 서서 남은 것이라고는 소정방이 자신의 군공을 새긴 오층석탑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다.
8월 15일 석탑에 자신의 군공을 새긴 소정방은 8월 17일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수 88여 명, 백성 1만 2천 807명을 포로로 이끌고 바다를 건너갔다.
이로써 한때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일부를 포함하여 해외 각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해상제국 백제, 또 한때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를 제압하고, 동방의 신흥강국 신라를 압박하던 부국강병의 나라 백제는 31왕 678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한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는 흘러가도 산하는 남는다. 부소산 아래 백마강은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처럼 여전히 흘러갔다. 바다 건너 끌려가는 왕과 대신과 혈육들을 피눈물로 울부짖으며 떠나보낸 망국의 유민들은 어찌 하늘 아래 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토록 무참히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절규하며 나라를 되세우기 위하여 용감히 일어섰으니 그것이 곧 백제의 광복운동이었다.
자칭 ‘신라의 후예’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끝내면서 이렇게 평했다.
- 백제는 말기에 이르러 소행이 도리에 어긋남이 많고,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친해 신라를 침략하여 이에 당 고종(唐高宗)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면서 속으로는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당연하다고 하겠다. -
과연 백제는 김부식의 말처럼 대국에 죄를 지었기에 망해서 마땅한 나라였을까. 또한 의자왕은 형편없는 리더십으로 나라를 망친 무능한 임금이었을까.
백제 망국은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 될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국가안보에는 그 어떤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망국 이후에도 수많은 나라가 이러한 유비무화, 무비유환의 교훈을 망각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걸었다.
국가의 멸망은 내우외환에서 비롯된다는 역사의 진리를 아직도 외면할 것인가.
황원갑<한국사인물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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